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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RZjHKX-JMA

로베르트 슈만, ⟨환상곡⟩ C장조, Op.17 | 손열음 연주

 

1

1836년 처음 씌어져 1839년 출판된

로베르트 슈만의 ⟨환상곡⟩은 

클라라 비크와 서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방해로

서신조차 주고받기 힘들었던 시절 

그녀에게 바치는 음악으로 쓴 연서(戀書), 

 

아직은 그들의 사랑이

아버지와의 다툼과 절연을 포함해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도,

그럼에도 4년 뒤 법원의 허가를 얻어

마침내 결혼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다지 길지는 못했던 행복과

그 모든 불운과 비극과 고난, 

영광과 기쁨을 알지 못하던, 

심지어 서로에 대한 진실한 마음조차도

견고하지 못했던 시절에, 

 

이토록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2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실로 아찔한 일이다. 

영혼은 물론이거니와 

온몸의 솜털 하나하나, 

심장과 핏줄, 몸 안의 모든 것까지, 

이를테면 창자(‘애’)까지 휘젓고 흔들며 

뒤집어놓곤 하여,

 

우리는 애가 타고, 애끊으며, 

애를 끓이고 애가 다는, 

때로는 애간장이 녹는 듯 하다가 

종종 애닯고 심심찮게 애를 먹고 

그만큼 애를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랑에,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종종 불확실하고 모호하기 마련인 

사랑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애틋함’이 아닐까.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와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는,

서로 상충하는 듯한 사전적 정의처럼

마음을 간질이고 때로 시리도록 저미는, 

그러는 동안 깊숙이 스며들어 

이윽고 물리칠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리고, 

음악. 

 

 3

1악장 Durchaus fantastisch und

leidenschaftlich vorzutragen

(매우 환상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은

클라라의 이름을 부르는

슈만의 애타는 그리움으로 시작한다.

 

왼손이 도약과 하강을 반복하며

마치 폭포수 같은 음들을 쏟아내는,

딸림9화음(G9)으로 보이는 16분음표 

분산화음으로 문을 열고, 

오른손으로 점4분음표와 8분음표의 

A(라) 옥타브 화음에 이어

2분음표의 A-C-D-A 화음을 연주하며

시작되는 제1주제는 

(C)-A-A, 다시 말해 C-라-라(C-la-ra),

클라라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1악장 도입부 클라라의 동기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어서 이른바 ‘클라라의 동기’로 

슈만이 여러 작품에서 변형해 사용한

A에서 D까지 5도 순차 하행하는 음형은

C장조라는 조성에도 불구하고

언뜻 A 자연단음계처럼 느껴지는데,

더구나 으뜸음인 C는 오른손에서

내성부에 숨어 들릴 듯 말 듯 하며 

왼손의 분산화음 역시 으뜸화음을 피해

조성감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모호함은 1악장 내내 

때로 해결이 지연되거나

해결이 되더라도 된 듯 아닌 듯 싶게

해결하는 형태로 지속된다.

마치 사랑할 때의 그 모든 설렘과 떨림 

그리고 간절함, 망설임과 초조, 

기대와 실망, 열정, 갈망, 의심과 자책,

안타까움과 오해와 잠깐의 확신, 

그리움과 두려움과 같은 혼란한 감정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함과도 같이.

 

 77~81마디 아다지오를 지나

In tempo로 넘어가는 부분의 

페르마타가 붙은 쉼표는 마치

말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침묵의 심연과도 같이 숨막히게 하며

이윽고 터져나오는,  

감출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감정의 봇물.

(악절들이 넘어갈 때마다 붙은

페르마타는 곡을 한층 더 드라마틱하게, 

‘환상적이고 열정적’이게 만든다.)

 

1악장 아다지오 부분의 페르마타와 이어지는 당김음 리듬 음형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어지는 악절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16분음표+8분음표의 당김음 리듬(타단—)은

마치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듯,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 듯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며 반복되고,

 

코다에서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98 가운데

마지막 6번째 곡의 도입부

“Nimm sie hin denn, diese Lieder”

(그러니 그대, 이 노래들을 받아주소서)를

살짝 변형해 인용한다.

(슈만은 교향곡 2번 C장조, Op.61과

현악4중주 Op.41/2에서도 사용했다.)

 

1악장 코다의 베토벤 가곡 인용 부분 (악보출처:  http://imslp.org)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있는 연인에게⟫ 중 제6곡 도입부 (악보출처:  http://imslp.org)
슈만 교향곡 2번 C장조, Op.61의 4악장, 베토벤 인용 부분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어 사랑을 간구(懇求)하는 기도처럼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와도 같은 화음에 이어,

마침내 슈만이 모토로 인용한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시구처럼

‘조용히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음’처럼

(Ein leiser Ton gezogen)

아련하게, 곡이 마무리된다. 

 

로베르트 슈만은 1838년 

클라라에게 쓴 편지에서 1악장에 대해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것 중 

‘가장 열정적인 곡’이라고 쓴다. 

악상기호로 쓰인 ‘leidenschaftlich’가 아닌

‘고통을 겪다’는 라틴어 patior에 기원을 둔 

‘(mein) Passionirtestes’를 사용한 것은

(독일어 위키피디아 원어로 인용돼 있다),

Passion이 예수의 ‘수난’과 

그것을 다룬 음악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슈만스러운 선택이 아닐까. 

 

4

2악장 Mässig, durchaus energisch

(적절한 속도로, 매우 활기차게)는

Eb장조의 축제풍의 행진곡으로 시작한다.

 

1악장에서의 모든 모호함이,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고뇌로 찬,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떠돌던 음표들이

마침내 2악장에서 와서야

시원하고 말끔하게 해소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떤 면에서는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지켜낸 사랑의 결실을 나타내는 것도 같고 

혹은 좀 더 통속적인 상상을 발휘하자면,

일종의 결혼행진곡처럼도 느껴진다. 

 

2악장은 기교적으로도 난곡으로 손꼽히는데, 

리듬이나 화성의 대담함, 

음향적 효과를 위한 여러 표현도 그렇거니와

특히 양손이 폭풍우가 몰아치듯

(아래 악보의 Viel bewegter) 

매우 빠른 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크게 도약하며 대단원에 이르는 코다는

이어지는 3악장의 마치 기도와도 같은

고요함과 순수함에 대비되면서

한층 더 효과적인 결말로 이끄는데, 

당대의 피아니스트 중에는 

아마도 리스트 외에 연주할 만한 이가 

거의 없다고 여겨졌다 전해진다.

 

2악장의 스트레타(Stretta) 부분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 곡을 헌정받은 리스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슈만 앞에서 개인적으로 연주했고,  

슈만은 특히 이 코다 부분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고 끌어안으며 

‘신이 내린 솜씨(Göttlich!)’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스트는 이 작품이

대중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렵다 생각해

공개적인 연주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답으로 1854년에 

그의 b단조 소나타를 슈만에게 헌정한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리스트는 자신의 b단조 소나타 역시 

대중 공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으며,

슈만 부부 역시 슈만의 피아노 작품 대다수가

시대에 앞선 것이라 생각했다.

(클라라가 이 곡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한 것은

로베르트의 사후인 1866년이다.)

 

5

3악장 Langsam getragen. 

