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는

당신이 아니면

누가 불러주나요.

RIP

16 Oct. 1962 - 22 Nov. 2017


얼마 전 포스팅한 Daniel Herskedal의 음악이, 

그 안개처럼 흩어지는 관악의 사운드가 

W.M. Turner의 화폭을 연상케 한다면, 

듀크 엘링턴 밴드가 연주한 이 음악, 

 Take the ‘A’ Train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아직 기차를 타기 전의 소란스러운 플랫폼이 배경이다. 


빌리 스트레이혼이 작곡한 이 곡, 
제목의 A Train이란 1932년 개통한
뉴욕의 지하철 노선이라고 한다. 
그러니 마치 새로 개통한 
산 위로 오르는 모노레일을 홍보하기 위해 작곡된
‘자, 어서들 오세요, A호선 열차 출발합니다, 
어서들 타세요’, 라는 차장의 외침이 들리며
열차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의 
소란스러운 흥겨움이 묻어나는 곡이다. 

도입부의 기적소리의 메타포, 
그리고 당대의 내로라 하는 연주자들이 포진한
듀크 엘링턴 밴드의 연주는,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내게 이 그림을 연상케 한다. 

La Gare Saint-Lazare de Claude Monet from Wikipedia Commons


1877년 모네가 남긴 그림, 
쌩-라자르 역이다. 

떠들썩한 분위기,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수증기 사이로 
언뜻언뜻 들려올 것만 같은 작별의 인사들. 
(물론 A호선은 당연히 전철이었테니 차이는 있지만.)

재즈라면, 
특히 스윙과 빅밴드 시대의 재즈라면
왠지 흑백이 더 어올릴 것 같지만 
이렇게 총천연색의 기차역 풍경도 썩 나쁘지 않다. 

모네는 같은 해 쌩-라자르역을 
또 한번 화폭에 담았는데,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다음의 그림은
어쩐지 조금더 1940년대 재즈의 느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Claude Monet, Gare St.Lazare, 1877 from National Gallery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뮤지션과 아티스트가 
묘사하는 열차의 풍경들. 
다니엘 헤르스케달과 듀크 엘링턴. 
터너와 모네. 

 
ps.
우리에게도 기차에 대한 음악이 있다. 
산울림 팬이라면 첫 손에 꼽을 명곡 가운데 하나. 
촉촉한 후기의 산울림만 아는 이들에게는 
조금쯤은 놀라운 음악일 수도. 






https://youtu.be/AOHRabxpg1Y

— 모라비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루돌프 피르쿠스니의 연주 —

                              

이 글은 2021. 11. 3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1

길이 있다(혹은 있었다),

오래 찾지 않아 흔적만 희미하게 

남은,

 

간혹 이름을 알고 대개는 

이름도 모르는 풀들이 무성해진, 

가보지 않았다면 길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법한, 그런

길. 

 

2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 출신 작곡가 

야나체크의 피아노 소품의 모음집인

⟪Po zarostlém chodníčku⟫는

영어로는 ⟪On an Overgrown Path⟫,

우리말로는 보통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로 소개되는데, 

이 제목이 너무 산문적인 것 같아

나의 경우 (딴에는) 보다 중의적으로 

그저 “무성한 길”이나

혹은 “웃자란 길”로 소개하곤 한다. 

 

오랫동안 가보지 않은 길에

과연 풀들만 무성하겠는가. 

풀들이 무성해진(overgrown) 만큼

그 길 자체도 웃자라는(over-grown) 것은

 아닐까. 

 

3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체코어 제목은 

지나간 시절의 추억을 묘사할 때 쓰는

관용적 어구라고 한다.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의 

2014년 음반(Hyperion)의 해설을 쓴 

해리엇 스미스에 따르면,

모라비아 지방의 신부가 부르는 결혼식 노래, 

“엄마 집으로 가는 길에는 

토끼풀만 무성하게 자랐네”라는 가사처럼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워도 되찾을 수 없는 아쉬움과

일말의 서글픔이 묻어나오는 

표현이다. 

