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면서 삶에 
낙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줄어들기 마련이지만,

어쩌면 이런 것도 낙이라면 낙이랄 수 있을까. 
London Grammar와 Alt-J(∆)의 
발매예정인 새 앨범들을 예매하고선, 
(조금 과장해)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
이미 공개된 몇 개의 트랙을 반복해 듣는 것. 

London Grammar의 Rooting for You와 
Alt-J(∆)3WW는 모두 앨범의 첫 트랙. 
두 곡 모두 인상적이지만 
특히 Rooting for You의 도입부, 
어둠과 정적으로부터 떠오르는 Hannah Reid의 목소리는
아델의 Hello만큼이나 짜릿한 오프닝이다. 
그리고 이 암호 같은 Alt-J의 노래 제목, 
3WW는 Three Worn Words = I Love You, 라고.






Traveling without Moving이 1996년 나왔으니까

이제 20년도 더 흘렀구나. 


얼굴에 살집도 붙고 주름도 보이지만

여전히 풋스텝 만큼은 가벼운

자미로콰이의 새로운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자니

참, 

추억 돋는다. 


새 앨범에 실린 음악들이 

그리 새롭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내 20대와 40대를 가로질러 

한결같은 뮤지션이 있다는 건, 

그리고 그가 여전히 앨범을 내고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다. 



The 2nd Movement of Kuhlau's Piano Concerto, performed by Marianna Shirinyan

이 앨범에 실린 곡들은 여기에서 전곡 감상 가능하다. 



참 낯선 이름과 제목들의 조합이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마리안나 쉬리니안, 

그녀가 코펜하겐 필하모닉과 함께 녹음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쿨라우의 피아노 협주곡. 


출판순서로는 1번이지만, 

사실 10년쯤 전 작곡된 2번이 나중에 출판됐고, 

출판되지 않은 Eb장조의, 

총보가 남아있지 않은 

또다른 협주곡을 포함하면

베토벤의 세번째 피아노 협주곡이 되는 이 작품. 


사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은 선호도를 따지면

5번(“황제”)과 3번, 4번 순서 정도일테고, 

1번은 특히 한국에서는 전곡연주가 아니라면

무대 위에 오르는 일도 드물다. 


먼저 작곡된 2번이 어딘지 모르게 

베토벤의 것이라기에는 조금 촌스럽다면, 

1796년에서 1797년 사이 작곡된 이 작품, 

1번  C장조는 완연히 베토벤다운 피아노 협주곡이다. 

무엇보다 꿈꾸듯 아련한, 

‘멀리있는 연인’[각주:1]을 그리는 듯한 2악장은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느린 악장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또 3악장의 현란한 리듬의 향연을 듣노라면

결국 베토벤을 그 이전의 작곡가들과 

구분짓는 요소 중 하나는

그 과감한 리듬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맨 위의 동영상을 굳이 

베토벤이 아닌 쿨라우의 곡으로 올린 것은, 

마리안나 쉬리니안의 베토벤 1번은 충분히 좋지만

이 곡의 최고 수준의 연주라기에는 좀 모자라고, 

더욱이 쿨라우라는 작곡가를 모르는 사람도 

숱할 것 같아서다. 

 

덴마크의 작곡가로 기록된 프리드리히 쿨라우. 

1786년 태어나 1832년 사망, 

베토벤(1770-1827)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으며 

어린 시절 한쪽 눈을 잃고 징집을 피해

함부르크에서 도망쳐 덴마크에 정착했고, 

화상으로 45살에 사망할 때까지 평생 고생했다.[각주:2]


오페라를 많이 썼고 

피아노를 위한 작품과 소품들까지 

방대한 작품들을 남겼지만

현대에는 아마도 플루트를 위해 쓴 곡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1810년 작곡된 Op.7의 C장조 피아노 협주곡은

심지어 베토벤 협주곡 1번의 ‘패스티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이 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총주로 문을 여는 1악장 도입부부터 

피아노의 등장 이후의 전개도 그렇거니와, 

2악장과 3악장의 짜임새마저도 

베토벤의 협주곡 1번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한다. 

특히 마리안나 쉬리니안의 이 앨범에서처럼

같이 놓고 연달아 들으면 그 유사성은 두드러진다. 

(이게 바로 이 앨범의 존재이유이자, 

음반 녹음에 좋은 기획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似而不同, 

비슷하나 꼭 같지는 않다. 

베토벤 만큼은 아니더라도

쿨라우의 선율을 뽑아내는 능력은 탁월하여, 

특히 쿨라우 협주곡의 2악장[각주:3]

베토벤의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달콤함을 선사한다.