Durchweg leise zu halten

(느리고 경건하게, 고요와 평온 잃지 않고)

 

3악장 도입부의 왼손 아르페지오에서

나도 모르게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것은,

슈베르트 곡의 전주 분산화음이

조금 닮았다는 느낌 탓일 수도 있고,

슈만이 1840년에 작곡(& 출판)해

클라라에게 헌정하고 결혼선물로 준

가곡집 ⟪Myrthen⟫, Op.25의 

첫번째 노래 ⟨Widmung(헌정)⟩ 말미에

⟨아베 마리아⟩를 인용한 탓도 있을 테지만, 

 

이 3악장의 기도와 같은, 혹은 

나직한 속삭임이거나 천상의 축복과도 같은 

고요함과 평온함, 신비로움과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야말로,

슈만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천상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슈베르트의 음악과

닮았다면 닮은 데가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지극한 사랑이란

어쩌면 궁극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때로 맑은 날도 또 흐린 날도 있겠으나, 

평정과 평온을 유지한 채 

사랑의 온유함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소란스럽거나 요란하지 않게 

지켜나가는 것. 

 

클라라 슈만이 1840년 4월에 쓴 

일기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와 함께 있을 때가 늘 

가장 편안하고 좋다. 

그는 말이 거의 없다. [...]

그가 나의 손을 지그시 잡을 때,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그의 하나뿐인 연인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낸시 B. 라이히, “클라라 슈만 평전”, 

강자연・하인혜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9)

 

그러나 그런 사랑을 지켜내는 것은, 

 사랑이 변치 않는 것은, 

혹은 조금은 변할 수밖에 없더라도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잃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기도와 기원의 형식만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3악장 악상기호의 ‘getragen’은 

종종 무시되어 번역상 생략되거나

혹은 동사 tragen(가져가다, 나르다)의 

과거분사로만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음악이나 목소리 등을 수식할 때 

영어의 solemn(장엄한, 엄숙한, 경건한)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슈만이 이 단어를 택한 것은

경건한 사랑의 서약과도 같은

이 곡의 분위기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leise’ 역시 조용함보다는

평온함, 차분함 등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여 내 멋대로, 

‘느리고 경건하게, 고요와 평온을 잃지 않고’ 

정도로 옮겨 본다. 

 

다섯째 마디에서 왼손이 

앞서 언급한 ‘클라라의 동기’를 연주하며

오른손이 제1주제를 제시하고, 

이어 조금 먼 조성인 

Ab장조의 제2주제가 나온 뒤

발전적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조금 느슨한 소나타 형식이어서,

악상의 전개는 꿈을 꾸듯

⟨환상곡⟩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자유롭게 흘러간다. 

 

오히려 악장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느낌이 들게끔 하는 것은

악절이 넘어갈 때마다 변형되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서주에서의 왼손 분산화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악곡의 흐름이 정처없이 

부유하는 느낌도 동시에 선사한다.

 

종결부에서도 다시 분산화음이 펼쳐지다 

3개의 으뜸 화음으로 

간결하고 담담하게 마무리된다, 

마치 나직하지만 확고한 다짐처럼,

잔잔하지만 단단한 사랑처럼.

 

3악장의 종지 (악보출처:  http://imslp.org)

그러나 이제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덕분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원래는 3악장의 엔딩이 달랐음을 안다.

 

슈만의 필사가였던 카를 브뤼크너가 필사한

현존하는 필사 악보 따르면, 

슈만은 원래 1악장 코다에 쓰였던 악구를

그대로 3악장의 코다로 다시 사용했으나, 

출판되기 전 수정 과정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엔딩으로 대체된다. 

 

“그러니 그대, 이 노래들을 받아주소서”, 

다시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그가 보내는 그리움의 음표들을 상징하는 

악구로 끝낸다는 점에서 

훨씬 더 애틋한 결말이지만, 

슈만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더 단순하고 간결한 종지를 택한다.

 (3악장 코다에 대한 내용은 

헨레(Henle) 출판사의 온라인 게시물 참조.

해당 부분 악보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왜 코다를 이렇게 바꿨는가, 

슈만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는

아마도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슈만의 의지, 그러니까 출판본부터는

현재 익히 알려진 간명한 코다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간혹 인터넷에서 베토벤을 인용한 코다가 

‘초판본’이라고 잘못 설명하곤 하는데, 

슈만은 초판 출판 이전에 코다를 수정했고

출판은 초판본부터 위 악보의 코다였으니

어떤 것이 더 정확한 작곡가의 뜻인지, 

그리고 작곡가의 뜻에 따라 연주할 때

어떤 코다가 적절한 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다만 손열음은 음반에서도, 리사이틀에서도

수정 전의 코다를 택했고, 

안드라스 쉬프도 그의 음반에

원래의 코다 연주와 함께 이 교정 필사본의

베토벤 인용 코다를 함께 녹음했으니, 

이 애틋함으로 가득한 색다른 매력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Henle 출판사의 다른 게시글 참조.)

 

6

어쩌면 음악에 대한 글인데

너무 사랑이라는 비음악적인 개념으로

서술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슈만의 음악을 어떻게

사랑을 떠올리지 않고 말할 수 있겠는가,

특히 이렇게나 명백하게 사랑의 열정과, 

환희와, 영원한 사랑의 꿈을 담은

⟨환상곡⟩에 대해서는 더욱 더.

(물론 이 곡 전체를 음악적으로 분석하기엔

내 지식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하지만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 곡은 클라라에 대한 연모(戀慕)인 동시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흠모(欽慕).

 

슈만이 애초에 출판사들에 제안한 제목은

⟨Obolen auf Beethovens Monument:

Ruinen, Trophäen, Palmen:

grosse Sonate für das Pianoforte

 für Beethovens Denkmal,

von Florestan und Eusebius⟩, 

우리 말로는 대략

⟨베토벤 기념상에 바치는 작은 헌정:

플로레스탄과 에우제비우스가 쓴

베토벤 기념상을 위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대 소나타⟩로,

플로레스탄과 에우제비우스는 

슈만의 예술적 페르소나,

Ruinen(폐허), Trophäen(승리기념물),

Palmen(종려나무 잎(의 영광))은 

각 악장에 붙은 부제였으며, 

나중에 Ruinen, 

Triumphal Arch(개선의 아치(개선문)), 

Contellation(성좌(星座;별자리))으로 바뀐다. 

 

당시 음악계에서 추진 중이던 

베토벤 기념상 건립 기금 마련에 

힘을 보태기 위한 것이었으나 

두 곳의 출판사로부터는 출판을 거절당하고, 

1839년 브라이트코프&헤르텔 사에서

이 모든 제목과 부제가 삭제되고

현재 알려진 바와 같이 ⟨환상곡⟩으로, 

각 악장에도 부제 없이 

악상기호만 표기된 채 출판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제목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작품을 듣다보면

언뜻 언뜻 베토벤이 썼을 법한

음악적 표현들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작품을 베토벤에 대한 헌정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볼 수도 있겠다.

 

1악장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비교적 초기작인 Op.27로 출판된

환상곡 풍(Quasi una fantasia)의 

두 곡의 소나타를 떠오르게 하고

(Op.27-2  유명한 ‘월광’),

 

2악장은 아마도 같은 C장조인

피아노 소나타 21번 Op.53 ‘발트슈타인’이나

소나타 29번 Bb장조, Op.106 

‘함머클라비어를 위한 대소나타’를

(실제로 ⟨환상곡⟩의 오케스트라에 가까운

피아노의 음향적 효과를

‘함머클라비어’와 비교하는 평자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 3악장은 

베토벤의 가장 마지막 소나타들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하면 흥미롭지 않을까. 

 

특히 소나타 30번 E장조, Op.109의

기존 소나타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흐름, 

그리고 31번 Ab장조, Op.110의 3악장이나,

혹은 지상에서의 고뇌로부터 

천상의 지복(至福)으로의 상승과도 같은

c단조의 마지막 소나타, Op.111을 생각하면,

영원하고 지고한 사랑을 노래한, 

혹은 종려나무 잎이나 하늘의 별자리에

어울릴 법한 영광스러움을 노래한

슈만의 ⟨환상곡⟩ 3악장과 사뭇 닮았다.

