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좋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오래오래, 
우리 곁에 남아주세요, 
레너드. 




재즈 레이블인 ACT에서 곧 발매예정인 아티스트로

Black String이라는 밴드가 떠있었고, 

미리듣기를 해보니 어라, 국악인데, 싶어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 창작국악그룹이다. 


어설프게 재즈나 현대 서양음악과 접목한 것이 아니라, 

“칠채”에서처럼 국악의 근본을 유지하면서도 

그 한계까지 실험을 밀어붙이면서 세련되게, 

화학적인 결합을 창조해냈다. 

이건 누가 들어도 한국음악이지만,

 한편으로 서양음악이기도 하다. 


서구에서도, 혹은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도 

진지한 음악 감상자라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음악을 좋아한다면 마땅히 주목해야 할 창작국악그룹.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슈만을 좋아하세요”라고 묻기는 힘들다. 

슈만의 음악이 누구의 것과 
가장 비슷한 것 같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대답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슈만은 슈만과 가장 닮았으며

슈만과 가장 닮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그에게 시시때때로 찾아온, 

그래서 생을 마감하는 이유가 된 정신적 문제만큼이나

작품마다 스타일이 다르게 들리기 때문일까.


그래도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피아노 4중주와 5중주, 환상곡 C장조와 같은 곡들이

특히 빼어난 선율과 그를 뒷받침하는 형식미에 있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봄’이라는 별칭이 붙은 

교향곡 1번의 4악장 도입부에서

찰랑거리며 재잘거리는 현 파트야말로  

봄날의, 혹은 사랑 앞의 설렘으로 가득한,

명곡이다.  


클라라와 결혼한 이듬해인 

1841년 완성되고 초연됐으니

어쩌면 슈만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도.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비올렌느 꼬샤르와

우리나라에도 몇 번 다녀갔다는 

재즈 피아니스트 에두아르 페를레가 연출하는

재즈와 클래식의 세련된 뒤얽힘. 


현을 ‘뜯는(plucking)’ 하프시코드와 

현을 해머(hammer)로 ‘때리는’, 

그래서 ‘뜯지 않는(un-plucking)’ 피아노의 만남.

건반악기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소리를 내는 방식도 다르고 조율도 완전히 같지는 않아서, 

사실 두 악기가 모종의 관계는 있지만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아니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20세기 후반 들어 하프시코드가 ‘재발견’되어

옛날 케케묵은 악기라는 오명도 떨쳐냈고, 

오히려 이 악기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마치 신서사이저에서 나오는 소리로 오인할 만하니  

바로크 시대의 악기가 모던 내지는 

포스트 모던과도 통하는 바가 있을 터. 


사실 하프시코드와 피아노의 협연, 

이런 전례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두 악기가 빚어내는 소리의 조합이

(솔직히 말하자면 예상과는 다르게)

꽤 상큼하고 발랄하며 깊이 있다. 


현대음악의 하나로 들릴 법한,

바흐의 음악에 대한 재해석도 

틀에 박히지 않아 매력적. 



Violaine Clochard & Edouard Ferlet

Johann Sebastian Bach: Plucked / Unplucked

Alphaclassics, 2016 (ALPHA 229)




Well I run to the rock, please hide me 

...
 So I run to the river, it was bleeding’ 
...

 I run to the sea, it was boiling’



내게 박수소리가 박수가 아닌 

저 중세의 채찍질 고행자(flagellants)들의 

채찍 소리로 들리는 것은

아마도 죄가 많아서일테다. 


그날 이후로 때때로 묻는다, 

내가 그 배에 있었다면

나는 아이들을 구하는 쪽이었을까

아니면 내 한 몸 먼저 도망치는 쪽이었을까. 


나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곳, 손길이 필요한 사람, 

길이 필요한 것들에게서 

자꾸만 도망쳤다, 


도망쳐도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데. 



So I ran to the devil, he was waitin’

I ran to the devil, he was waitin’

Ran to the devil, he was waitin’ 

All on that day I cried...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스웨덴의 작곡가 헨닝 만켈. 

