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 낭만주의 그리고 숲. 
세 가지 키워드를 조합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적어도 내게는 ‘unheimlich’다. 

기이하고 으스스하고 낯선 무엇. 
집의 편안함과는 정반대의 장소. 

더군다나 슈만이라면, 
누이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우울과 
정신적인 문제들로 평생을 싸웠던 슈만에게라면, 
그런 숲을 연상하는 것도 
퍽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2
대체로 슈만의 피아노 음악들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고
전개나 발전, 혹은 견고한 형식과는 상관없이 
늘 부유하는 듯이 들린다. 

불안과 평온 사이를 정처없이 방황하는, 
닻을 내릴 곳을 찾지 못한 음표들. 
그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줄곧 되돌아오는 듯한, 
끝에서 시작하는 듯한”,[각주:1]

혹은 “언제나 소심한 태도로 쭈뼛거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 하며, 
“민감하고 여린”, 
마치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말하는”[각주:2] 듯한, 

그런 종류의 음악,
어둡거나 애틋하거나. 

3
하지만 1848년에서 49년에 걸쳐, 
그의 정신이 그나마 ‘온전했던’ 시기에 씌어진
“숲의 정경Waldszenen”, Op.82은 예기치 않게 
첫 곡부터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이다. 
‘Eintritt(입구)’로 시작해 ‘Abschied(고별)’로 끝나는, 
목가적이고 소박한 산책. 

그러므로 생각컨대, 
슈만의 이 숲은 아침해가 밝아오는 숲. 
열 보만 걸어 들어가도 어둑어둑한, 
한낮에도 깊은 그늘로 스산한 숲이 아니라,

혹은 한밤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그림자라거나
아니면 나로 인해 놀란 작은 생명체들이 바스락거리며
그 두려움과 공포를 몇 배로 증폭해 내게 돌려주는,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등골이 서늘한 그런 숲이 아니라, 

아침해가 밝아오며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뿜어 내는 안개 사이로 
비추는 갈래진 햇살들에
밤새 내린 서리와 이슬이 새삼 눈부신. 

4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받는다고 하는
g단조의 ‘Vogel als Prophet(예언하는 새)’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슈만스러움 덕분에
이 작품의 당혹스러운 쾌활함에서 비켜나 있고,
네번째 곡 ‘Verrufene Stelle(저주받은 장소, d 단조)’ 역시
비슷한 성격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새는 무엇을 예언하는가?

5
사실은, 어쩌면, 
이 작품은 숲으로의 산책이 아니라
사냥 여행에 바쳐진 곡인지도 모른다. 

숲의 초입을 들어서면 바로 사냥감을 노리는, 
숨어 기다리는 사냥꾼의 매서운 눈길이 
관심을 끌고(2곡 ‘Jäger auf der Lauer’), 

7번째 곡인 ‘예언하는 새’의 불길한 전언을 접하고 나면
개선을 알리는 듯한 ‘Jagdlied(사냥의 노래)’가 
Eb장조[각주:3]로 숲을 울린다. 

그러므로 어쩌면 저 새소리는, 
어쩌다 보니 사냥의 희생물이 된 동물의 
처연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인지도.

홀로 피어난 꽃들(3곡 ‘Einsame Blumen’)을 살피며
귀신 들린 곳(4곡)을 지나
이윽고 익숙한 풍경들(5곡 ‘Freundliche Landschaft’)
그리고 아마도 지난번 사냥에도 들렀던 
여인숙(6곡 ‘Herberge’)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냥의 여정. 

6
이 곡에 대한 정보를 찾다보면 
하인리히 라우베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다 .
그의 “Jagdbrevier(사냥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인데, 
절반 정도만 맞는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가장 신뢰받는 악보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헨레(Henle) 사의 작품 해설(링크)을 보면, 
1849년 1월 작곡을 마치고 이듬해 가을 출판되기 전까지
슈만은 타이틀을 이것저것 바꿔보고
동시대 시인들의 숲과 관련한 시들을 수집했다고. 

그 가운데에는 Liederkreis, Op.35의 시를 쓴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도 있고, 
앞서 언급한 라우베구스타브 파리우스와 
프리드리히 헤벨과 같은 이름[각주:4]이 보인다.

7
앞서 ‘예언하는 새’가 아마도
사냥당하는 존재에게 경고하는지도 모르겠다 했는데, 
실제로 슈만이 수집한 시구들에서 이 예언이란
아이헨도르프의 불길한 경고다.

Hüte dich! Sei wach u.[nd] munter! 
(Take care! Be awake and alert!)

그러므로 흔히 블로그들에 보이듯이
슈만이 정신적인 문제들을 갖고 있어
아름다운 새소리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깃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안감은 의도된 것, 
바로 뒤의 의기양양한 사냥꾼의 노래, 
‘Jagdlied’를 위한 프롤로그인 셈인 것이다.  
조성 역시 g단조에서 Eb장조로, 
‘영웅’[각주:5]의 조성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럴 법하지 않은가.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의 정경”의 전체적인 정조는
간간히 들리는 불협음들에도 불구하고 
밝은 기운이 지배적이며, 
무엇보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악보 역시 극악의 난이도를 보이지는 않으니,
피아노를 웬만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롤랑 바르트의 말마따나 
특유의 내적 요소 때문에 청취보다 연주에 더 적합[각주:6]
그의 음악을 건반 위에서 접해도 좋을 듯. 

9
사실 이 작품은 
“나비Papillons”, Op.2부터 
“유령변주곡Geistervariationene”까지 
슈만의 피아노 음악들 대부분을 담아 앨범으로 내놓은
안드라스 쉬프 덕분에 좋아하게 된 곡이지만, 

서두에 붙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도 
참 좋다고 할 밖에. 


  1. 미셸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La tombée du jour”, 김남주 옮김, 서울:그책, 2015 [본문으로]
  2. 이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슈만에 대한 비판.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이미연 옮김, 서울:시간의흐름, 2018. p.19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당연히 Eb장조는 ‘사냥’의 조성이다. 왕족과 귀족들에게 헌정된 수많은 사냥 음악들도 그러하거니와, 고전시대 이후 이 조성은 트럼펫과 호른의, 눈부신 금관의 조성이 아니던가. [본문으로]
  4. “Meanwhile, Schumann experimented with alter􏰀 native titles and collected relevant verses from sylvan poems by contemporaries – Joseph von Eichendorff, Friedrich Hebbel, Heinrich Laube, and Gustave Pfar􏰀􏰀rius – for possible use as mottos” [본문으로]
  5. Eb장조를 베토벤의 “에로이카”, 혹은 피아노 협주곡 “황제”와 어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본문으로]
  6.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이미연 옮김, 서울:시간의흐름, 2018. p.1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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