 

7

이 곡을 나름 좋아한 것은 오래되었으나, 

‘애정하게’ 된 것은 서두에 링크한

손열음의 연주 덕분이었다. 

그의 연주는 참으로 애틋한 해석이어서, 

1악장의 페르마타 처리도 눈에 띄게 길고

(정말 숨막힐 듯한 페르마타!),

앞서 언급했듯이 3악장의 코다도

베토벤 인용구를 포함한 코다로 연주한다.  

누군가 이 곡을 새로 알고 싶거나 

아니면 알고있던 것을 새롭게 하고 싶다면 

손열음의 음반으로 시작해도 좋겠다. 

이 곡의 유일무이한 절대적 해석은 

아닐 지도 모르겠으나,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애틋한 연주라고 생각한다.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열정과 고아함이

매우 적절하게 균형을 갖추고 있으며,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기품있는 연주는

특히나 3악장에서 빛난다. 

 

https://youtu.be/Ve3yewPoGfU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1959년 베를린 실황 연주
 

 

미츠코 우치다의 연주는

그녀가 이런 연주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격정적이다.

우치다나 손열음의 연주를 듣다보면,

이 곡이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라는 건

단순히 기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절절하고 강렬한 감정으로 가득한 

30분 남짓의 시간을 채워나가는 것은, 

연주자에게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매우 벅차고 진이 빠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음반으로 들었던 

리흐테르, 폴리니, 알리시아 데 라로차, 

조너선 비스와 브렌델 모두 

제각기 매력이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아니 피셔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훌륭한 연주도

찾을 수 있으니, 

어느 연주를 선택해 들어도 

후회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https://youtu.be/77m5DlCJ6wk

아니 피셔(Annie Fischer)의 연주
 

 

이 글은 2021. 9. 22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

 

https://youtu.be/cMo-WXxcOUw

 

1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의 새 앨범, 

<Mozart Momentum 1785>에서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단조” K.475를 듣다가

문득 생각한다.

 

아, 이렇게나 진지한, 

심오한 모차르트의 음악이라니.

 

모차르트의 음악은

대개 쾌활하고 명료하며 

아름답고 우아하거나, 

때로 슬프고 애잔하고 

혹은 거룩하고 장엄하거나 

아니면 웅장할 수는 있어도,

 

그의 작품들을

‘심오함’과 결부시키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3

부분적으로는 

여러 일화나 편지에서 보여진

그의 독특한 유머 감각 탓일 수도, 

혹은 대중문화에서 그려낸

조금은 ‘철없고 경박한’ 천재라는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시대는 아직 음악에,

그리고 음악가에게 

‘심오함’을 요구한 시대가 아니었다. 

 

사실 심오함이란,

‘작곡가의 고뇌가 담긴 심오한

예술적 선언’이라는

음악작품에 대한 평가는,

베토벤과 E.T.A. 호프만, 

그리고 낭만주의가 무르익고서야 비로소 

음악에 부여되는 특성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스네스의 환상곡 연주에서 느끼는, 

마치 낭만주의 음악을 예감케하는

이 ‘심오’하다는 느낌은 

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4

다시 처음부터 들어본다, 

 

서서히 상승하다 뚝 떨어지는

옥타브 간격의 3화음으로 쌓은 뒤, 

장중한 펼침화음으로 시작하는 

6마디의 오프닝은 

마치 베토벤이 썼다 해도 믿을 법하다. 

 

특히 각 마디의 첫 음은 다섯 째 마디까지

C-B-Bb-A-Ab로 반음씩 하강하는데,

이토록 불길하며 어두운 시작이라니. 

 

더구나 첫마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c단조의 스케일에서 나온 것이 아닌, 

감7화음에서 비롯된

증4도(감5도)인 F#(Gb)을 포함하고 있어

곡의 모호한 화성감은 더 강조되는데

(5도가 추가된 감7화음의 펼침화음),

이만한 긴장감으로 시작하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또 있던가, 

내 짧은 지식으로는 알지 못한다. 

 

5

옥타브 간격으로 쌓은 3화음은 

기본적으로 음높이만 다른 같은 음들이기에

화성적 효과보다는 음향적 효과를 위해 

사용한 것이었을텐데, 

이 역시 어떤 면에서는 

베토벤의 음악을 예감케 한다. 

 

이를테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c단조, Op.13, 

이름하여 “비창” 1악장의 

오프닝을 떠올려본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 닮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네 마디의 

상승–하강의 느낌이 사뭇 비슷하지 않은가.

 

더구나 베토벤은 “비창” 2악장의 

그 유명한 첫 주제를

모차르트의 환상곡 K.475와 함께 출판된

피아노 소나타 c단조, K.457의 2악장에서

살짝 빌려와 변형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K.475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6

10번째에서 18번째 마디까지의, 

오른손 화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전개는

어떤 면에서 슈베르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끊임없이 망설이는 듯한,

그러나 다채롭게 변화하는 

화성의 진행은 정말 매력적이다. 

 

이윽고 19~20번째 마디의 

왼손 아르페지오는

어쩌면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1악장의 유명한 왼손 트레몰로의

모차르트 버전이 아닐까. 

 

좀 더 무리해 보자면 

41번째 마디까지의 화성 진행과

뒤의 안단티노 부분(91-129마디)의 악상은, 

내게 슈만의 후기 작품들, 

이를테면 “유령 변주곡”과 같은 곡들의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7

곡 전체의 주요 조성변화만 해도

c단조(adagio)-D장조-a단조-g단조-F장조-

f단조-Bb장조(andantino)-g단조(più allegro)-

c단조(tempo primo)로 이어지는데,

181마디의,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곡에

이처럼 다채로운 화성의 변화라니. 

(물론 이렇게 깔끔하게 화성 분석을 하기에는

내 지식이 아직 모자라기에,

위의 조바꿈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더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악보 첫 머리에 표기하기 마련인

기본 조표가 없다는 것이다. 

 

미리 곡의 조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신

모차르트는 각 마디마디에서 임시표를 통해

그 악구와 악절의 화성을 정의하는 셈이다.

마치 전체를 규정하는 조성이라는 장치로부터

작품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처럼. 

 

같이 묶여 출판된 

소나타 c단조 K.457에는 

조표가 표기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곡에서 조표를 생략한 것은

모차르트의 의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8

그렇다. 

엄밀한 형식과 규칙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환상곡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 아닌가.

 

환상곡은 특정한 형식이라기보다

각 시대마다의 특정한 형식이 아닌 어떤 것들,

이를테면 리체르카레가 아닌, 

토카타가 아닌, 전주곡이 아닌, 

소나타가 아닌 어떤 것들을 일컫는, 

다소 즉흥곡의 요소를 갖고 있는, 

형식 아닌 형식. 

 

16세기에 황금기를 거친 뒤

(예를 들어 영국의 윌리엄 버드와 

 존 불의 버지널을 위한 환상곡들)

J.S.바흐와 그 아들 C.P.E. 바흐의 손에 의해 

다시 생기를 얻었으나,

 

무엇보다 환상곡 자체가,

‘Fantasie’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의미로 변화한 것은 

낭만주의와 더불어서 아닐까.

 

그리고 독일낭만주의의 대표자,

음악과 사랑, 그리고 그가 쓴 글

모두가 낭만주의의 체현이었던

슈만의 많은 작품이

환상곡의 형태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환상소곡집,

환상곡 C장조는 말할 것도 없고, 

‘환상’이라는 제목이 포함되지 않은 곡들에서도

환상곡의 또다른 변형들이 느껴지지 않던가. 

