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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RZjHKX-JMA

로베르트 슈만, ⟨환상곡⟩ C장조, Op.17 | 손열음 연주

 

1

1836년 처음 씌어져 1839년 출판된

로베르트 슈만의 ⟨환상곡⟩은 

클라라 비크와 서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방해로

서신조차 주고받기 힘들었던 시절 

그녀에게 바치는 음악으로 쓴 연서(戀書), 

 

아직은 그들의 사랑이

아버지와의 다툼과 절연을 포함해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도,

그럼에도 4년 뒤 법원의 허가를 얻어

마침내 결혼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다지 길지는 못했던 행복과

그 모든 불운과 비극과 고난, 

영광과 기쁨을 알지 못하던, 

심지어 서로에 대한 진실한 마음조차도

견고하지 못했던 시절에, 

 

이토록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2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실로 아찔한 일이다. 

영혼은 물론이거니와 

온몸의 솜털 하나하나, 

심장과 핏줄, 몸 안의 모든 것까지, 

이를테면 창자(‘애’)까지 휘젓고 흔들며 

뒤집어놓곤 하여,

 

우리는 애가 타고, 애끊으며, 

애를 끓이고 애가 다는, 

때로는 애간장이 녹는 듯 하다가 

종종 애닯고 심심찮게 애를 먹고 

그만큼 애를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랑에,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종종 불확실하고 모호하기 마련인 

사랑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애틋함’이 아닐까.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와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는,

서로 상충하는 듯한 사전적 정의처럼

마음을 간질이고 때로 시리도록 저미는, 

그러는 동안 깊숙이 스며들어 

이윽고 물리칠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리고, 

음악. 

 

 3

1악장 Durchaus fantastisch und

leidenschaftlich vorzutragen

(매우 환상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은

클라라의 이름을 부르는

슈만의 애타는 그리움으로 시작한다.

 

왼손이 도약과 하강을 반복하며

마치 폭포수 같은 음들을 쏟아내는,

딸림9화음(G9)으로 보이는 16분음표 

분산화음으로 문을 열고, 

오른손으로 점4분음표와 8분음표의 

A(라) 옥타브 화음에 이어

2분음표의 A-C-D-A 화음을 연주하며

시작되는 제1주제는 

(C)-A-A, 다시 말해 C-라-라(C-la-ra),

클라라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1악장 도입부 클라라의 동기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어서 이른바 ‘클라라의 동기’로 

슈만이 여러 작품에서 변형해 사용한

A에서 D까지 5도 순차 하행하는 음형은

C장조라는 조성에도 불구하고

언뜻 A 자연단음계처럼 느껴지는데,

더구나 으뜸음인 C는 오른손에서

내성부에 숨어 들릴 듯 말 듯 하며 

왼손의 분산화음 역시 으뜸화음을 피해

조성감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모호함은 1악장 내내 

때로 해결이 지연되거나

해결이 되더라도 된 듯 아닌 듯 싶게

해결하는 형태로 지속된다.

마치 사랑할 때의 그 모든 설렘과 떨림 

그리고 간절함, 망설임과 초조, 

기대와 실망, 열정, 갈망, 의심과 자책,

안타까움과 오해와 잠깐의 확신, 

그리움과 두려움과 같은 혼란한 감정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함과도 같이.

 

 77~81마디 아다지오를 지나

In tempo로 넘어가는 부분의 

페르마타가 붙은 쉼표는 마치

말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침묵의 심연과도 같이 숨막히게 하며

이윽고 터져나오는,  

감출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감정의 봇물.

(악절들이 넘어갈 때마다 붙은

페르마타는 곡을 한층 더 드라마틱하게, 

‘환상적이고 열정적’이게 만든다.)

 

1악장 아다지오 부분의 페르마타와 이어지는 당김음 리듬 음형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어지는 악절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16분음표+8분음표의 당김음 리듬(타단—)은

마치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듯,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 듯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며 반복되고,

 

코다에서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98 가운데

마지막 6번째 곡의 도입부

“Nimm sie hin denn, diese Lieder”

(그러니 그대, 이 노래들을 받아주소서)를

살짝 변형해 인용한다.

(슈만은 교향곡 2번 C장조, Op.61과

현악4중주 Op.41/2에서도 사용했다.)

