과도한 확신은 모든 사실을 잠식시킨다.
의혹 제기와 어떤 사람을 의혹만으로
‘악마의 얼굴’을 가졌다고 단정짓는 무책임한 행동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영화가 저널리즘을 대신하는 상황의 심각성에
언론조차 둔해졌다.
[...]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추적하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무슨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
결코 볼 수 없게 만든다.
– 이라영, 악처, 한겨레 2017.10.26(목) 22면
사실에 바탕해 진실을 파헤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역할이다.
다만 내가 그동안 진실을 얘기해왔다는 것 때문에
내가 앞으로 해줄 이야기들 역시
반드시 진실일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오만일 뿐 아니라 오히려
진실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훼손된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나를 빛낼 수 있는,
나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그럴 듯한 주장들.
저널리스트가 유명인사가 되는 순간,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진실보다 내가 더 빛나지 않도록,
혹 내가 추구하는 진실이 너무 그럴듯해
속아넘어갈 허구가 되지 않도록.
・
그런데 과연,
그녀가 선량한 척 했다면,
순진한 척 했다면,
약한 척 했다면,
혹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예뻤다면’,
아니면 성 역할이 뒤바뀌어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런 논란이 벌어졌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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