 

9

역설적으로 모차르트 환상곡에서

알레그로 부분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아는 모차르트스러운 작법이

많이 엿보인다.

 

모차르트는 곧잘 이 곡을 

즉흥연주했다 전해지는데, 

어쩌면 특히 이 부분이 

즉흥연주를 위한 부분 아니었을까.

즉흥연주란 본디 감동보다는 감탄을, 

듣는 이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기 위한 경우가 많고, 

그래서 느린 부분보다는 빠르고 기교적인,

비르투오소적인 패시지가 더 적당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알레그로 부분은 보다 친숙하며, 

좀 더 고전적이고 단순하게 

악보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어차피 모차르트 자신은 

알레그로를 악보대로가 아닌, 

즉흥연주로 연주해내었을테니 말이다.

 

10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이 곡을 접했다면

지금까지의 주장들에 선뜻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내 생각에)

안스네스의 해석은 새롭다.

 

이 곡이 후대의 작품들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는, 

그래서 환상곡 c단조가 베토벤스럽게 들리는, 

때로 슈베르트나 슈만이 떠오를 정도로 

과감한 연주. 

 

바로 이것이 

아무리 이름난 명곡이라고 할 지라도,

연주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새로운 연주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이 포스트는 2021.9.18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

 

1

베토벤의 Op.1 

세 곡의 피아노 3중주,

 

이것은 베토벤의 ‘처음’, 

베토벤이 ‘베토벤’이기로 한 첫 걸음.

 

2

사실 이 작품들은

베토벤이 처음 쓴 것도, 

 

처음으로 출판된 작품도,

(첫 출판작품은 아마도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 c단조”, WoO 63인 듯하다)

 

심지어 Op.1이 붙어 출판된

첫 작품도 아니다. 

(베토벤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전해지지만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백작님이 춤을 추시겠다면’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초판에

Op.1이 붙은 채 출판되었고, 

출판된 이후 목록에서 삭제해

지금은 WoO.40으로 분류된다.)

 

3

그러므로 다시 정리한다,

 

리히노프스키 후작의 궁에서 초연된 후

1795년 세 곡을 묶어 출판한 베토벤의 Op.1은 

베토벤이 ‘베토벤’이 되기로 한 처음,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한

의지의 발현.

 

 4

사실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곡의 피아노 3중주는

베토벤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물론 어딘가에서는 하이든스러움과,

또다른 어딘가에선 모차르트스러움이

어쩔 수 없이 묻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Op.1은

이미 충분히 ‘베토벤스러운’ 처음.

 

5

1번 Eb장조, 2번 G장조, 3번 c단조.

 

그의 세 번째 교향곡(‘영웅’)과 

다섯 번째 피아노협주곡(‘황제’)의 

Eb장조와, 

 

피아노 소나타 Op.13 ‘비창’,

피아노 협주곡 3번 Op.37,

마지막 소나타인 32번 Op.111과

나아가 교향곡 5번 Op.67 <운명>의 

바로 그 c단조,

 

이 두 개의 나란한 조 관계로 

운명적으로 얽힌 조성을 이미, 

베토벤의 Op.1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6

각각의 매력이 돋보이는

이 세 곡 중에서도, 

특히 3번 c단조는 주목할 만하다. 

 

c단조, 

베토벤 이전에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빈 고전파 시절까지는

아주 특이한 조성 취급을 받았던 조성.

 

아마도 모차르트의 c단조 대미사곡과

피아노 협주곡 24번 K.491과 같은 작품에서나

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인데,

(실제로 베토벤은 특히 후자인 

c단조 협주곡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젊은 시절부터, 

그러니까 훗날 브람스에 의해 ‘발견’되고 초연된

“황제 요제프 2세의 서거에 바치는 칸타타” 

WoO 87 (1791년)에서부터

이 글에서 다루는 Op.1-3을 비롯해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c단조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7

피아노 3중주 3번의 

1악장을 좀 더 들여다보면, 

악장의 지시어는 Allegro con brio, 

교향곡 5번 ‘운명’의 1악장의 그 지시어다.

 

C - Eb - C로 시작하는 느릿한 주제의 제시에 이어

곧바로 짧은 3연음(8분음표 스타카토)에 이은 

4분음표(+8분음표)의 음형을 확인할 수 있는데, 

1악장 내내 이 리듬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어떤 면에서는 훗날의 교향곡 5번,

이른바 ‘운명의 동기’인 따따따 따–, 를 

연상시킨다. 

 

악보 출처: http://imslp.org

 

듣기에 따라 제1주제보다도 

훨씬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 음형은, 

사실 피아노 3중주 1번의 

스케르초 악장에서도 인지할 수 있다. 

 

이 음표들이 훗날 c단조 교향곡의

그 유명한 모티프들로 연결됐을 지로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추측일테지만,

 

적어도 이 리듬이 베토벤의 작품세계에

초기부터 늘 머물러 있었고 

때로 발전하고 변형되어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고 보는 것이

지나친 억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이 음형이 사용된 또다른 대표적인 사례는

교향곡 3번 Eb장조 ‘영웅’의 

‘장송행진곡’ 악장일 것이다.)

 

8

한때 베토벤의 스승이었던 하이든은 

Op.1으로 묶인 세 곡 중에서 특히 3번이

피아노 3중주의 전통에서 너무 벗어나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그래서 베토벤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에 

흠이 될 것이라 생각해 출판을 말렸다고 하며,

이를 두고 베토벤은 스승이 시기한다고 생각해

사제의 관계가 한동안 틀어졌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비평적으로도 상업적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반면 에드먼드 모리스는 그의 책

“인간으로서의 베토벤”(프시케의 숲, 2020)에서

Op.1이 출판될 당시 

하이든은 런던에 체류 중이어서

이 일화가 시기상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아마도 Op.2의 피아노 소나타 세 곡에 대한

후일담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피아노 소나타 3번은 

피아노 3중주 3번만큼이나 혁신적이다.)

 

9

정확한 사실의 여부를 떠나

이런 후일담이 생겨난 것이야 말로, 

‘베토벤’이라는 전설적인 음악가의 

첫 시작에 적합하지 않은가. 

스승을 뛰어넘으려면

스승과 맞서야 한다, 당연하게도. 

 

그럼으로써 낡은 시대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헤르만 헤세 식으로 말하자면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도 같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거장의 탄생을 알리는

베토벤의 결정적인 순간. 

 

10

특히 피아노 3중주 3번 c단조는

1817 베토벤 본인에 의해 현악 5중주로 편곡

1819년 출판(Op.104)되기도 하는데,  

 

꾸준한 대중적인 인기에 바탕해

아마추어 작곡가였던 카우프만이

두 대의 비올라를 포함한 5중주를 위해

자신이 편곡한 악보를 베토벤에게 보내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편곡에 착수했다고

알려져있다. 

 

베토벤 스스로 

이 곡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다면

편곡 작업에 손대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11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난해 나온 트리오 소라(Trio Sōra)의 

<피아노3중주 전곡 음반>(naïve)을 듣기 전까지

피아노 3중주 제3번이 

이렇게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https://youtu.be/5omk9qOjraM

                              

 

젊은 연주자들어서 더 그렇겠지만 

베토벤의 ‘con brio’의 진수가 느껴지는, 

아찔할 만큼 밀어붙이는 연주. 

 

섬세함에서는 잘 알려진 대가들보다

좀 모자란 듯도 싶지만, 

젊은 시절의 베토벤의 작품에

이렇게나 젋음으로 충만한 연주도 

충분하지 않은가.