 

4

열 곡으로 구성된 첫번째 시리즈와 

때로 두 곡, 현대에는 4~5곡으로 이루어진

두번째 권으로 나뉘어지는데, 

첫번째 시리즈가 더 자주 연주되고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글에서도 첫번째 권에 대해서만 다룬다.)

 

첫번째 시리즈에 포함된 곡 각각의 제목은

제1곡 Our evenings (우리의 저녁들)

제2곡 A blown-away leaf (바람에 떨어진 잎새)

제3곡 Come with us! (같이 가요!)

제4곡 The Frýdek Madonna 

(프리데크의 동정녀 마리아)

제5곡 They chattered like swallows 

(그들은 참새들처럼 지저귀고)

제6곡 Words fail! (어떤 말도 소용없네)

제7곡 Good night!

제8곡 Unutterable anguish 

(말못할 고통)

제9곡 In tears (눈물 속에서)

제10곡 The barn owl has not flown away!

(헛간올빼미는 아직도 날아가지 않았네)이다. 

 

1897년 하르모니움이라는 악기를 위해

민요 선율을 편곡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1901년에 세 곡이 ⟪슬라브의 멜로디⟫라는

악보집에 묶여 출판된 이후

1911년 12월에 출판되기까지 

각각의 곡들이 씌어지고, 수정되고, 

곡들이 더해지고, 제목이 붙었다가, 

제목이 바뀌고,

다양한 출판업자들과 

실랑이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한다. 

 

다만 “On an Overgrown Path”라는 제목은

1901년 세 개의 소품이 출판될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니, 

야나체크가 언젠가는 완성될

이 피아노 소품 사이클의 성격을

애초부터 ‘멀어져간 추억의 회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5

사실 야나체크의 음악을

(그리고 후기 낭만주의 이후의 음악을)

곡의 구조나 화성의 분석 등을 통해

음악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비전공자, 비전문가에게는 

지나치게 버거운 일이다. 

 

영국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가

스크랴빈과 야나체크의 음악을 연주해

2015년 내놓은 앨범(Hyperion)에 

언급한 말에 따르자면, 

‘야나체크는 짧은 악구나 악절을

때로는 강박적으로 반복해 사용하며, 

화성적 어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편’하며,

그래서 야나체크를 너무 많이 듣거나 

혹은 연주하는 것은 

상당히 ‘진이 빠지는(exhausting)’ 일이다. 

 

불확실한 조성감 탓에

마치 들풀이 무성한 길에서처럼

방향을 잃어버린 듯한 선율과 화성.

나아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오른손은 흘러가려 하지만

왼손은 아래로 하강하며 발길을 붙들고,

음표들은 마치 수직으로 자라난 풀들처럼

추억 속으로의 여행을 가로막는 듯하다. 

첫번째 곡 Our evenings의 부분 (악보 출처는 http://imslp.org)

두번째 곡 A blown-away leaf의 부분 (악보 출처는 http://imslp.org)

 

6

야나체크의 음악은 그렇다,

언뜻 달콤함이 비치는 순간에도

서늘함은 늘 그곳에 있다. 

잠깐 다정함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씁쓸함이 엄습한다. 

 

이 기이하고 불안한 화음이며,

발길에 자꾸 채이는

온전한 추억으로의 생각의 흐름을 

방해하는 리듬이라니. 

 

야나체크는 이 곡들을 쓸 무렵인 1903년, 

딸 올가를 장티푸스로 잃는다. 

그보다 십여 년 전에 이미 아들을 잃었고, 

이후 야나체크 부부는 예전의

애틋함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특히 첫번째 곡과 마지막 곡은

딸의 사망 직전에 씌어졌는데, 

마지막 곡 제목의 올빼미가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불길한 전조를 상징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그 앞의 곡이 In tears임을 떠올리면

이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슬픔을

조금쯤 이해하게 된다. 

