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날인가 ‘本人喪’이 적힌 부고장을 받는 것, 

그렇게 연락처 목록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드는 것,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둘씩 먼저 떠나보내고

여름의 끝무렵 마지막 남은 한떨기 장미처럼

우두커니 홀로, 


아일랜드 시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시에 

곡조가 붙고 베토벤과 쿨라우, 플로토우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곡조를 작품에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이 노래는, 


그렇게 쓸쓸하지만 담담하게 

아직은 살아있는 자의 서글픈 심정을 전한다; 

곧 나도 그 길을 따라가리라는 것을, 

소중한 이들이 사라진 이곳의 황량함을

버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그러므로 이 노래는,

그저 예쁘게 부르는 것보다는 

이 동영상의 레온타인 프라이스처럼

세월의 눅진한 맛이 느껴지는 연주가 더 좋다.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까닭에, 

나나 무스쿠리의 살짝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바이브레이션이 오히려 더 

호소력이 있다고 해야할까. 



So soon may I follow ,
When friendships decay ,
And from Love's shining circle
The gems drop away.
When true hearts lie withered,
And fond ones are flown,
Oh! who would inhabit
This bleak world alone?







그 봄날 소중했던, 마치 보석과도 같던

그 꽃은 시들어가고, 

깊고 깊은, 어두운 우물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길어 뿌려주어도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렇듯 영혼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다 해도, 

그 물을 그대의 발 앞에 뿌린다 해도, 


이제 다시 없을 기쁜 날이여, 

다시 되살리지 못할 그 봄날의, 

내 가슴 속의 장미여, 


(오, 나의 사랑이여)[각주:1]



첫 음부터 눈물을 부르는 노래가 있다면, 

그런 리트Lied가 있다면, 

단연코 로베르트 슈만이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시에 곡을 붙인

이 노래가 아닐까.  


사실 괴르네가 올해 발매한

피아니스트 마르쿠스 힌터호이저와의 녹음[각주:2]이  

훨씬 더 절절하지만, 


2004년 에릭 슈나이더와 함께 한

젊은 시절 괴르네의 

부드럽지만 조금은 건조한, 

‘눈물 없는 울음’도 매력적이다. 


1850년, 그러니까 슈만이 죽기 6년전 

이 곡을 포함해 6곡의 노래와 

마지막 레퀴엠까지 일곱 곡이 같이 출판된

작품번호 90번은 이렇게 내내, 


참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서글픈,

듣다보면 코 끝이 아릿해 오는

마치 한숨과도 같은 노래들이다. 



리트가 흔히 그렇듯이, 

화자의 성별이 달라지면 또 새롭다. 

역시 리트 해석에 탁월했던

메조 소프라노 재닛 베이커의 

녹음도 덧붙인다. 





  1. 이 내용은 원래의 시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아마도 대략의 줄거리라고 보시면 되겠다. 원문과 영어 번역은 http://www.lieder.net/lieder/get_text.html?TextId=10032 를 참고하시라. [본문으로]
  2. Matthias Gerne & Markus Hinterhäuser, “Schumann: Einsamkeit”, Harmonia Mundi, 2017. 유튜브나 인터넷에서는 음원을 아직 찾을 수 없지만, 주옥같은 슈만의 가곡들을 만날 수 있는 음반이다. 2004년의 슈만 녹음보다 원숙해진 괴르네의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인 앨범. [본문으로]

스튜디오 녹음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훨씬 더 열정적이고, 
훨씬 더 도전적인 1964년 TV쇼 라이브. 

싱글 버전이 어쩔 수 없이 
이건 1964년의 사운드로군, 싶다면
이 라이브 버전은 조금만 다듬어도
21세기인 지금 듣기에도 
충분히 현대적으로 들릴 법 하다. 

독립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가사를
스튜디오 버전보다 훨씬 더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레슬리 고어의 열창, 
무려 50년이 넘었어도 
(무한반복으로 듣고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난데 없이 Santo & Johnny의 Sleep Walk에 다시 꽂혀

50, 60년대 음악들을 돌아보며 느끼는 건, 


내가 80년대 후반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여느 학생과 마찬가지로 

영화 “더티 댄싱(1987)”과 사운드트랙의 

자장 안에 있었던 탓에, 


그리고 같은 해 나온 리치 발렌스의 전기 영화

“라 밤바 (1987)”의 OST까지도

테이프가 늘어나 듣기 힘들 때까지

닳도록 들었던 까닭에, 


이 음악들이 사실은 나보다 앞선 세대의 것임에도

마치 고향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최초의, 

또는 최초에 가까운 경험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꿈꾸듯 나른한 동시에 관능적이며, 
시공간을 넘어 당신마저도 까맣게 잊었던 
먼 옛날의 추억까지 소환해내는 마법 같은, 

1959년 발표 이래 
수십번도 더 커버 곡으로 연주되었고, 
이제는 70주년마저 멀지 않았건만
내게는 하나도 낡지 않은, 

언제나 들어도 새로운 이 곡을, 
Better Call Saul이라는 TV시리즈에서 
오랫만에 만나다. 

그리고 오후 내내, 
50년대 60년대 록큰롤과 함께 시간을 때우다. 
그 때운 결과물들은 찬찬히 공개하기로 하고, 

아래는 조금 음질이 깨끗한, 
스튜디오 녹음 음원. 