 

12

피아노 3중주 3번의 

전곡을 듣고 싶은 분이라면, 

보자르 트리오(Baeux Arts Trio)의

녹음을 링크한다. 

(아쉽지만 라이브 동영상은 아니다.) 

https://youtu.be/BTl8lDc_BMA

                              

13

섬세함과 과감함, 

신선한 감각의 조화를 겸비한,

아마도 21세기에 이 곡을 해석하는 연주의

전범이라 할 만한 수프라폰 레이블(2020)에서 나온

스메타나 트리오(Smetana Trio)의 연주는, 

아쉽게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었다. 

다만 https://www.supraphon.com/album/577799-beethoven-piano-trios 에서

맛보기로 그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Beethoven: Piano Trios – Smetana Trio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 Piano Trio in C minor, Op. 1 No. 3; Piano Trio in B flat major, Op. 97, the "Archduke Trio"; Piano Trio in D major, Op. 70 No. 1, the "Ghost Trio"; Piano Trio in E flat major, Op. 70 No. 2 Smetana Trio: Jitka Čechová -

www.supraphon.com

 

14

참고자료

http://www.lifesci.sussex.ac.uk/home/Chris_Darwin/WebProgNotes/pdfs/BeethovenPianoTrioOp1no3.pdf

https://bis.se/orchestras-ensembles/sitkovetsky-trio/beethoven-piano-trios-vol1

https://www.hollywoodbowl.com/musicdb/pieces/2858/piano-trio-in-c-minor-op-1-no-3

https://en.m.wikipedia.org/wiki/Beethoven_and_C_minor

 

1

백건우 선생의 “슈만” 앨범과

다니엘 바렌보임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 디아벨리 변주곡”, 

두 음반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한다,

‘나이듦’은 (어쩌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2

두 앨범 모두 

반짝거리는 광채가 돋보이는 것도, 

두 눈이 휘둥그레질 테크닉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올해 74세의 백건우 선생과

78세의 바렌보임, 

두 연주자가 들려주는 것은

그저 음악이 스스로 말하게, 

노래하게 하는 것. 

 

이 넉넉함과 원숙함은

엄청난 기교와 신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나이어린 연주자들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3

사실 음악이란 삶의 강렬한 유비(類比),

혹은 삶 그 자체여서, 

우리는 오로지 시간의 흐름으로만

음악과 삶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

 

‘살아있음’ 없이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삶을 통해서만,

그 ‘살아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예술이

바로 음악일 것이다.

 

4

미술과 문학을 비롯한 많은 예술장르가, 

특히나 20세기 이후에는 더욱더

참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가치를 인정받으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대개

나아감보다는 뒤쳐짐으로 여겨지고

간혹 자기복제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반해

음악이란 무척 독특하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야, 

경험과 경력과 안목이 쌓여야,

그리고 단지 악보 만이 아니라 

그 음악과 관련된 여러 문헌에 대한

이해까지 갖춰야 

더 깊고 넓은 해석 뿐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까지 

연주에 담을 수 있지 않던가.

 

6

두 앨범에서도 특히나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들이나

슈만의 후기 작품들에 어른거리는

일종의 죽음의 그림자,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삶 너머, 그리고 음악 너머에 대한

사유의 흔적들을 

어린 연주자가 온전히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삶이든 음악이든, 

어떤 시기가 되어야만 비로소 

들리고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7

특히 슈만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마지막 작품인 “주제와 변주 Eb장조”

일명 ‘유령변주곡’은 그야말로 

생의 마지막을 눈앞에 둔 음악가의

마지막 전언이 아니던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슈만에게는 죽음을 상징하는 

정령들(Geister)이 환각으로 나타났고, 

그 와중에 이 곡의 주제 악구들이

그에게 떠올랐다 한다.

 

 

슈만의 후기작품들이 흔히 그렇듯

음표들은 정처없이 부유하고

변주의 악상은 모호하게 흘러가며  

심지어 종지 역시 흐지부지

끝난 듯 아닌 듯 사그라든다. 

(하긴 어쩌면 삶과 죽음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단칼에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계가 모호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가만히 듣다보면 

전체적인 분위기 뿐 아니라

악상의 전개에서도, 주제 면에서도

요한 파헬벨의 코랄과 변주곡,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어쩌면

사뭇 비슷하다는 생각.

(https://documenta.tistory.com/522)

 

7

사실 연주자나 작곡가의 개인사를 

음악과 결부시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백건우 선생의 평생의 동반자,

윤정희 선생이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의 연주가 더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정신적 문제들로 그가 알던 세계, 

혹은 클라라 슈만이 알던 세계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가던 로베르트 슈만과, 

 

알츠하이머로 그녀가 알던 세계, 

혹은 백건우 선생이 알던 세계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가는 윤정희 선생, 

 

어떤 면에서는 후기 작품들 뿐 아니라

사랑과 슬픔과 눈물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인생 전반의 유사한 경험들이

그의 슈만 음악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케 된다.

 

8

바렌보임의 베토벤 전곡 앨범은, 

만약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1순위에 들 만한 앨범은 아니다. 

 

아마도 내게는 영원한 레퍼런스인

알프레트 브렌델의 데카 녹음이나

젊은 연주자들 가운데에서는 

이고르 레빗을 추천하겠지만, 

 

그러나 음악이 어느 연주자의 

삶 그 자체가 되었을 때, 

아니 누군가의 삶이 음악 자체가 되었을 때

베토벤의 32곡의 소나타와 

흔히 기교로도 해석적으로도

최대의 난곡의 하나라고 불리우는 

디아벨리 변주곡마저 

얼마나 편안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고 싶다면, 

 

바렌보임의 음반은 

훌륭한 선택일 수 있을 것이다. 

 

9

베토벤의 만년의 소나타들이나

슈만의 마지막 날들에 써낸

피아노 작품들이나,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삶 속에, 음악 속에 녹여내어

삶 너머, 음악 너머를 바라보는

그들의 음악적 사유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젊은 날의 

민첩함이나 힘과 속도, 지구력은

잃었을 지도 모르지만, 

 

바렌보임과 백건우,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들은

여전히 삶 속에서 음악과 인생,

그리고 세상을,

나아가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기 마련인 나이듦과 죽음을 

우리보다 앞서 이해하고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이 글은 2021. 9. 26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

 

 

1

Adagio.

 

이탈리아어 Ad agio,

영어로는 at ease. 

 

편안하게, 

느긋하게,

 

언젠가 찾아올

안식.

 

2

Andante는

이탈리아어 andare(가다)에서파생된 것,

걸음걸이의 호흡과 박동,

속도와 느낌이라면,

 

Adagio는

끝도 없는 길을 오래도록 걸어온 자가

비로소 취하는 휴식, 

또는 

긴 세월 고단한 생을 이끌어온 이에게

마침내 주어진 안식, 

 

어쩌면 

영원토록.

 

3

우리는 걸어가면서 

곧잘 노래를 부른다. 

 

그러므로 Andante가 노래한다는 뜻의 

cantabile와 같이 쓰이는 것은 

그리 낯설지 않다.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가운데 

2악장인 Andante cantabile가 

워낙 유명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면 Adagio cantabile는 그리 흔치 않다. 

아다지오는 어쩌면 노래라기보다는 

읆조림이나 흥얼거림, 

나직한 속삭임이며

기도와 애도에 더 어울릴 법하기 때문이다.

 

4

하지만 베토벤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의 2악장에 

Adagio cantabile라는 악상기호를 붙였다. 

 

이 독백과도 같은, 

홀로 나직이 부르는 노래는

그러므로 슬픔의,

깊고도 깊은 슬픔의 노래, 

탄식과 회한의 노래,

그리하여 말을 잃은 자를 위로하는.