 

7

따지고 보면 

굳이 옛 시절을 떠올리는 이의 심사에는,

현재가 보잘 것 없고 고통스럽거나

혹은 과거의 슬픔이 가시지 않았거나,

설령 행복한 기억이라 해도 

그 바탕엔 늘 온갖 아쉬움과 그리움, 

서글픔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과연 우리의 기억이란 

또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지나간 시절은 대체로 희미하기에

보이지 않는 이정표들을 간신히 엮어내어 

우리는 더듬더듬, 

자라난 세월에 묻힌 길을 

한없이 헤매곤 하지 않던가. 

풀들이 무성히 자라난 만큼, 

우리가 더듬어야 할 길도 자라나며 

생각의 가지들은 이리로 저리로,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간다.

 

그러므로 이 무성함은, 

풀들이 무성하다면 자연스레 떠오를 법한

여름날 초록의 무성함이라기보다, 

물기 없이 누렇게 말라버린 풀들로 덮인

밤이 길어지는 이맘 때의 황량한 

풍경과도 같은 것, 

 

혹은 여섯 번째 곡의 제목(Words fail!)처럼

뭐라 표현할 낱말조차 찾지 못한 채

옛 시절의 자취를 하릴없이 좇으며

뒤척이는 고단한 밤이거나 

사나운 꿈자리와도 

같은.

 

8

이 작품 자체가 감상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사적인 것이다보니 

유려함과 낭만성을 강조하는 해석보다는 

오히려 좀 건조하고 깔끔하게, 

감정을 굳이 너무 담아내지 않고

소리의 울림에 집중하는 연주가 

더 좋은 듯하다. 

 

글 머리에 링크한 

모라비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루돌프 피르쿠스니(Rudolf Firkušný)의 연주는

아무래도 모라비아 민요 선율이 쓰인 

이 작품의 해석에 있어

레퍼런스라 할 만하다.

 

그 외에 동유럽과 슬라브 문화의 전통에 

가깝고 친숙할 법한 연주자들, 

헝가리 태생인 안드라스 쉬프(ECM, 2001), 

사라예보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이바나 가브리치(Champs Hill, 2011)가 

추천할 만하다. 

 

위의 세 사람 모두 왼손, 혹은 내성부가 

흐름을 끊고 맺고 이어가는 음악적 어법을, 

그 안의 달콤함과 서늘함과 씁쓸함을

매우 탁월하게 소화하고 있다. 

 

9

마지막으로 공연 실황 동영상을 

하나 더 링크한다. 

 

일본계 영국 피아니스트

미스즈 타나카인데, 

그녀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체코에서 이반 모라베크 등을 사사하기도 한, 

야나체크에 대한 이해가 깊은 

연주자로 보인다.

 

연주 자체도 훌륭하고

(특히 이 작품의 페달 사용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연주만큼이나 절제된 의상도 인상적이며 

제스처도 과장되지 않아 좋다. 

2016년 내놓은 앨범에서 

야나체크의 이 곡과 커플링된 것이 

바흐의 파르티타인 것으로 보아

그녀의 지향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https://youtu.be/PG_dKoGM4AI

                              

 


도라 페야체비치 Dora Pejačević.

1885년 태어나 1923년 사망한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크로아티아에도, 그렇다, 클래식 작곡가가 

당연하게도 존재했다. 

 

가곡에서 피아노 독주를 위한 작품들,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곡들,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1곡까지, 

상당히 많은 양의, 폭넓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의 여성–비독일–근현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탐구된 적은 거의 없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다. 


처음 동영상은 그녀의 피아노 소품, 

Maštanja (6개의 환상적 소품), Op.17 중 한 곡. 


크로아티아어를 알지 못하고 사전도 없는 관계로

구글에서 번역과 사전을 뒤져본 결과, 

Maštanja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Maštanje라는 단어가 Daydreaming, 

백일몽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단어의 여성형이 아닐까 싶은데 확실치는 않다. 

그럭저럭 곡의 분위기와도 어울린다 싶어 

보다 확실해질 때까지는 이렇게 짐작해 본다. 


동영상은 Zudja, 그리움이나 갈망을 뜻한다. 

그리움, 슬픔, 의문, 비탄, 애원, 광란, 

이렇게 여섯 곡 중에서

첫번째 곡이다. 