 

1악장 코다의 베토벤 가곡 인용 부분 (악보출처:  http://imslp.org)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있는 연인에게⟫ 중 제6곡 도입부 (악보출처:  http://imslp.org)
슈만 교향곡 2번 C장조, Op.61의 4악장, 베토벤 인용 부분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어 사랑을 간구(懇求)하는 기도처럼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와도 같은 화음에 이어,

마침내 슈만이 모토로 인용한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시구처럼

‘조용히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음’처럼

(Ein leiser Ton gezogen)

아련하게, 곡이 마무리된다. 

 

로베르트 슈만은 1838년 

클라라에게 쓴 편지에서 1악장에 대해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것 중 

‘가장 열정적인 곡’이라고 쓴다. 

악상기호로 쓰인 ‘leidenschaftlich’가 아닌

‘고통을 겪다’는 라틴어 patior에 기원을 둔 

‘(mein) Passionirtestes’를 사용한 것은

(독일어 위키피디아 원어로 인용돼 있다),

Passion이 예수의 ‘수난’과 

그것을 다룬 음악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슈만스러운 선택이 아닐까. 

 

4

2악장 Mässig, durchaus energisch

(적절한 속도로, 매우 활기차게)는

Eb장조의 축제풍의 행진곡으로 시작한다.

 

1악장에서의 모든 모호함이,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고뇌로 찬,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떠돌던 음표들이

마침내 2악장에서 와서야

시원하고 말끔하게 해소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떤 면에서는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지켜낸 사랑의 결실을 나타내는 것도 같고 

혹은 좀 더 통속적인 상상을 발휘하자면,

일종의 결혼행진곡처럼도 느껴진다. 

 

2악장은 기교적으로도 난곡으로 손꼽히는데, 

리듬이나 화성의 대담함, 

음향적 효과를 위한 여러 표현도 그렇거니와

특히 양손이 폭풍우가 몰아치듯

(아래 악보의 Viel bewegter) 

매우 빠른 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크게 도약하며 대단원에 이르는 코다는

이어지는 3악장의 마치 기도와도 같은

고요함과 순수함에 대비되면서

한층 더 효과적인 결말로 이끄는데, 

당대의 피아니스트 중에는 

아마도 리스트 외에 연주할 만한 이가 

거의 없다고 여겨졌다 전해진다.

 

2악장의 스트레타(Stretta) 부분 (악보출처:  http://imslp.org)

 

이 곡을 헌정받은 리스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슈만 앞에서 개인적으로 연주했고,  

슈만은 특히 이 코다 부분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고 끌어안으며 

‘신이 내린 솜씨(Göttlich!)’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스트는 이 작품이

대중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렵다 생각해

공개적인 연주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답으로 1854년에 

그의 b단조 소나타를 슈만에게 헌정한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리스트는 자신의 b단조 소나타 역시 

대중 공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으며,

슈만 부부 역시 슈만의 피아노 작품 대다수가

시대에 앞선 것이라 생각했다.

(클라라가 이 곡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한 것은

로베르트의 사후인 1866년이다.)

 

5

3악장 Langsam getragen. 

Durchweg leise zu halten

(느리고 경건하게, 고요와 평온 잃지 않고)

 

3악장 도입부의 왼손 아르페지오에서

나도 모르게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것은,

슈베르트 곡의 전주 분산화음이

조금 닮았다는 느낌 탓일 수도 있고,

슈만이 1840년에 작곡(& 출판)해

클라라에게 헌정하고 결혼선물로 준

가곡집 ⟪Myrthen⟫, Op.25의 

첫번째 노래 ⟨Widmung(헌정)⟩ 말미에

⟨아베 마리아⟩를 인용한 탓도 있을 테지만, 

 

이 3악장의 기도와 같은, 혹은 

나직한 속삭임이거나 천상의 축복과도 같은 

고요함과 평온함, 신비로움과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야말로,

슈만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천상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슈베르트의 음악과

닮았다면 닮은 데가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지극한 사랑이란

어쩌면 궁극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때로 맑은 날도 또 흐린 날도 있겠으나, 

평정과 평온을 유지한 채 

사랑의 온유함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소란스럽거나 요란하지 않게 

지켜나가는 것. 

 

클라라 슈만이 1840년 4월에 쓴 

일기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와 함께 있을 때가 늘 

가장 편안하고 좋다. 

그는 말이 거의 없다. [...]