주로 피아노 작품들을 남겼고,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 고

아주 간략한 정보만을 찾을 수 있었다. 


‘엄청난 대작’이거나 ‘필청’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생상스나 그리그의 시대와 

희미하게나마 쇼스타코비치 또는 

프로코피예프 사이의 어디 쯤 놓일, 

한번쯤 들어봐도 좋을 20세기초의 근대음악. 



And dark, dark tales on the road again 
And dark, dark tales everywhere 
And dark, dark tales from the Desden den 
Those crooked, crooked stairs


세상은 고해(苦海)고, 

모든 노래는 고해(告解)다.


‘모든’이라는 수사가 지나치다면, 

적어도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dark tales’를 주문처럼 외는 

이 노래라면 정말로 그렇다. 


도대체 드레스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마도,


.



1945년 2월, 연합군은 비군사지역이었던 드레스덴에 

사흘간 무차별 폭격해 도시를 초토화시킨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


더 나쁜 폭력을 굴복시키기 위한 폭력은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Schubert - Abschied, D.475
Matthias Goerne (Bar.), Ingo Metzmacher (Pf.)


3도씩 마치 한숨처럼 하강하는 첫 세 화음, 

잉고 메츠마허의 피아노는 그 도입부만으로도

이 곡의 제목이 고별(Abschied)이라는 걸 웅변한다. 


이윽고 작별의 인사를, 

차마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에 나서는 심정을 

나즈막히 전하는 마티아스 괴르네의 목소리. 


슈베르트는 어떤 면에서 늘 고별을 이야기했지만, 

이만큼 쓸쓸한 작별의 노래는 아마 다시 없을 것이다. 

말러의 ‘고별’을 제외한다면. 


.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같은 목관과 함께 

말러의 고별은, 


늘 저 푸른 지평선을 향해야 하는, 

고향을 그리되 고향에 가지 못하는,

(하기야 고향이라고 꿈에도 그리던 그 고향이 아닐진대,)

떠도는 것이 숙명인 자의 고별.

 

그 마지막 싯귀처럼 그리운 그곳은 

언제나, 어디서나 지평선 너머에 있을 뿐. 


Allüberall und ewig blauen licht die Fernen!

Ewig... ewig...

어디서나 영원히 먼 곳으로부터 푸르게 빛나네, 

언제나... 언제까지나...


Mahler - Der Abschied aus “Das Lied von der Erde (대지의 노래)”

Janet Baker (Ms.), 

Rafael Kubelik &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They wanted know why I did what I did, 

Well, sir, I guess there's just a meanness in this world.
— Bruce Springsteen, Nebraska from <Nebraska>, 1982



왜 그는 평화롭던 거리에 19톤 트럭을 몰고
아무 죄없는 사람들을 덮쳤던 것일까.

니스에서의 ‘테러’가 있던 주말
중고 LP 매대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앨범, 
“네브라스카”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모종의 계시인 걸까.  

그는 여자친구와 차를 몰아 사람들을 덮친다, 
그리고 10명이 사망했다. 
와이오밍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차 앞의 모든 것을 죽이면서 지나갔다.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했던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그저 이 세상이 너무 잔인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앨범이 나오던 1982년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밀려난 이들의 절망감과, 
바야흐로 2016년 
세계화된 신자유주의로 주변부로 밀려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불평등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절망감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합의와 동의에 기초한 사회가 아니라, 
배제와 모멸, 사유화된 권력의 집행으로 이끌어지는 시대.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더 인내할 수 있을까. 
아니, 인내하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 곡을 들을 때면 

늘 정지용이 생각난다. 


그,

아이 잃은 아비의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외롭고 황홀한 심사’.


베르나르다 핑크의 목소리는 

고요하나 또한 격정적이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는 듯한, 

흐려진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이름을 쓰고 또 쓰고,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써내려가는 먹먹한 심사.


그러고보면 말러와 정지용의, 

그 안경(또다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눈빛 또한, 

이 세계 너머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 또한,

 

닮았다.  




Bernarda Fink (Mezzo-soprano), 

Tonkünstler-Orchester Niederösterreich 

conducted by Andrés Orozco-Estr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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