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정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내가 뭘 모르는 지도 모르는, 

그래서 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다. 


‘앎’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완벽한 ‘앎’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얼마나 ‘알면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떤 글은

도저히 한 두 문장을

인용구로 따올 수 없는 글이 있다. 


이를테면 하종강 선생의, 

한겨레 신문 2017년 3월 29일자에 실린

떠오르는 세월호 몸체를 보며”가 그렇다. 


세상 많은 일이 한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없듯, 

세상을, 세상의 진실을 담은 글 역시 

그러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그리하여 그들은 몽땅 처벌받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감시하면서
 ‘법 앞의 평등’ 원리가 작동되도록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과정적 규범을 세우고 함께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 우린 알고 있다, 

알면서도 종종 

유혹에 시달린다.


(아으, 저 毒龍을 누가 퇴치할 것인가.)[각주:1]



  1. 박상륭 소설의 제목을 변용하였다. [본문으로]

인생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 마틴 루터 킹



아마도 이것이 우리 삶에서 오로지, 유일하게, 

의미있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부끄러워서 

부끄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사실은 송구스러운. 



스스로의 가치에 의문을 둔, 

그래서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있는 자는

남의 일에 참견하면 안 된다. 


(좀 닥치고 가만히 있자, 제발.)


당신이 나를 나만큼은 몰라서 참 다행이다, 

당신이 나를 나만큼 알게 된다면

당신도 나를 나만큼이나 혐오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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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비겁하고 

잔혹하기 쉬운 인간동물인지 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에 힘을 보태지 않으려고 고기를 안 먹는다. 

서툴러도 나는 채식주의자이고 싶다. 

조금이라도 내 존재가 덜 가해할 수 있도록. 

홍승희, ‘서툰 채식주의자’, “한겨레” 2017년 2월 27일 25면



사실 나는 

(그녀와는 달리)

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비겁하고 잔혹한 

인간동물인지 안다. 

나의 서툰 부분채식은

그나마 나의 폭력성을 위장하기 위한 

奸計라는 것도.

하지만 어쩌랴, 

이 계략이 

부디 통하기를 바랄 수밖에.  


간혹 

마이킹도 희한하고 

앰비언스 처리도 엉망이어서 

소리가 붕 떠 있거나 

목욕탕에서 울리는 것 같은 음반이 있다. 


그냥은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싶을 때, 

소리가 흐리멍텅한 편이라

평소에 잘 듣지 않던 낡은 스피커에 물리면

또 그것대로 들어줄 만하고

나름 맛이 산다. 


감출 건 감춰주고, 

흠결은 흐릿하게 덮어두고, 

그냥 음악에만 집중하라고. 


인생이 뭐 다르겠냐고, 

그렇게 모자란 것들끼리 

서로서로 채워주면서 

한 세월 버티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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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와 질시가

쉴 새 없이 충돌하는

승자없는 전쟁터, 


SNS란

누군가의 남루함은 걸러내고

내 일상의 비루함은 선명하게 반영하는, 


이상한 거울이다,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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