 



단순하다. 
촌스럽다. 
유치하다. 

하지만 
영화 Spy (2015)에서 
잠깐 들은 (혹은 본?) 이 노래는, 
엄청나게 인상적이고 중독적이어서
기어코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을 
검색창으로 이끈다. 

혹은,

이제 내가
왜 어르신들이 신나는 트로트를 
즐겨 듣고 부르시는지, 
왜 고속버스의 춤사위가 
그리도 촌스럽지만 매력적인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나이가 
된 것인지도. 


ps.
노래를 곰곰히 듣고 있다보면, 
2007년 드랙 퀸 복장의 
베르카 세르두쉬카라는 이름으로
유로비전 컨테스트에 등장해 2위를 차지
우크라이나 코미디언, 성격파 배우이자 가수,
안드리이 미하일로비치 다닐코 
(Andriy Mykhailovych Danylko)의 노래는,
그저 싸구려 취급하기에는 
녹록치 않은 내공이 담겨있다. 

닥치고 음악과 춤, 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쉽고, 간명하며, 반복적인 리프레인과, 
무엇보다 쉽게 따라할 수 있고 
따라하고 싶은 안무야 말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강남스타일까지 아우르는 
댄스 음악의 매력이 아닐까. 
  



안녕, 활기차고 행복한 도시여 안녕, 

말은 숨을 씩씩거리며 발로 땅을 차고, 

이제 담담하게 떠남을 받아들이네. 

지금껏 그대에게 슬퍼하는 모습 보여준 적 없기에 

이별의 순간 역시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리라고.[각주:1] 


떠나는 것은 영혼이 젊은 자의 숙명.

미지의 세계가 환영해줄테니,

그러니 슬프지 않게, 

씩씩하게, 

안녕, 

안녕. 



이런 작별의 인사라면, 

그리 쓸쓸할 것 같지 않다.


슈베르트 사후에 “백조의 노래”로 

한 데 묶여 출판됐지만 그 노래들이 연가곡처럼 

서로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연가곡처럼 포장된 건 다분히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출판업자의  기획이었으나,

다만 마지막으로 한번 운다는 ‘백조의 노래’에

하필이면 고별(Abschied)이 포함된 건

아무래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마이르호퍼(Mayrhofer)의 시에 곡을 붙인, 

마치 기나긴 탄식과 한숨과도 같은 

또다른 고별(Abschied), D.475과는 달리

이렇게도 유쾌한 작별인사라니. 

이토록 사랑스러운 

세상에의 고별을 남길 수 있는 건, 

아마도 슈베르트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그토록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있었을 법한 일.  




  1. Ludwig Rellstab이 쓴 원시의 1연을 풀어 써 보았다. 독일어 원문과 영어 번역은 lieder.net 참조. http://www.lieder.net/lieder/get_text.html?TextId=13375 [본문으로]


오랫만에 전율이 일었다.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래퍼’인 

케이트 템페스트.


구글에서 가사를 검색해야 겨우 

노래의 뜻을 반쯤 알까말까 한 영어실력이 

한탄스럽기는 하나


고유한 리듬감이 살아있는, 

영국 남동부 액센트로 전해주는 

싯귀들이 인상적이다. 


레너드 코언 이후 음악을 듣고서 

시집을 살까 고민하게 된 

첫 아티스트다.


지난 해 나온 앨범 Let Them Eat Chaos의 

뒤늦은 발견. 





마침내 아쉬케나지 덕분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도 좋아하게 됐다. 

1번부터 5번까지 수십번은 들었건만, 
다른 협주곡들에 비해 정이 잘 안 가던, 
무녀리 같은 협주곡 2번. 

너무 소박하거나 담백하지 않게, 
조금은 낭만주의적 해석이 곁들여진 연주 덕에
아직 충분히 베토벤스럽지 않은[각주:1] 이 곡이
당당하면서도 유쾌한 작품이 됐다.

시대연주가 대세가 된 요즘으로서는 
약간 올드한 해석으로 들리지만, 
 그래, 베토벤은 이런 맛이지, 하게끔 하는 연주. 

관객을 휘어잡는 마력은 없지만
늘 정확하고 악보에 충실한, 
설득력 있는 해석을 보여주는 하이팅크. 
그가 지휘하는 런던 필이기에 더욱 신뢰가는 연주다. 



  1. 앞선 출판번호(Opus number)로 악보가 발행된 1번 협주곡보다 10년쯤 전인 1787년에서 1788년 사이, 그러니까 베토벤이 17살에서 18살 사이 작곡된 협주곡. 이후 작품들에서 보이는 드라마틱함의 단초는 눈에 띄지만 그것을 어떤 형태에 담을 지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듯한 느낌이다. [본문으로]


1725년에서 1730년 사이 작곡된 

바흐의 건반 파르티타 4번, BWV 828의 아리아는, 

비슷한 시기(1727년) 초연된 

마태수난곡 BWV 244의 아리아, 

“Gebt mir meinem Jesum wieder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를 

꼭 닮았다. 


늘 듣던 것에서도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것, 

나른한 일요일 오후 음악듣기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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