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곡우(穀雨). 

이맘 때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 했다. 


2

왕가위의 “동사서독”(1994)을 

십 몇 년 만에 다시 꺼내 본 까닭은

‘곡우’라는 챕터가 있다고 기억했기 때문이지만

경칩과 입하, 백로와 입추에서 다시 경칩, 

끝까지 본 뒤에야 


아아, 

기억이란 얼마나 헛된 것인지. 


3

아무려나 이제 보름쯤 뒤면 입하(立夏), 

여름의 문턱. 


이때 쯤이면 쌀밥을 뜻하는 

이팝’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입하 무렵 꽃이 피기 때문이라는 설을 지닌

이팝나무가 꽃을 피울텐데, 


엊그제까지도 별 소식이 없던 새순에

드디어 초록이 돌기 시작했다. 



마치 죽은 듯 흙빛이었던 새순이

붉은 피가 도는 듯 적갈색으로 변하고, 

하루이틀 사이 물이 오르며 

초록이 터져나오는 과정을 아침저녁 살피다보니,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 생명이구나, 

싶다.


4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이런저런 식물들의 삶을 지켜보는 재미, 

새로운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조그맣게 꽃자리에 

달리기 시작한 매실을 보고 나서야


열매는 꽃이 진 자리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이라는 허물을 한꺼풀 벗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릇 덧없이 지는 꽃은 없는 것이니. 



5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은

무지한 사람인지라, 


해당화라 하여 얼른 사온 해당화는

알고보니 서부해당화, 꽃사과의 일종이었고

(꽃도 樹形도 아름다워 후회스럽진 않지만),


조팝나무 두 그루 사이에 한 그루를 더 심으려

가져온 식물은 왠지 나뭇잎 모양도 다르고

무엇보다 조팝나무는 품종에 관계없이

잎이 어긋나기 마련인데

이 나무는 마주나기로 나고 있는 것이 수상쩍었는데,

꽃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식물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일까 답답해하다, 


몇 년 전 사놓고 까맣게 잊고 있던

“나뭇잎도감”(이광만, 소경자 지음, 나무와문화연구소, 2013)을 

서가에서 찾아내 

‘마주나기’와 ‘톱니모양’ 항목과

인터넷을 교차검색해보니,


아마도 

‘꽃댕강나무’인 모양.


인터넷에서 본 꽃은 충분히 탐스러워, 

꽃이 필 날을 또 기다리게 된다.  


6

아닌 게 아니라, 

이 수많은 나무며 꽃이며 

요즘은 그래스류와 허브류까지, 


해마다 새로 나오는 원예종과 개량종까지 

농원에서도 정확한 이름을 알기가, 

또 안다 해도 이 즈음이면

하루에 수많은 손님들을 받으며 정신없는 가운데 

정확한 묘목을 건네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어서,


그래서 해당화로 알고 가져온 나무는

알고 보니 서부해당화, 

중국 서부에서 자라는 꽃사과의 일종으로

중국에서는 꽃사과를 일반적으로 

해당화라 부른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주 온다며 농원에서 얹어 준 

꽃 화분 하나가 

장미매발톰꽃이라는, 

매발톱꽃의 서양 원예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결국 이름없는 꽃은 없고

꽃이란 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는 걸

책에서 배운 지 수십 년 만에야 비로소,


그렇지, 그런 게로군

무릎을 치게 된다. 


7

곡우가 지나면 

이제 나무를 심기는 애매하고, 

아마도 텃밭에 식용작물을 심어야 할 터. 


입춘에 시골로 이사를 와서 

우수와 경칩, 춘분과 청명을 지나 곡우에, 

비내리는 곡우에 이 글을 적는다. 


그리고 곧, 

봄의 초입(立春)에서 

여름의 초입(立夏)으로.


ps.

그러고 보면 

“동사서독”의 영어 제목인

Ashes of Time은 어쩌면 영화에도, 

또 이 글에도 더 잘 어울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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