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이 길이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곳으로 가는 것보다

가고 있는 중인 것을 더 좋아하는,


이 빌어먹을 驛馬煞!




자고 일어나면 죽기 전날이었으면 좋겠다,

죽음이 그렇게 쉬울 수 있다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죽음은 ‘사건’이라기보다 ‘과정’이므로, 

죽음에서 고통을 온전히 지워내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죽음에 있어 지름길은 없다, 

평생에 걸쳐 겪어내야 할 뿐. 

오래된 소셜미디어 계정을 정리하다보니

사실 나는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다. 

누구와도, 아무하고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과연 ‘대화’였던가? 

잘 모르겠다. 


그저 혼잣말들, 

혹은

들어줬으면 바라면서 허공에 대고 토하는, 

한숨 같은 방백들. 

– 그예 떠나십니까.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 애초에 居한 곳도 處한 곳도 없는데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이냐.


내가 용서를 구할 수, 

바랄 수 있을까 

과연


스스로 용서 못 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Soliloqu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CLXII : 애초에 居한 곳도 處한 곳도  (0) 2017.05.01
CLX : 나 자신을 안다고 해서  (0) 2017.05.01
CLIX  (0) 2017.04.27
나 자신을 안다고 해서 
꼭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이유는

최소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Merde!

 Merde!

 Merde!



(살다보면 그냥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인류에게 남겨진 시간은 너무 짧고, 

내게 남은 세월은 너무 길다. 


혹은 내게 남겨진 세월이 너무 긴 탓에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짧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동원하든 

그 차이란 매우 사소하다. 


인류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남아있는 나날은  

아마도 대개는 끔찍할 것이므로. 


너무 많이, 

너무 오래. 


언어폭력은 그냥 언어폭력일 뿐이고, 

무례함은 그냥 무례함일 뿐이다. 
이건 어느 기준으로 봐도 불쾌해야 정상이다. 
이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곧 
현실세계의 언어폭력과 무례함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우린 이미 그 결과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아닌 게 아니라 나는 한국어에 내재된 

이 도저한 위계질서, 

존댓말–반말이라는 관계로 규정되는

비민주적이고도 신분제적인 질서가 

몹시 불편하다. 


반말은 종종 하대라고 표현되니, 

우리는 이미 우리 언어가 위아래의 위계를

나타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언어를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한 사회를 구축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가능한 것인가.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릴 적 형제간에 하나라도 덜 뺏기기 위해, 

혹은 출근길에 이동하면서라도 조금 더 먹기 위해

입 안 가득 쵸코볼이나 기타 등속의 것을 우겨넣을 때, 


과연 나는 도토리를 입에 가득 물고 숨길 곳을 찾는

설치류과 동물에서 얼마나 멀리 ‘진화’한 것인가,

결국 삶의 본질이란 다르지 않은 게 아닌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 우스꽝스럽고 

역시 조금은 서글픈 노릇이라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