 

훗날 사람들은 이 소나타에

‘Pathetique, 비창(悲愴)’이라는 별칭을 붙인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24번의 1악장과

바이올린 소나타 7번의 2악장에도

adagio cantabile가 붙어있다.)

 

5

아다지오 뒤에

간혹 슬픔과 눈물을 강조하기 위해 lamentoso를,

감정의 풍부함을 담아내기 위해 espressivo를

붙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저 조금 더, 혹은 조금 덜이라는

assai와 molto, ma non  troppo 따위가 

따라올 뿐,

 

아다지오는 아다지오다.

굳이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6

그럼에도 가장 흥미로운 아다지오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유명한 아다지오 악장 가운데 하나는 

베토벤의 c#단조 피아노 소나타, 

이른바 ‘월광’의 1악장이 아닐까. 

 

Adagio sostenuto.

sostenuto는 영어로 sustained, 

지속적이고 한결같은 여유로움.

그러나 나는 sostenuto에서 

지긋이 밟는 피아노의 페달을 생각한다,

 

언젠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떠올린다,

이제 여기 없는.

 

7

아다지오에는 레가토가 어울리는 법, 

근본적으로 레가토를 단지 

일종의 환영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피아노에서보다 

현악 연주들에서 

아다지오가 더욱 빛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를테면 새뮤엘 바버의 “Adagio for Strings”, 

현악4중주 Op.11의 2악장처럼, 

혹은 지아조토(Giazotto)의 곡으로 밝혀진, 

“알비노니의 아다지오”처럼.

 

8

그러나 현악기들 중에서도,

아니 어쩌면 모든 악기들 중에서

아다지오에 어울리는, 

아다지오 그 자체인 악기를 하나 꼽는다면

단연코 첼로가 아닐까.*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 신의 날)”이나

또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

아다지오가 아니고선 어떻게 이 곡들을

연주해낼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아다지오로 시작하는 1악장에서

2악장의 렌토(Lento)와 3악장의 아다지오를 거쳐

4악장에서 아다지오로 종지에 이르기까지,

내내 흐느끼고 소리없이 울부짖고 애도하는 듯한

엘가의 협주곡이야말로 애통함과 서러움, 

지극한 슬픔과 눈물의 정수(精髓).

 

9

아다지오에서

음표들은,

그리고 당연하게도 쉼표들은

영원을 향한다.

 

다른 시간다른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초월적인 힘,

 

명상이거나 참선이거나, 

또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한 

궁극의 깨달음과도 같은.

 

10

베토벤이 1825년에서 1826년 사이, 

세상을 떠나기 한두 해 전에 썼던

후기 현악4중주들에서

아다지오 악장들은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의 생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것은 아닐까. 

 

아다지오로 1악장을 시작하는

현악4중주 13번과 14번은 물론이거니와

12번 1악장의 Maestoso, 

그리고 15번 1악장의 Assai sostenuto 역시

아다지오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고

생각해 본다.

 

11

‘월광’ 소나타의 1악장에서 보았던

Adagio sostenuto는, 

훗날 베토벤의 Bb장조의 29번째 피아노 소나타,

이른바 ‘함머클라비어’의 3악장에 다시 쓰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 f#단조인 

이 소나타의 3악장을

“모든 슬픔을 아우르는 거대한 무덤”이라거나

파울 베커(Paul Bekker)의 말마따나

‘치유할 길 없는 고통과 슬픔의 절정(apotheosis)’이라고 

표현하고들 한다.**

 

12

그러나 한편으로 Apotheosis는 

고통과 슬픔의 절정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과 슬픔을 이겨낸 뒤 얻는

신성성을 이르기도 한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지금–여기’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세계로 이끄는 것,

 

1787년 출판된 하이든의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Die sieben letzen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

Adagio의 서주(Introduzione)로 시작해 

Largo와 Grave, 또다른 Adagio로 이어지는

회한과 탄식인 동시에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13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의 2악장이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의 Adagietto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느린 악장 

Adagio sostenuto에서처럼,

 

평온과 위안과 슬픔 그리고 탄식, 

애도와 기도와 위로,

또한 명상과 때로 영원에 이르는, 

영적인(spiritual) 고양감까지 아우르는 것이

바로 아다지오가 가진 힘

 

14

위의 수많은 아다지오 가운데 

하나만 링크한다면 단연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Bb장조, Op.106 

“함머클라비어”의 3악장이다. 

알프레트 브렌델의 연주.

https://youtu.be/0d9UAVfbp2Y?t=837

                              

 

 


그보다 낮은 음역대의 콘트라베이스는 크기 면에서도 영어의 large를 뜻하기도 하는 Largo가 어울리는 악기다. 

** 위키피디아 문서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Piano_Sonata_No._29_(Beethoven)

* 이 글은 브런치 포스팅을 위해 2022. 3. 13

수정되었습니다.

 

1

베토벤(Op.61), 차이코프스키(Op.35),

브람스(Op.77)와 슈만(WoO 23),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Op.6),

모차르트의 2번(K.211)과 

4번(K.218)을 비롯해

심지어 프로코피예프의 1번(Op.19)과

코른골트(Op.35)에 이르기까지,

 

왜 가장 널리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은

D장조(라장조)가 많은가.

 

뿐만 아니라

이 못지 않게 사랑받는

시벨리우스의 협주곡(Op.47)과

J. S. 바흐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BWV 1043),

하차투리안의 협주곡(Op.46)은

같은 으뜸음을 쓰는 단조인 d단조이다.

 

왜 바이올린 협주곡은 D를 으뜸음으로 하는

장조와 단조로 많이 씌어졌을까?

 

2

사실 이 문제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음악사와 화성학, 관현악법과 

작곡법 등에 정통해야 할 것이므로

내가 감당할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므로 비전문가로서 그간 찾아보고

이것저것 궁리해본 바에 따라

아주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D는 바이올린의 4개의 현 가운데

아래에서 두 번째 현이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은 아래에서부터,

그러니까 연주자의 몸쪽으로부터

G3 - D4 - A4 - E5로 조율한다.

(참고로 C4~C5가 우리에게 익숙한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역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어떤 이득이 있을까?

 

3

무엇보다 개방현은 당연하게도,

왼손으로 현의 어딘가를 짚은 음보다

더 맑고, 더 음량이 크며,

더 순수한 음을 연주할 수 있다.

 

개방현이 어떤 곡의 으뜸음이라면,

대개 으뜸음으로 끝나는

종지(終止, cadence)에서

가장 명료하고 강렬한 음향으로

끝맺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이올린 협주곡은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음악.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악기는 현악기군이고,

D는 비올라의 위에서 두 번째 현(D4)이며,

첼로의 위에서 두 번째 현(D3)이자,

더블베이스의 위에서 두번째 현(D2)이다.

 

그러므로 한 번 더 단순화자면,

독주 바이올린과 모든 현악기군이

옥타브 간격의 개방현으로

종지부의 으뜸음을 총주(總奏)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원론적으로만 그렇다.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종지는 으뜸음 단음이 아닌

화음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으며

무엇보다 능숙하게 훈련된 연주자들은

톤의 컨트롤을 위해, 

그리고 연주 중에 불가피하게 

조율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개방현 연주를 피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또는 들은 바 있다.

 

3

조금 깊이 들어간다면,

피타고라스 이래로

으뜸음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딸림음(5도 위의 음, 여기서는  A) 역시

개방현으로 얻어질 수 있고,

그 음의 딸림음(E)까지

개방현으로 연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조바꿈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5도와 2도, 고전적인 II - V - I 종지가

악기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

다시 말해 튜닝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4

그렇다면

다시 드는 의문.