그가 나의 손을 지그시 잡을 때,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그의 하나뿐인 연인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낸시 B. 라이히, “클라라 슈만 평전”, 

강자연・하인혜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9)

 

그러나 그런 사랑을 지켜내는 것은, 

 사랑이 변치 않는 것은, 

혹은 조금은 변할 수밖에 없더라도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잃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기도와 기원의 형식만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3악장 악상기호의 ‘getragen’은 

종종 무시되어 번역상 생략되거나

혹은 동사 tragen(가져가다, 나르다)의 

과거분사로만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음악이나 목소리 등을 수식할 때 

영어의 solemn(장엄한, 엄숙한, 경건한)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슈만이 이 단어를 택한 것은

경건한 사랑의 서약과도 같은

이 곡의 분위기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leise’ 역시 조용함보다는

평온함, 차분함 등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여 내 멋대로, 

‘느리고 경건하게, 고요와 평온을 잃지 않고’ 

정도로 옮겨 본다. 

 

다섯째 마디에서 왼손이 

앞서 언급한 ‘클라라의 동기’를 연주하며

오른손이 제1주제를 제시하고, 

이어 조금 먼 조성인 

Ab장조의 제2주제가 나온 뒤

발전적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조금 느슨한 소나타 형식이어서,

악상의 전개는 꿈을 꾸듯

⟨환상곡⟩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자유롭게 흘러간다. 

 

오히려 악장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느낌이 들게끔 하는 것은

악절이 넘어갈 때마다 변형되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서주에서의 왼손 분산화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악곡의 흐름이 정처없이 

부유하는 느낌도 동시에 선사한다.

 

종결부에서도 다시 분산화음이 펼쳐지다 

3개의 으뜸 화음으로 

간결하고 담담하게 마무리된다, 

마치 나직하지만 확고한 다짐처럼,

잔잔하지만 단단한 사랑처럼.

 

3악장의 종지 (악보출처:  http://imslp.org)

그러나 이제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덕분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원래는 3악장의 엔딩이 달랐음을 안다.

 

슈만의 필사가였던 카를 브뤼크너가 필사한

현존하는 필사 악보 따르면, 

슈만은 원래 1악장 코다에 쓰였던 악구를

그대로 3악장의 코다로 다시 사용했으나, 

출판되기 전 수정 과정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엔딩으로 대체된다. 

 

“그러니 그대, 이 노래들을 받아주소서”, 

다시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그가 보내는 그리움의 음표들을 상징하는 

악구로 끝낸다는 점에서 

훨씬 더 애틋한 결말이지만, 

슈만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더 단순하고 간결한 종지를 택한다.

 (3악장 코다에 대한 내용은 

헨레(Henle) 출판사의 온라인 게시물 참조.

해당 부분 악보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왜 코다를 이렇게 바꿨는가, 

슈만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는

아마도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슈만의 의지, 그러니까 출판본부터는

현재 익히 알려진 간명한 코다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간혹 인터넷에서 베토벤을 인용한 코다가 

‘초판본’이라고 잘못 설명하곤 하는데, 

슈만은 초판 출판 이전에 코다를 수정했고

출판은 초판본부터 위 악보의 코다였으니

어떤 것이 더 정확한 작곡가의 뜻인지, 

그리고 작곡가의 뜻에 따라 연주할 때

어떤 코다가 적절한 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다만 손열음은 음반에서도, 리사이틀에서도

수정 전의 코다를 택했고, 

안드라스 쉬프도 그의 음반에

원래의 코다 연주와 함께 이 교정 필사본의

베토벤 인용 코다를 함께 녹음했으니, 

이 애틋함으로 가득한 색다른 매력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Henle 출판사의 다른 게시글 참조.)

 

6

어쩌면 음악에 대한 글인데

너무 사랑이라는 비음악적인 개념으로

서술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슈만의 음악을 어떻게

사랑을 떠올리지 않고 말할 수 있겠는가,

특히 이렇게나 명백하게 사랑의 열정과, 

환희와, 영원한 사랑의 꿈을 담은

⟨환상곡⟩에 대해서는 더욱 더.

(물론 이 곡 전체를 음악적으로 분석하기엔

내 지식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하지만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 곡은 클라라에 대한 연모(戀慕)인 동시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흠모(欽慕).

