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트는 브런치 포스팅을 위해

2021.10.18 수정되었습니다.

 

*

 

1

슬픔으로 말을 잃은 이에게 

음악은 때때로 작지 않은 위안,

 

그러나 어떤 슬픔은 

설령 삶이 다한다 한들

닳아지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돌처럼 단단히 굳어지는 것이어서,

 

(하기는 어쩌면 그나마 시도 때도 없이 

일렁거리고 출렁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언제라도 눈물이 충분하지 않은

그런 종류의 슬픔도 있는 것이어서,

서툰 위로 대신 침묵이 나은 법도 

있는 것이어서,

 

2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다,

 

요한 파헬벨의 이 곡은

1683년 출판한 건반악기를 위한 작품집

⟪Musicalische Sterbens-Gedanken

(죽음에 대한 음악적 사유)⟫에

다른 세 곡과 함께 실렸다고 여겨지는데

(작품집 자체는 현재 망실됐으나

후대의 복원에 의하면 이 곡은

거의 확실히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도 같은해 9월 역병으로 잃은

부인과 아이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지어진 제목이 아닐까, 추정된다. 

 

3

Memento mori, 

누구나, 나와 당신을 포함해 

누구나 마땅히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문구는

이제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인용되면서

충분히 진부해졌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을 더 잘 이해하고 

덜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안톤 바타고프가 연주하는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을

듣다보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아가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한번쯤

겸허히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4

하지만 이제 (어쩌면) 당신도 

작품을 들어 알게 되었다시피, 

D장조의 이 곡이 노래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슬픔 만은 아니다.

(확실히 작품집에 포함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두 곡 역시 

단조가 아닌 장조다.)

 

물론 이 곡은 사랑하는 이들을

느닷없이 잃은 사람의 애가(哀歌)이겠으나,

어쩌면 비탄과 눈물이라기보다는

천상에서의 지복(至福)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와도 같은 것,

 

이별도 두려움도 없는,

나아가 고통도 쇠락도 초월한 세계,

안톤 바타고프가 앨범 속지에 쓴 글처럼,

이 음악은 죽음과 

죽음 너머에 대한 명상이자

죽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준비요,

배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5

파헬벨의 원곡은

주로 오르간으로 연주되게끔 지어진, 

‘코랄과 8개의 파르티타’이다

(주제와 8개의 변주, 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다).

 

바타고프는 2015년 출반한 

같은 제목의 음반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는데, 

아마도 요한 고트프리트 발터가 

편곡했다고 알려진, 

코랄과 5개의 변주곡 버전인 듯하다. 

(각각의 악보는 imslp.org에서 구할 수 있다,

요한 파헬벨의 악보, 발터의 악보.)

 

전체 악곡은 단순한 편으로

먼저 두 개의 악절로 된 코랄(주제)은

네 개의 성부(voice)를 위한 것인데,

첫번째 악절은 반복해 연주하며,

그리고 두번째 악절에서는

5도 위인 A장조로 살짝 전조되기도 한다. 

 

이어지는 5개의 변주는,

이를테면 J.S. 바흐의 푸가처럼

복잡한 대위법적 작법이라기보다

(그의 캐논과 지그 D장조에서처럼)

훨씬 단순하고 명료하며 

주제 선율이 잘 들리는 구조로 되어있다. 

 

6

단순한 화성 진행의 무한한 반복과 변주,

그럼으로써 드러나는 멜로디와

음악적 질감의 미묘한 변화,

 

이러한 변주곡의 어법이야말로

영원 속에서의 평온한 삶을

기원하기 위한 적절한 방식이 아닐까.

 

익숙한 선율의 반복을 통해 표현되는

지극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간절히 되뇌는 기도와 같은 것,

그럼으로써 떠나 보낸 이들이 

천상의 지극한 복락(福樂)을 

누리기를 바라는, 

지극한 정성이 담긴 축원과도 같은 것.

 

7

그러나 도대체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슬픔이 다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남아있는 자의 기도가 

완료되는 시점은 과연 또 언제일 것인가.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tum,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다시 말을 잇는다, 

언제라도 눈물이 충분하지 않은

그런 종류의 슬픔도 있는 것이어서,

서툰 위로 대신 침묵이 나은 법도 

있는 것이어서,

 

슬픈 이들이 단지 마음놓고 슬프도록, 

슬프다는 이유로 눈치보지 않도록,

슬픔이 온전한 슬픔이 되도록

그 손 위에 가만히 나의 손을 

올려 놓으며,

 

이제 나는 마땅하게도

파헬벨의 이토록 고요한 슬픔, 

담담한 음악적 애도(哀悼)와 함께

윤동주의 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 ⟨팔복⟩ 전문

 

 

 


J.S. 바흐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두 곡 남겼는데, 

그 중 첫번째인 BWV 262는

파헬벨의 이 작품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가사 없이 남겨진 악보에 후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여 

노래하기도 한다.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Alles Fleisch vergeht wie Heu;

Was da lebet muss verderben,

Soll es anders werden neu.

Dieser Leib, der muss verwesen,

Wenn er ewig soll genesen

Der so grossen Herrlichkeit,

Die den Frommen ist bereit.

 

영역본을 참고하여 대충 요약해보자면,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삶은 여기서 다하지만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얻고

마땅히 받을만한 이들은

위대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

 

이 가사를 알고 나면, 

왜 안톤 바타고프가 앨범에 쓴 글에서

이 ‘다른 세상’에 이르기 위한 

첫번째 관문으로 제시한 것이

파헬벨의 작품 제목을 직역한

 ‘we must die(우리는 죽어야만 한다)’였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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