나머지 개방현인 G도, A나 E도

마찬가지 아닌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앞의 D장조와 d단조 작품들 못지 않게 

자주 연주되며 사랑받는

멘델스존의 협주곡 Op.64는 e단조이고,

브루흐의 협주곡 1번(Op.26)은 g단조이며

(그보다 덜 알려진 2번 Op.44와 

3번 Op.58은 d단조),

무엇보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Le quattro stagioni)”의

‘봄’과 ‘여름’은 각각 E장조와 g단조이다.

(참고로 ‘가을’과 ‘겨울'은 

각각 F장조와 f단조이다.)

 

또 J. S. 바흐의

1번 협주곡(BWV 1041)은 a단조,

2번(BWV 1042)은 E장조이며,

모차르트의 5번 ‘Turkish’(K. 219)는 A장조,

3번(K. 216)은 G장조이고,

쇼스타코비치의 1번(Op.77)은 a단조,

비외탕의 협주곡 7곡 가운데

2번(Op.19, f#단조)을 제외하면

모두 E, A, D, G가 으뜸음이다.

 

요약하자면

D만큼이나 A와 G, E음도

바이올린 협주곡의 조성으로

곧잘 사용된다는 얘기다.

 

5

그렇다면 왜 그 중에서도

유독 D장조와 d단조 곡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을까?

 

다시 한 번 단순화하자면,

D음은 바이올린의

아래에서 두 번째 현이라서 그렇다.

 

다시 말해

왼손의 포지션을 바꾸지 않고

우리에게 익숙한 높은음자리표 상의

D4에서 한 옥타브 위의 D5를 지나

더 위로는 B5까지 연주할 수 있고,

그리고 아래로는 버금딸림음인

낮은 G까지 내려갈 수 있으니,

 

아찔하게 솟구치는 악구들 뿐만 아니라

숭고하며 웅장한 저음부의 패시지를

왼손의 기본 포지션 내에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현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아닐까.

특히나 왼손의 포지션이 

기본 위치에 가까울수록, 

다시 말해 목(neck)에 가까울수록 

더 투명하고 또렷하며 풍부한 음색을 

얻을 수 있다. 

(브리지 쪽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좀 ‘신경질적인’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이는 곧 같은 소릿결을 가진

오케스트라 내의

수많은 현악기들 속에서

조화로움이 흐트러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독주 바이올린이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밑바탕이기도 하다.

 

6

오스트리아의 음악가이자 교육자였던

에른스트 파우어에 따르면

D장조는 위풍당당함, 장엄함,

위엄과 승리, 축제와 행진곡의 느낌,

그리고 장중함 등을 표현한다.

(Maureen Buja, “How You Should Feel 

in the Key of D Major”. 

https://interlude.hk/feel-key-d-major/ 참고) 

 

독일의 시인이자 음악가

크리스티안 슈바르트 역시

D장조에 대해 마찬가지의 특징과 함께

교향악과 행진곡이 내재돼 있다고 설명하며,

d단조에 대해서는 멜랑콜리와

여성적인 특성, 비장함과 유머를 들고 있다.

(https://wmich.edu/mus-theo/courses/keys.html 참고.)

 

사실 이런 느낌은 어쩌면

평균율에 의한 조율이 정착되기 전, 

혹은 순정율로 연주할 경우에 느껴지는

D장조의 속성일 수도 있겠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D장조 자체가 

현악기군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오케스트라에 최적화된 조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D장조는 현악기에 어울리고, 

그래서 작곡가들이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바로크와 초기 고전 시대의 교향곡과

관현악에 많이 사용하고, 

그러다보니 위풍당당한 D장조라는

일종의 정서적 바탕이 마련된 것. 

 

7

모든 조성에 각각 정서적, 감정적 특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던

낭만주의적인 과잉해석이 아닐까 싶지만, 

그럼에도 아마도 D장조와 더불어, 

어쩌면 오히려 그보다 더 특징적일

Eb장조(내림마장조)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을 수 없겠다.

 

Eb장조는 흔히 ‘영웅적’이라고 여겨지는데,

일명 “영웅(Eroica)”이라는 별칭이 붙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Op.55)의 영향이 

아무래도 매우 크겠으나, 

그 이전부터 귀족들의 사냥 여행에 앞서

연주되던 이른바 

“사냥(le chasse) 교향곡”은

대부분 Eb장조였고, 

이는 Eb장조가 관악기, 특히 금관악기가

앞에 나서기 좋은 조성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과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을 비롯해

많은 호른과 트럼펫 협주곡이 Eb장조이며

초기 고전 시대의 클라리넷 협주곡도 

Eb장조가 상당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악기들의 조음(調音)과 연주 원리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Eb장조가 

(현악기의 D장조와 마찬가지로)

이 악기들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용이하고 적합한 조성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호른과 트럼펫과 같은 금관악기는

전쟁과 사냥에 관련이 깊으며

(이 악기들이 돌진과 퇴각을 알리는

수많은 영화의 장면을 떠올려 보라),

특히 사냥 교향곡과 같은 경우는, 

근현대의 브라스 밴드의 행렬처럼 

야외에서 연주되곤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관악기들이 중요했으므로

Eb장조라는 조성이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관악기들은 기본 조성이 

여러 가지인 경우가 많으며, 

바로크에서 고전을 거쳐 낭만으로 오면서

많은 변화와 개량을 거쳤기에 

이 또한 그저 비전문가의 아주아주 

단순화된 추측임을 (변명삼아) 덧붙여 둔다. 

 


참으로 절묘하다.
리메이크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니나 시몬의 I Put a Spell on You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Op.27-2,
‘월광’ 1악장의 도입부라니. 

‘월광’ 도입부의 반복되는 패턴은 
마치 끊임없이, 
주문이 효력을 발휘할 때까지 
반복해 읊조리는 그것과도 같으며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anyhow) 

무엇보다 우리는 주문을 걸 때 햇님보다는 
달님에게 걸지 않던가. 

2
그렇다. 
이것은 주문이다.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언제까지나 내 것이길 바라는 간절한 주문. 

밤에 문득 깨어 옆에 누운 그대를 보며, 
아침에 눈을 떠도 그대가 그 자리에 있기를, 
그대도 나와 같은 마음이기를,
이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그대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날은 오지 않기를. 

(아,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단지 덧없는 희망일진대!) 

무릇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으나
그런 사랑은 익히 알다시피 한 줄이면 끝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그렇다. 
쉽게 변하는 사랑,
곧 무너질 사랑, 
이뤄지지 못할 사랑, 
속으로만 삭이는 사랑.

캔디스 스프링스Kandace Springs의 새 앨범, 
The Women Who Raised Me (2020)에서는 
이 곡을 비롯해 
그녀가 영향을 받은 여성 뮤지션들의 노래 
12곡을 커버했다. 

물론 이 곡이 가장 인상적이었으나, 
다른 곡들 역시 매우 호소력 있는 노래들.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주문은 
곧잘 저주로 바뀐다. 

사랑이 증오로 변할 때,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불타오르’기 마련. 

6
이 곡에 ‘월광’의 1악장을 붙이면서, 
그녀는 혹시 미친 듯한 격정으로 몰아치는 
3악장도 염두에 두었을까? 

오, 바라건대
여기서 들리지 않는 그 분노의 악절들이 
(다행히도) 영원히 들리지 않기를. 