 

슈만이 애초에 출판사들에 제안한 제목은

⟨Obolen auf Beethovens Monument:

Ruinen, Trophäen, Palmen:

grosse Sonate für das Pianoforte

 für Beethovens Denkmal,

von Florestan und Eusebius⟩, 

우리 말로는 대략

⟨베토벤 기념상에 바치는 작은 헌정:

플로레스탄과 에우제비우스가 쓴

베토벤 기념상을 위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대 소나타⟩로,

플로레스탄과 에우제비우스는 

슈만의 예술적 페르소나,

Ruinen(폐허), Trophäen(승리기념물),

Palmen(종려나무 잎(의 영광))은 

각 악장에 붙은 부제였으며, 

나중에 Ruinen, 

Triumphal Arch(개선의 아치(개선문)), 

Contellation(성좌(星座;별자리))으로 바뀐다. 

 

당시 음악계에서 추진 중이던 

베토벤 기념상 건립 기금 마련에 

힘을 보태기 위한 것이었으나 

두 곳의 출판사로부터는 출판을 거절당하고, 

1839년 브라이트코프&헤르텔 사에서

이 모든 제목과 부제가 삭제되고

현재 알려진 바와 같이 ⟨환상곡⟩으로, 

각 악장에도 부제 없이 

악상기호만 표기된 채 출판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제목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작품을 듣다보면

언뜻 언뜻 베토벤이 썼을 법한

음악적 표현들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작품을 베토벤에 대한 헌정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볼 수도 있겠다.

 

1악장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비교적 초기작인 Op.27로 출판된

환상곡 풍(Quasi una fantasia)의 

두 곡의 소나타를 떠오르게 하고

(Op.27-2  유명한 ‘월광’),

 

2악장은 아마도 같은 C장조인

피아노 소나타 21번 Op.53 ‘발트슈타인’이나

소나타 29번 Bb장조, Op.106 

‘함머클라비어를 위한 대소나타’를

(실제로 ⟨환상곡⟩의 오케스트라에 가까운

피아노의 음향적 효과를

‘함머클라비어’와 비교하는 평자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 3악장은 

베토벤의 가장 마지막 소나타들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하면 흥미롭지 않을까. 

 

특히 소나타 30번 E장조, Op.109의

기존 소나타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흐름, 

그리고 31번 Ab장조, Op.110의 3악장이나,

혹은 지상에서의 고뇌로부터 

천상의 지복(至福)으로의 상승과도 같은

c단조의 마지막 소나타, Op.111을 생각하면,

영원하고 지고한 사랑을 노래한, 

혹은 종려나무 잎이나 하늘의 별자리에

어울릴 법한 영광스러움을 노래한

슈만의 ⟨환상곡⟩ 3악장과 사뭇 닮았다.

 

7

이 곡을 나름 좋아한 것은 오래되었으나, 

‘애정하게’ 된 것은 서두에 링크한

손열음의 연주 덕분이었다. 

그의 연주는 참으로 애틋한 해석이어서, 

1악장의 페르마타 처리도 눈에 띄게 길고

(정말 숨막힐 듯한 페르마타!),

앞서 언급했듯이 3악장의 코다도

베토벤 인용구를 포함한 코다로 연주한다.  

누군가 이 곡을 새로 알고 싶거나 

아니면 알고있던 것을 새롭게 하고 싶다면 

손열음의 음반으로 시작해도 좋겠다. 

이 곡의 유일무이한 절대적 해석은 

아닐 지도 모르겠으나,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애틋한 연주라고 생각한다.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열정과 고아함이

매우 적절하게 균형을 갖추고 있으며,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기품있는 연주는

특히나 3악장에서 빛난다. 

 

https://youtu.be/Ve3yewPoGfU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1959년 베를린 실황 연주
 

 

미츠코 우치다의 연주는

그녀가 이런 연주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격정적이다.

우치다나 손열음의 연주를 듣다보면,

이 곡이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라는 건

단순히 기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절절하고 강렬한 감정으로 가득한 

30분 남짓의 시간을 채워나가는 것은, 

연주자에게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매우 벅차고 진이 빠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음반으로 들었던 

리흐테르, 폴리니, 알리시아 데 라로차, 

조너선 비스와 브렌델 모두 

제각기 매력이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아니 피셔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훌륭한 연주도

찾을 수 있으니, 

어느 연주를 선택해 들어도 

후회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https://youtu.be/77m5DlCJ6wk

아니 피셔(Annie Fischer)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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