여러 면에서 체코의 작곡가 야나첵의 

웃자란 길(Po zarostlém chodníčku; On an Overgrown Path)”을

떠오르게 하는 곡이다. 


다음 이어지는 곡은 Maštanja가 씌어진 이듬해인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쳐 완성된

Život cvijeća (꽃들의 생애, Life of the Flowers) 중에서

8번째 곡인 Krizantema (국화). 


아마도 이 소품집에서 가장 대중적인 선율과

화성을 지닌 듯 싶은 이 곡, 

푸치니의 현악4중주 작품인 Crisantemi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어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노래라기보다 읊조린다고 해야할 것 같은, 

마치 샤먼의 입에서 나오는 招魂과도 같은 

Melanie de Biasio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2013년 발매된 No Deal이었다. 


니나 시몬의 I’m Gonna Leave You를 

멋지게 재해석한 것을 비롯해, 

어둡고 음침하며 싸이키델릭한 

7곡의 노래가 매력적이었던 앨범.  

    

벨기에 태생으로

플루트와 클래식 성악의 기초 위에

재즈와 소울, 블루스를 적절히 배합해

자기 만의 음악으로 직조하고 있는 가수다. 


얼마 전 내놓은 새 음반 Lilies의 마지막 트랙, 

And My Heart Goes On. 

PC나 스마트폰 스피커 말고 

번들이어폰이라도 귀에 꽂고 

볼륨을 조금 높여 들으면

이 곡의 진가가 드러난다. 

(누군가는 어두울 때 차 안에서

혼자 듣기는 무서울 것 같다고도 하지만.)


오지은의 당신이 필요해요

좀 쓸쓸하기는 해도 여전히 사랑의 박동이라면, 

이 노래의 심장은 좀 더 존재론적으로 뛴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어, 라는,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심장이 공명하는 음악이랄까. 


다음은 1집의 첫 곡, 

I Feel You의 라이브 버전. 









만약 당신이 재즈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벤을 사랑하게 될 거야. 

당신은 재즈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오네트Ornette Coleman를 좋아할 수는 없을지도 몰라. 

듀크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재즈를 사랑하면서 

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

—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But Beautiful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레일 위를 굴러가는 기차바퀴의 단조로운 소음, 
그 리듬에 몸을 맡기고 흔들거리며 졸린 눈으로 창 밖, 
마치 입자가 만져질 것만 같은 안개를 바라본다, 
기차는 느리게 움직이고 안개 역시 천천히 흘러간다, 
마치 기차가 안개의 근원이라도 향해 달려가듯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 가운데, 
밤이 깊어간다.


덴마크의 튜바 연주자 
다니엘 헤르스케달Daniel Herskedal의 
2015년 앨범 Slow Eastbound Train의 
첫 트랙이자 앨범 전체의 인트로intro격인 
‘Mistral noir (안개 낀 밤)’. 

다분히 미니멀한, 
선율의 진행보다 반복적인 구성으로
오히려 소리의 텍스처를 강조하는 음악. 

안개의 입자와 흐름, 기차의 움직임, 
바퀴와 레일의 마찰음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헤드폰으로 듣는다면 
다채로운 텅잉tonguing[각주:1]으로 
‘칙칙폭폭’처럼 들리게끔, 
내연기관의 소음마저도 흉내내어 
오스티나토ostinato[각주:2]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대개는 저음부를 담당하는 탓에 
프런트 라인에 나서지 않는 악기인 튜바와, 
역시나 빅밴드 편성에서도 보기 힘든
베이스 트럼펫이라는 두 악기의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음악. 


 눈을 감고 음악을 가만히 듣다보면
J.M.W. 터너의 1844년작
Rain, Steam and Speed가 떠오른다.  

물론 이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낮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와, 
비가 일으키는 물안개와, 
기차가 뿜어내는 안개 같은 증기와 
튜바와 트럼펫의 관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입김, 
그리고 안개 만큼이나 속도 탓에 윤곽이 흐려진
기관차의 단단한 몸체가 뒤섞여, 

이토록 시각적인 음악과 
저토록 청각적인 회화가 만난다, 
터너, 그리고 헤르스케달. 