마리안나 쉬리니안의 연주에 관해 말하자면, 

베토벤 1번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이 곡의 최고수준은 아니다. 

안스네스와 우치다, 브렌델과 아라우가 있으니 

어찌 비교 가능하겠는가. 


다만 쿨라우의 협주곡은 활기차고 생기 넘치며 

이 곡의 많지 않은 녹음, 

펠리시아 블루멘탈과 아말리에 말링의 것과 더불어, 

혹은 그들의 것 이상으로 훌륭한 연주다. 

처음 듣고는 감동할 만큼. 


특히 마이클 프란시스(베토벤)와 롤프 굽타(쿨라우)가 

각각 지휘봉을 잡은 코펜하겐 필하모닉과, 

녹음이 그리 쉽지 않은 베토벤 협주곡을 

완벽한 밸런스로 잡아낸 오키드 뮤직의 

레코딩 엔지니어의 조합이 빚어낸 결과물은 환상적이다. 


이 앨범은 영국의 클래식FM에서 

2012년 10월 첫째주 <이주의 앨범>이기도 했다.[각주:4] 

연주도 상당히 좋고, 무엇보다 녹음 퀄리티가 뛰어난 앨범. 



  1. 아시다시피, “멀리있는 연인에게 (An die ferne Geliebte)”는 끊지 않고 이어부르는 6곡으로 구성된 베토벤의 연가곡 제목이다. [본문으로]
  2. 상기 내용과 이하의 내용은 해리엇 스미스(Harriet Smith)의 도이치 그라모폰 온라인의 리뷰를 주로 참고했다. (https://www.gramophone.co.uk/review/beethoven-piano-concerto-no-1-kuhlau-piano-concerto-op-7) [본문으로]
  3. 사실 이 앨범에 관심을 갖게 된 것 자체가 영국의 Classic FM에서 2악장을 듣고부터다. [본문으로]
  4. http://www.classicfm.com/composers/beethoven/album-reviews/beethoven-kuhlau-piano-concertos-marianna-shirinya/ [본문으로]



이를테면 비틀거리는 것이다, 

휘청대는 것이다. 


모든 춤이란

또박또박 걷는 일상의 박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용서하시라)

‘절름거리는’ 리듬에 취해 

땅으로부터 벗어나 하늘을 맛보는 것, 


정신없이 빙글빙글, 아이처럼 

튕겨나갈 듯 돌다가 쓰러지는 것,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당신과 함께. 










그날 이후로 바다는 더이상 낭만적일 수 없다. 

바다는 이제 언제나 상실의 장소, 
분노와 이루지못할 그리움의 장소다. 

그것이 ‘그날’의 사건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곡[각주:1]에 

어쩌면 스러져간 생명들에 대한 招魂이 아니겠느냐며 

내 멋대로 감정이입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타령인 것도 같고 진혼인 것도 같은 가락과 장단에 

기억을, 그이를, 혹은 그들을 불러내는 듯한 목소리에, 

‘같이 갔으나 혼자서 돌아온’, 

‘깊은 곳 끝까지 들어’갈 때는 함께였으나 

돌아온 것은 ‘나 혼자’ 뿐이라는 가사까지, 


아니 꼭 그날의 일이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도 훨씬 막되먹고 못되먹던 젊은 시절의, 

서해 어느 섬마을 바닷가를 마지막으로 두고온 

철없던 사랑과 이제는 잃어버린 사람을 떠올린다 해도, 


울컥, 파도와 함께 밀려드는 건 어쩌면

살아남은 자에게 당연한, 형벌처럼 주어진

슬픔과 죄책감인 지도 모른다. 




  1. 다음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랑노래라고. http://blog.daum.net/crazyturtle/1934 [본문으로]

0

“이 19세기의 ‘의심의 여지 없는’ 인물 가운데 

누군가가 위대하다면 그는 두 배로 위대하다. 

만약 ‘의심스러운’ 인물 가운데 

누군가가 덜 위대하면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라 시대의 탓이다. 

거대한 유산과 길고 긴 과거의 기억을 지닌 

뒤늦은 세기의 탓인 것이다.”

