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금 ‘정규직’은 오히려 하나의
신분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
하지만 우리는 정규직의 정의에 포함된
안정성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자격 있는 몇몇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려할 권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어떤 삶도 비정규일 수 없다.
고용 형태가 어떻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정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 이원재, “‘정규직, 비정규직’ 그만 쓰면 어떨까”,
한겨레 2017.12.6(수) 27면
아무리 봐도 공채시험제도란
한 사람을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점수 몇 가지로 평생의 지위가 결정되는
참으로 이상한 제도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제는
이 제도마저 없어진다면
그나마 공채제도가 보장하던
경쟁의 공정성마저 무너져버릴 것이라는 데,
또 정규직이 상징하던 고용의 안정성 역시
무너져버릴 것이 자명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다보니 공채출신 정규직과
그렇지 않은 경력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일종의 신분관계가 형성되고 갈등이 증폭된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의 삶은 곤고해지고
정규직의 삶 역시 (언제 비정규화될 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린다.
과연 우리에게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우리에게 해결할 의지가 있을까.
아니다,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그 많은 비정규직들은
정규직화될 수 있을까,
정규직화한다면
내가 찬성할 수 있을까?
나의 기득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나는 과연 해결할 방법이 있는가,
해결할 의지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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