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모든 일에, 

특히 몸을 쓰는 일에 요령이 없었는데,

실로 뭔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고 있더라도 책에서 읽거나 
남에게 주워들은 간접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뭔가를 해본다는 것, 
직접 해본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터득한 지식과 요령이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이제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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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을 자전거로 완주하는 건 바보짓이다. 

서우봉에서 시작하는 19코스를 넘어보니 알겠다.  

뭐든 해보고서야 깨달아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각주:1], 에서

묵직해진 가슴이 

‘(숨어 살 왕국이 필요하다)’[각주:2], 에서

목울대로 울컥, 


제주도 일주를 마쳐가는 즈음 

아쉬운 마음에 자꾸 도착을 미루고 있는

동복항 근처의 어느 카페,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뒤늦게 읽으며

마음 속으로만 끄윽끄윽 울고 있다,


‘하늘이 운다

구름이 운다

일생이 불려가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마지막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각주:3]


  1. 최승자,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본문으로]
  2. 최승자, 어느 봄날 [본문으로]
  3. 최승자, 어느 날 나는 [본문으로]


버스로 다섯 시간 반, 배로 세 시간,

사이사이 자전거로 두 시간,

이십대에 했어야 할 일을
사십 넘어 하려니 몸이 고되다.



“아가, 살다 보면 자기를 위한 일이 아니더라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단다. 

싸우는 게 옳은 선택일 때가 있는 법이야. 

내일은 그 친구를 보호해주렴. 

너를 보호할 일이 생기거든 그렇게 하고.”

– J.D. 밴스, “힐빌리의 노래”,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2017



켄터키의 산골지방에서 가난하게 살다 도시로 이주,

중산층의 삶을 잠깐 맛보고 제조업의 몰락과 함께

무너져가는 러스트 벨트의 어느 동네 

가족사에 대한 일종의 회고록인데, 


어찌보면 폭력적이고 전근대적이며

막무가내로 살아온 할머니이건만, 

(내 생각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나와 동시대인들 대다수가 이렇게 교육받았다면, 

혹은 내 이전과 다음 세대들이 이렇게 교육받았다면

이 땅에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적지 않은 사람들 덕분에

이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유지되는 것일 수도. 







아,

참, 

좋다.


(동시의 매력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상대방 입장을

절대 알 수 없다고도 하지만, 

경험은 자기 중심의 강고한 기준과 편견을 만들어 

생각과 가치를 특정 벽에 가두어 놓기 쉽게 하기도 한다. 

권인숙, 군개혁, ‘경험의 벽’은 통곡의 벽인가, 한겨레 2017.8.23(수) 26


내가 해 봐서 아는데, 

혹은 나도 해 봐서 아는데,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옛날에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약과지... 

의 폭력성이란!


반면 나이를 먹어서도, 

이 모든 것을 겪고 나서도

겸허하고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he “frequently had to cut the legs off fully conscious cows. 

They blink, make noises... heads moving 

and eyes wide open and looking around, 

but the line is never stopped simply because an animal is alive.”

그(도축 노동자)는 

“자주 완전히 의식이 남아있는 소들의 

다리를 도려내야 했다. 

그 소들은 눈을 깜빡이고, 신음하고... 

머리를 움직이며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도축공장의 생산라인은 단지 그 소들이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잠시라도 멈추지 않는다.”

– Richard A. Oppenlander, Comfortably UnawareMinneapolis: Langdon Street Press, 2011


과연

이래도

먹을텐가. 

 

“듣고보면 끔찍하지. 

하지만 어차피 ‘그것’들은 

그런 목적으로 태어난 거 아냐? 

그래도 나는 먹을테다”는 심리

얼마나 잔인하며 맹목적인가


만약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비정상적인 속도로 살을 찌우고

원래 수명에 한참 못 미치는 생을 살며

이윽고 상당수는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도살하는 사람조차 정신을 못 차릴 속도로 

을 잘리고 피를 쏟아내고 사지가 잘리고 

혹은 뜨거운 물에 담궈져 털을 뽑히는, 

비참한 삶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 말미에 나온 어느 도축 노동자의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 

슬프고 화나고 조금 더 일찍 

육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몹시도 후회스럽다. 


그래서 남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후회할까 보아서. 

Animals are, in fact, animals—not meat. 

“Meat” is a term contrived and 

used by humans 

to obscure the reality of what they choose 

to put in their mouth. 

동물은 동물, 생명이 있는 존재다. 

다시 말해 동물은 그 자체로 ‘고기’가 아니다. 

‘고기’라는 단어는 인간이 그들 입 속으로

무엇을 집어 삼키는 지에 대한 본질을 흐리기 위해

인간 자신이 고안해내고 사용하는 단어다. 

– Richard A. Oppenlander, Comfortably UnawareMinneapolis: Langdon Street Press, 2011



그 생명체가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건강하지 못한 채로 키워지는 지, 

또 닭은 3~40여일, 돼지는 대략 6개월 만에 

그리고 소는 30개월 이내에, 

채 다 성장하기도 전에 도축되며 

도축과정이 아무리 현대화되고

최대한 고통을 줄이도록 설계된다 한들

도축 자체로 그 생명에게는 거대한 폭력임을, 


무엇보다 생명을 죽인다는 게 

정말 어떤 것인지 

대개는 사회적 약자[각주:1]에게 그 노동을 전가함으로써

우리가 직접 보지 않게 되니 

아주 간편하게comfortably 아무 죄책감 없이

스티로폼과 랩으로 포장된 ‘고기’와  

원래의 생명체 사이의 관계에대해 

무지한unaware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체가 고기가 되는 과정의 끔찍함을 알고도

정말로 계속 육식을 하고자 한다면, 

자기 손으로 키워 자기 손으로 도축하거나

혹은 (현대사회에서 거의 불가능하지만) 사냥을 한 

동물을 먹는 것이 그나마 더 윤리적이다. 


  1. 일례로 미국의 도축업계는 멕시코와 남미 출신의 이민 노동자가 대다수라고 한다. [본문으로]

“세계보건기구는 미세먼지 오염 때문에 발생하는 

조기 사망자 수를 7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담배 때문에 죽는 조기 사망자 수보다 많다.”


“2016년 한해 일하다 죽은 노동자의 수가 

하루 4명꼴... 상주 하청업체의 산재 사망률은 

원청보다 8배 높다.”


“생체리듬을 교란시키는 교대근무는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발암요인(그룹2A)이다.


김창엽, ‘의료보험’을 넘어 ‘건강보장’으로, 한겨레 2017.8.17 23면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록’부터 해야 한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기 위해 

치료보다 예방이 건강을 책임지는

정부의 역할임을 강조한 이 글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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