  1. 관악기는 그저 바람을 불어넣는 게 아니다. 능숙한 연주자라면 혀의 위치와 움직임을 통해 음고와 음색, 리듬 등을 조금씩 바꾸는데, 이를 혀를 이용한다 하여 tonguing이라 한다. [본문으로]
  2.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반복적인 리프로 구성된 악구로, 주로 저음부에 사용돼 ostinato bass라고 표기되곤 한다. . [본문으로]


2011년작 영화 Drive는 그 내용보다도

홀린 듯 취한 듯 펼쳐지는 영상이, 

나아가 영상보다도 음악이 앞서 떠오르는 영화다. 

요즘 보기 드물게 음악 때문에 자꾸 생각나는 영화. 


1971년도 이탈리아 영화 Addio zio Tom에 처음 사용된

리즈 오르톨라니 작곡의 Oh My Love는 그 중에서도 백미다. 

어둠, 그러니까 암흑가든 동네 뒷골목이든 

혹은 그저 고난을 상징하든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속해있는 남자에게 건네는, 

그 사내가 광명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보다는 소망에 가까운 메시지. 


리즈 오르톨라니와 결혼하기도 한[각주:1] 가수

카티나 라니에리Katyna Ranieri의 

한 세시간 쯤 울고 난 뒤와 같은 잠긴 목소리,

고조되는 스트링을 배경으로 마치

떠오르는 햇살처럼 청자를 감싸는 에너지. 


무엇보다 종지cadence 없이 끝나는 

화성이 해결되지 않고 열려있는 종결부는

아직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그래서 더욱 간절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듣는 사람을 무한 반복의 수렁에 빠뜨린다.

 

이 곡 뿐 아니라 College & Electric Youth의 

A Real Hero와 더불어

2년 뒤 런던 그래머London Grammar가 

그들의 데뷔 앨범 If You Wait (2013)에서

원곡보다도 훨씬 더 몽환적이고 관능적으로 커버한, 

프랑스 뮤지션 Kavinsky의 Nightcall도 무척 인상적이다.


(사실 런던 그래머의 뮤직비디오는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 같다.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작업들을 떠오르게 하는 

색채와 조명, 그리고 극적인theatrical 연출.)





  1. 이 노래를 녹음할 당시 부부관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관계로, 모호한 시제로 놔둔다. [본문으로]


그는 핀란드에서 왔고

나보다 머리 하나는 좋이 컸다. 

내가 늘 이름을 잊곤 하는 그의 여자친구는 

아프리카계로 지금은 결혼까지 이르러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가깝다고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친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 시절과 그 이후의 내 인간관계가 그렇듯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곤란한 그런 사이였는데

우리 둘을 묶어주는 공통점이 있다면 

이른바 흑인(들로부터 기원한) 음악에 대한 애호, 

재즈와 블루스로부터 나온 음악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빌 위더스의 이 노래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2분’,  

빌 위더스의 Ain’t No Sunshine (1971)은 

사랑을 잃어본 자가 느낄 수 있는 절절함이

음표 하나 하나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모든 노래에는 

노래를 함께 나눴던 이들과의 기억이 

흔적으로 남는다. 

아니, 그 친구들 뿐 아니라 

이제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말로는 지나치게 모자란 

그리움이라 해도 좋겠다. 


언제나 손에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내 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우리 젊은 날의 한 때. 



(그러하기에 이별에는 어떤 음악도 許하지 않기를, 

고별의 순간에는 음악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기를, 

부질없는 기억들을 음악과 함께 당신의 마음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겨두지 않기를, 

부디)




이토록 위태로운 평온함, 
아슬아슬한 아름다움,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이 곡에 대한,

정확하고 선이 굵은, 강건한 해석으로 
결코 감정에 몰익(沒溺)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손길로 그 감정의 기복들을 최대치로 그려낸, 

달리 3중주단의 호연. 

(Fuga Libera,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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