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동경하도록, 상상하도록,

꿈을 꾸도록 만들지만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욕망하도록 만든다. 

이토록 추운 밤 한뎃잠 자다

 

문득 품은 다디단 꿈들,

 

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生인가

 

대설주의보에 이은 강풍주의보,


바람은 눈의 발자국을 지우고 

눈송이들은 길 잃어 허공을 헤맨다



눈은 길을 지우고 

바람은 눈을 지우더니


이윽고 어둠이 바람을 지운다, 

그리고 오로지 무언가 펄럭이는 소리, 


소리들이 어둠을 지우고 있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가짜 뉴스에 대하여 가장 목소리를 높여 
불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책임자인 경우가 흔하다. 

인터넷은 지식을 민주화하는 대신 

무지와 편견을 민주화했다. 

 이언 스튜어트, “신도 주사위 놀이를 한다”, 

장영재 옮김, 서울:북라이프, 2020, 15쪽



민주주의 하에서 

모든 의견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의견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대주의의 깃발 아래

정치와 사회관부터 예술까지,

어떤 말의, 어떤 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을

포기한 채 취향으로 환원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혹은 나쁜 것), 

선한 것과 덜 선한 것 (또는 악한 것),

탁월한 것과 덜 탁월한 것 (아니면 후진 것),

누가 보기에도 그런 것들을 

실로 그러하다고 이야기하는 데에도

사소하지만 담대한 용기가 필요한 시절.



1

고춧잎을 된장에 무치고

밀폐용기에 옮겨 담다가

깜빡 잊고 간도 안 봤음을 

깨닫고서는, 


아, 이제 나도 대충 

어림짐작으로 간을 맞춰도 

내 입맛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는 된 건가

싶어져 혼자서 피식,


2

하기는 코로나19로 

학원까지 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몇 달 째 연습하고 있는

클레멘티의 곡은 이제,


가끔 연습하다 암보한 부분이

갑자기 생각 안 나 머뭇거려 질 때도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


(물론 머리와 손을 모두 동원해도

건반을 잘못 짚거나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더 자주 벌어지지만)


3

역시 무언가가 

몸으로 익숙해지는 것은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악기를 연주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무언가를 몸이 저절로 익숙해질 때까지

들여야 하는 노력에 대해

그야말로 정직한 보상이 주어지는 

일들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 본다. 


1

장마가 끝난 뒤로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채소 판매칸을 두고

계산대에 계신 분과 

기후위기에 대해 몇 마디를 나누다가, 


‘아마 저희 세대가 누릴 것 누릴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어요’라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마무리 짓고 돌아나오는데

아차, 싶었다.


어쩌면 나의 세대가 

누릴 것을 웬만큼 누려봤기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건가, 

새삼 깨닫고는 찾아든 아연啞然.


2

환경문제에 나름 관심이 많다고, 

또 일상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내 삶을 많이 바꿔왔다고 생각해 왔으나, 


알고보면 지금보다 훨씬 덜 풍요로웠던

1970, 80년대 유년시절에 비하면

수십 배 내지는 백 수십 배 정도의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것

(코로나19 때문에 사용하는 마스크만 해도!),


나아가 

설령 내가 내 유년 시절의 기준으로 

내 삶을 돌린다해도 나의 삶은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배출의 속도를 다소나마 늦추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는 냉혹한 진실

(흥청망청이거나 야금야금이거나), 


하기는 사람이 숨쉬는 것만 하더라도

이미 다소나마 이산화탄소를 

대기에 더하고 있는 것이니,


호프 자런의 새 책 제목마따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3

작고하신 김종철 선생님이 지난 해 칼럼에서

지금 서양에서는 무너지는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쓰신 적이 있는데[각주:1],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배출하는 탄소의 양 자체를 

줄이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배출하는 기간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져서 다시 한번 아찔하고 

아연啞然해지는 것이다. 

  1. 김종철, ‘툰베리의 결기’, “한겨레” 2019. 9. 2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0196.html) [본문으로]

해는 어제와 다른 산으로 진다.


西南의 산봉우리에서 西北의 산등성이로,

하지夏至의 거처를 향하여 

끊임없이 유랑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 싼 능선과 봉우리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해시계여서, 


한 곳에서 여러 해를 나다 보면

굳이 달력에 적힌 24절기를 보지 않아도

파종의 시기며 수확의 시기며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정보들은

종종 자연에 기록돼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자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오늘은 망종芒種

보름쯤 뒤에 도래할 하지에는 

동지冬至의 골짜기로 해의 귀향歸鄕

시작될 것이다.


1

봄에 사다 심은 라임라이트, 

네덜란드 나무수국은

하필 몹시도 건조하고 바람도 강한

봄날씨에 화상을 입듯

위쪽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넓지 않은 뜰이지만

좀 더 그늘지고 습한 곳으로

두 번씩이나 옮겨심어가며 지켜봤더니

얼마전 새 잎들을 밀어올리고는

드디어 꽃대까지 올라왔다. 


식물을 잘 키우기란 참 어렵지만

특별히 병이나 벌레만 없다면

죽이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그 경이로운 생명력이라니.


2

뽑고 돌아서면 생겨난 것이

밭의 잡초라더니, 


집이 깔끔하게 보이자면 어쩔 수 없이 

가끔씩 뽑아주고 정리해야 하는 

이른바 ‘잡초’들,

실로 그렇다. 


뿌리만 살아있어도, 

혹은 어떤 풀들은 줄기든 잎이든

한 부분만 흙에 착생하고 나면 

엄청난 융통성으로 조직을 변형시켜

뿌리도 내리고 잎도 꽃도 만들어내는 

그 유연함이라니. 


역시 식물을 죽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


3

그러나 미우나 고우나

저마다 이름이 있고 용처(用處)가 있으며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약으로도 쓰는 

이런 풀들을


무작정 ‘잡초’로 뭉뚱그려 부르고

무조건 뽑아버리고 

때로 제초제까지 쓰는 건 

또 얼마나 무식하고 무지한 일인지.


춘궁기로 굶주리던 시절,

죽거나 배앓이 할 식물이 아니라면

뭐든지 먹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각주:1]

뜯어도 캐어도 다시 자라나는 

이 강인한 초록의 생명체들이

오히려 자연의 귀한 선물이었을 터.


4

그러므로 

괭이밥풀이며 토끼풀,

고들빼기와 쑥, 살갈퀴, 씀바귀에 

망초 등속의 풀들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


이제는 적당히, 

너무 자란 것들만 솎아내고

같이 어울려 자라게끔 놔두어

가끔씩 식탁에 올리기로 한다. 


그렇게 다른 생명체들과 

같이 사는 법을, 

또 하나씩 배워간다. 


  1. 니체가 언젠가 썼듯이, 우리를 죽일 수 없는 것이라면 늘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법이 아닌가. That which does not kill us, makes us stronger. [본문으로]

살아간다는 건 대개 슬픔과 눈물 뿐이지만 

그러나 살아있다는 건 

때때로 기쁨이고 위안이어서,


무채를 썰다 남은 자투리를 씹을 때의 

그 알싸함이라든가

혹은 시금치를 데칠 때의 그

달착지근한 냄새,


이런저런 나물을 양푼에 버무리다

한 꼬집 집어올려 고개를 젖히고 

맛을 볼 때의 그, 


싱그럽다면 싱그러운 순간


살아간다는 

이 몹시도 번거로운 일을

그래도 해 볼만 한 것 아닌가 싶다.





寂滅에 다다르면 과연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오로지 살아가는 것이 

슬픔과 눈물일 뿐

오대산 寂滅寶宮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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