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1.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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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Mo-WXxcOUw

 

1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의 새 앨범, 

<Mozart Momentum 1785>에서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단조” K.475를 듣다가

문득 생각한다.

 

아, 이렇게나 진지한, 

심오한 모차르트의 음악이라니.

 

모차르트의 음악은

대개 쾌활하고 명료하며 

아름답고 우아하거나, 

때로 슬프고 애잔하고 

혹은 거룩하고 장엄하거나 

아니면 웅장할 수는 있어도,

 

그의 작품들을

‘심오함’과 결부시키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3

부분적으로는 

여러 일화나 편지에서 보여진

그의 독특한 유머 감각 탓일 수도, 

혹은 대중문화에서 그려낸

조금은 ‘철없고 경박한’ 천재라는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시대는 아직 음악에,

그리고 음악가에게 

‘심오함’을 요구한 시대가 아니었다. 

 

사실 심오함이란,

‘작곡가의 고뇌가 담긴 심오한

예술적 선언’이라는

음악작품에 대한 평가는,

베토벤과 E.T.A. 호프만, 

그리고 낭만주의가 무르익고서야 비로소 

음악에 부여되는 특성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스네스의 환상곡 연주에서 느끼는, 

마치 낭만주의 음악을 예감케하는

이 ‘심오’하다는 느낌은 

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4

다시 처음부터 들어본다, 

 

서서히 상승하다 뚝 떨어지는

옥타브 간격의 3화음으로 쌓은 뒤, 

장중한 펼침화음으로 시작하는 

6마디의 오프닝은 

마치 베토벤이 썼다 해도 믿을 법하다. 

 

특히 각 마디의 첫 음은 다섯 째 마디까지

C-B-Bb-A-Ab로 반음씩 하강하는데,

이토록 불길하며 어두운 시작이라니. 

 

더구나 첫마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c단조의 스케일에서 나온 것이 아닌, 

감7화음에서 비롯된

증4도(감5도)인 F#(Gb)을 포함하고 있어

곡의 모호한 화성감은 더 강조되는데

(5도가 추가된 감7화음의 펼침화음),

이만한 긴장감으로 시작하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또 있던가, 

내 짧은 지식으로는 알지 못한다. 

 

5

옥타브 간격으로 쌓은 3화음은 

기본적으로 음높이만 다른 같은 음들이기에

화성적 효과보다는 음향적 효과를 위해 

사용한 것이었을텐데, 

이 역시 어떤 면에서는 

베토벤의 음악을 예감케 한다. 

 

이를테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c단조, Op.13, 

이름하여 “비창” 1악장의 

오프닝을 떠올려본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 닮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네 마디의 

상승–하강의 느낌이 사뭇 비슷하지 않은가.

 

더구나 베토벤은 “비창” 2악장의 

그 유명한 첫 주제를

모차르트의 환상곡 K.475와 함께 출판된

피아노 소나타 c단조, K.457의 2악장에서

살짝 빌려와 변형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K.475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6

10번째에서 18번째 마디까지의, 

오른손 화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전개는

어떤 면에서 슈베르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끊임없이 망설이는 듯한,

그러나 다채롭게 변화하는 

화성의 진행은 정말 매력적이다. 

 

이윽고 19~20번째 마디의 

왼손 아르페지오는

어쩌면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1악장의 유명한 왼손 트레몰로의

모차르트 버전이 아닐까. 

 

좀 더 무리해 보자면 

41번째 마디까지의 화성 진행과

뒤의 안단티노 부분(91-129마디)의 악상은, 

내게 슈만의 후기 작품들, 

이를테면 “유령 변주곡”과 같은 곡들의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7

곡 전체의 주요 조성변화만 해도

c단조(adagio)-D장조-a단조-g단조-F장조-

f단조-Bb장조(andantino)-g단조(più allegro)-

c단조(tempo primo)로 이어지는데,

181마디의,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곡에

이처럼 다채로운 화성의 변화라니. 

(물론 이렇게 깔끔하게 화성 분석을 하기에는

내 지식이 아직 모자라기에,

위의 조바꿈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더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악보 첫 머리에 표기하기 마련인

기본 조표가 없다는 것이다. 

 

미리 곡의 조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신

모차르트는 각 마디마디에서 임시표를 통해

그 악구와 악절의 화성을 정의하는 셈이다.

마치 전체를 규정하는 조성이라는 장치로부터

작품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처럼. 

 

같이 묶여 출판된 

소나타 c단조 K.457에는 

조표가 표기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곡에서 조표를 생략한 것은

모차르트의 의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8

그렇다. 

엄밀한 형식과 규칙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환상곡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 아닌가.

 

환상곡은 특정한 형식이라기보다

각 시대마다의 특정한 형식이 아닌 어떤 것들,

이를테면 리체르카레가 아닌, 

토카타가 아닌, 전주곡이 아닌, 

소나타가 아닌 어떤 것들을 일컫는, 

다소 즉흥곡의 요소를 갖고 있는, 

형식 아닌 형식. 

 

16세기에 황금기를 거친 뒤

(예를 들어 영국의 윌리엄 버드와 

 존 불의 버지널을 위한 환상곡들)

J.S.바흐와 그 아들 C.P.E. 바흐의 손에 의해 

다시 생기를 얻었으나,

 

무엇보다 환상곡 자체가,

‘Fantasie’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의미로 변화한 것은 

낭만주의와 더불어서 아닐까.

 

그리고 독일낭만주의의 대표자,

음악과 사랑, 그리고 그가 쓴 글

모두가 낭만주의의 체현이었던

슈만의 많은 작품이

환상곡의 형태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환상소곡집,

환상곡 C장조는 말할 것도 없고, 

‘환상’이라는 제목이 포함되지 않은 곡들에서도

환상곡의 또다른 변형들이 느껴지지 않던가. 

 

9

역설적으로 모차르트 환상곡에서

알레그로 부분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아는 모차르트스러운 작법이

많이 엿보인다.

 

모차르트는 곧잘 이 곡을 

즉흥연주했다 전해지는데, 

어쩌면 특히 이 부분이 

즉흥연주를 위한 부분 아니었을까.

즉흥연주란 본디 감동보다는 감탄을, 

듣는 이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기 위한 경우가 많고, 

그래서 느린 부분보다는 빠르고 기교적인,

비르투오소적인 패시지가 더 적당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알레그로 부분은 보다 친숙하며, 

좀 더 고전적이고 단순하게 

악보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어차피 모차르트 자신은 

알레그로를 악보대로가 아닌, 

즉흥연주로 연주해내었을테니 말이다.

 

10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이 곡을 접했다면

지금까지의 주장들에 선뜻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내 생각에)

안스네스의 해석은 새롭다.

 

이 곡이 후대의 작품들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는, 

그래서 환상곡 c단조가 베토벤스럽게 들리는, 

때로 슈베르트나 슈만이 떠오를 정도로 

과감한 연주. 

 

바로 이것이 

아무리 이름난 명곡이라고 할 지라도,

연주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새로운 연주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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