부디 그녀의 주문이 성공적이었기를, 
그녀가 바라지 않는 짓을 앞두고 있던 그가 
(You better stop the things you do) 
마음을 되돌렸기를.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그가 그녀의 곁에 남아있기를.


p.s.
이 라이브 동영상에는
음반에서 들리는 
색소폰(데이빗 샌본)이 빠졌다. 
더 담백해졌고, 더 절절해졌다. 

여성 연주자들과 같이 
세션을 구성한 것도 음반 컨셉에 더 맞는 듯.


이 글은 2021. 10. 27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

 

 

 

0

The message is this:

You be good. I Love You.

X

— Ted Chiang, ⟨The Great Silence⟩

 from ⟪Elctric Lit⟫, Oct. 20, 2016

 

1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의 

메조 소프라노 수산나 몬카요의 목소리로

피아졸라가 곡을 쓰고 마리오 트레호가 시를 쓴,

“Los pájaros perdidos”를 듣다가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이별을 겪고,

또 언젠가는 궁극의 이별인 

죽음을 경험할 것인 한,

우리는 언제나 상실을 삶 속에서

끌어안을 준비를 해야하는 것 아닐까. 

 

2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우루과이 출신의 베이스-바리톤

어윈 슈로트의 2011년 앨범 

⟨Rojotango⟩에서였다.

https://youtu.be/J_N8h6dKL4I

                              

3

쓸쓸한 회한이 묻어나올 듯 읊조리는 도입부, 

그리고 1분 5초 쯤부터 분위기가 일변하며

참고있던 눈물이 터져나오듯

슬픔이 말이 아닌 몸짓이 되는 순간, 

 

탱고의 강렬한 리듬이라면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 

혹은 당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을까, 

씩씩하면서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배어나오는

대단원으로의 진행의 대비가 인상적인 곡.


4

사실 스페인어를 모르니

“Los pájaros perdidos”가 과연 

‘길 잃은 새’인지‘잃어버린 새’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lyricstraslate.com의 영어번역과 

벅스뮤직에 올라와있는 한글 가사를 참고하자면

perdidos는 상황에 따라 ‘길 잃은’ 새로도,

혹은 젊음이며 환상이며 사랑이며와 같은, 

살아가면서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여전히 못 잊은, 

‘잊고 싶은’ 그대에 대해 노래할 때의 감정에도

공히 적용될 만한 형용사로 보인다. 


길 잃은 새들에 대해 노래하다, 

내가 잃어버린, 사랑하던 모든 것에 대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해 울먹이다, 

그렇게 잊으려 해도 당신 만은 왜 

잊혀지지 않는지 궁금해하다가,

종국에는 잃어버렸던 새들, 

그 기억들이 하나하나 달겨들면서

아, 실은 내가 ‘길 잃은 새’였던 것이로구나

(Soy sóloun pájaro perdido / 

que vuelve desde más allá),

하는 깨달음.

 

5

불행히도 수산나 몬카요의 목소리로는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고

(또 하나의 ‘잃어버림’이라는 점에서 

이 곡에 참으로 어울리는 상황이지만),

앞서 링크한 어윈 슈로트의 라이브 버전과

밀바와 같은 팝가수들이 

남긴 영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들은 것이 

베이스-바리톤의 묵직한,

잔기교보다는 감정의 변화를

굵직한 선으로 표현하는 목소리였다보니

 이렇게 극적인 음악에는

역시 메조소프라노나 알토, 

혹은 베이스-바리톤처럼

저음역대의 노래가 더 잘 어울린다고

느껴진다. 

 

6

그리고 이제 또 새삼 떠올리기를,

 

아침에 뜰에 잠시 왔다 간 

박새 두 마리와, 

지난 해 겨울 초입에 본, 

무리들에서 외따로 떨어져 날던 

그 기러기와,

수 년 전, 십수 년 전, 그리고 

수십 년 전의 그대는

문득 잘 지내고 있는지,

 

내가 잊고 잃어버린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상실이 낯설고 이별에 서툴어

 작별이 작별일 때, 

안녕이 영원한 이별이 될 때

(quando un adiós es un adiós)를 

아직 알지 못하니, 

 

그저 길을 잃은 

또 한 마리,

새일 뿐.

 


0 (reprise)

아마도 내가 21세기 들어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심오하며

쓸쓸하고도 서글픈 소설 가운데 하나일

⟨거대한 침묵⟩의 끝맺음을, 

테드 창은 2019년 ⟪Exhalation(숨)⟫이라는

소설집에 묶어내며 이렇게 바꾼다. 

 

The message is this:

You be good. I love you.

 

물론 이것이 실존했던 회색앵무 알렉스가

연구자이자 친구였던 

아이린 페퍼버그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

“You be good. I love you. 

See you tomorrow.”에

더 가까와진 것이겠지만, 

 

입맞춤의 표시 ‘X’가 사라지면서

화자인 앵무새의 다정함도 

조금 사라져버린 느낌이 드는 것은, 

 

과연 우리가,

이렇게 무서운 속도로 다른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 상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탕진하고 있으면서도 

과연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인류가, 

그런 다정함을 받을 자격이나 있을 것인가, 

싶은 깊은 의문 때문인지도.

       

마리스 얀손스

14 January 1943 ~ 30 November 2019


늘 간결하고 정확한 해석으로, 

어떤 곡이든 그 곡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한 연주를 선사했던

거장 마리스 얀손스,


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는

그가 지휘했던 연주들에 

말로 다 못할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영면을 빈다.


(이 밤은 그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으로

새우게 될 것 같다.)

1

어릴 적의 그 노래들은, 

그러니까 ‘오빠생각’이나 ‘섬집아기’, 

‘나뭇잎 배’ 등

우리가 좋아한 노래들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슬펐을까. 


아니, 어쩌면, 

오랜 세월을 견뎌낸 노래들은,

이를테면 ‘타박네’나 ‘진주난봉가’나 

수많은 전국의 ‘아리랑’들, 

혹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그런 민요들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서늘한 마음을 담고 있었을까. 


2

무릇 기쁨은 노래보다는 춤이 되고

(그러니까, 덩실덩실),

슬픔은 노래가 되기 마련인가. 


이루지 못한 것들과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더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취하는

모종의 형식인 걸까. 


듣다가 부르다가 망연해지는, 

마음 깊이 묻어놓았던 그리움이며 서글픔이며

애틋함과 애절함, 아쉬움 같은 것들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마무리짓지 못한 이야기들은

늘 돌아보고 반추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렇게 (목놓아) 노래를 불러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시절이며 사람이며,

꿈이며, 연정이며에.

 

3

이런저런 생각들을

빌 에반스가 1962년 녹음한 

‘Danny Boy’를 들으며 머리 속에 궁글려 본다. 


4

‘Danny Boy’는 아일랜드의 민요

‘Londonderry Air’의 곡조에 

웨덜리가 가사를 붙인 노래. 


그러므로 아일랜드의, 

이웃 잉글랜드의 탄압과 척박한 토지에 

농사가 망칠 때마다 수없이

수없는 사람들이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역사,

그리고 아마도 섬나라의 갯마을에는 늘 따를 법한 

배타고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노래.


5

위의 연주는

1999년 발매된 “Time Remembered”의 첫 트랙. 

1958년에서 63년 사이 녹음된 음원들로,

척 이스라엘의 베이스, 래리 벙커의 드럼이 함께 하지만

이 트랙을 비롯한 네 곡은  62년 4월 뉴욕에서 

빌 에반스의 솔로로 별도로 진행된 세션이다. 


1983년에 동일한 타이틀로, 

LP로 발매된 적이 있었으나 

곡의 구성이 다르다. 

위키피디아는 이를 두고, 

가급적 빌 에반스를 좋아하는 팬들이

겹치는 곡들 없이 CD를 살 수 있도록 한 

기획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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