— 알프레트 아인슈타인, ⟪음악에서의 위대성⟫,

강해근 옮김, 포노, 2020, 86쪽

 

1

19세기 중・후반에 교향곡을 쓴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베토벤의 유산과

마주해야 하는 일이고, 

어떤 작곡가든 엄청난 부담 없이

쉽사리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첫번째 교향곡을

(이른바 ⟨운명⟩ 교향곡의 조성이자

베토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c단조로 쓴다는 것은, 

이 유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자

나아가 계승하고 극복하겠다는

담대한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교향곡 1번 c단조(Op.68)를 초연하기까지

스케치로부터 21년이나 걸린

브람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이 파니의 생일 축하를 위해

15살의 나이에 c단조의 첫 교향곡을 작곡한

멘델스존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인 동시에

(어쩌면 그보다 더) 뛰어난 작곡가였으며

이전 시대의 음악을 부활시키는 데 공헌했던

학자이자 악보 편집자이기도 했던, 

특히나 c단조의 첫 교향곡을 포함해

세 곡의 교향곡을 남긴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던 음악가

루이즈 파렝의 이야기다. 

 

루이지 루비오, ⟨루이즈 파렝⟩, 1835 from Wikipedia Commons

 

2

1804년에 태어나 1875년 사망한

프랑스의 작곡가 루이즈 파렝은

재능있는 많은 작곡가들이 그렇듯

어려서부터 피아노 연주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녀가 피아노 뿐 아니라 

작곡 실력도 제법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부모가 그녀의 나이 15살에 

당시 파리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던

안톤 레이하에게 수업을 받게 한다. 

(당시만 해도, 그리고 이후로도 

1870년대까지는 여성이 정식으로 

작곡 수업을 수강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아마도 개인적인 수업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1821년 플루트 연주자였던 

10살 연상의 아리스티드 파렝과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게 되면서

그녀의 경력과 함께 작곡 수업도 잠시 중단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다행스러운 것은,

남편인 아리스티드가 연주 여행과 

연주자로서의 삶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그 삶을 포기하고 파리에 정착해 

악보출판사를 차리고, 

사업적 성공은 물론이거니와

영향력과 평판 역시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루이즈 파렝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에 복귀하고, 

작곡 수업도 다시 받게 된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로서의 삶은 

역시나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서

1826년 외동딸인 빅토린을 낳느라 

경력이 다시 한 번 잠시 중단되지만,

1830년대에 들어서는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명성을 쌓게 되며,

(그녀의 피아노 작품 하나를 두고 

슈만은 ‘매우 정연하고 논리적이며

너무나도 완벽하게 마무리된’ 

작품이라고 호평한 바 있고,

베를리오즈도 그녀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1842년에는 파리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로 임명되어 3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치게 된다.

 

19세기라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것은, 

교수직을 시작한 7년 뒤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현과 목관을 위한) 9중주곡⟩의 성공에 힘입어

남자 교수들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해 

관철시켰다는 것인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적극적인 평등의 요구였다는 점에서도

선구적인 여성이었음을 보여준다.

 

1861년부터 1872년까지 

남편과 함께 (그의 사후에는 그녀 홀로)

라모와 쿠프랭, C.P.E.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과 훔멜에서 

멘델스존을 비롯한 그녀 당대의 

작곡가들까지 아우르는,

피아노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일종의 명곡 선집이라 할 수 있을

⟪피아니스트의 보물(Le Trésor des Pianistes)⟫ 

시리즈를 발간한다.

스무 권의 악보집과 세 권의 부록집이라는 

방대한 작업으로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교육용으로, 연주용으로 사용되었다 전한다.

(그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음악을

연구하고 장려한 학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3

19세기 여성 음악가로서

이처럼 예외적인 삶을 살아낸 것은

당연히 그녀의 실력과 노력 덕분이겠지만

개인적・사회적 배경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시민혁명과 공화정을 경험하고

유럽에서 가장 개화되고 진취적이었던, 

특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에 비하면 

훨씬 더 근대적으로 계몽된 나라였던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나 활동할 수 있었고,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도 이웃한 

보수적인 국가들에 비해 개방되었던 듯하다. 

 

또 개인적으로는 

대대로 궁정을 위해 일한 미술가 집안에서

조각가였던 아버지를 두고 태어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많았으며, 

여성예술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남편의 경력에 그녀가 끌려갈 필요가 없었고, 

정신적, 사업적 지원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좀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편이어서,

작품이 꼭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해 

출판을 ‘강권’하기까지 한 것은

남편 아리스티드였다고도 한다.)

자녀로는 오직 피아니스트가 된 딸 하나,

출산과 육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공정하지는 않겠으나 굳이 비교해 보자면,

로베르트 슈만으로부터 작곡에 대해 

아주 가끔 격려를 받기는 했지만

대체로 ‘어머니와 아내’ 역할을 요구받았던, 

8명의 자녀를 낳고 기르느라 

남편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생계를 위한 연주를 멈출 수 없었던, 

그러느라 결국 자신의 작품을 쓰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클라라 슈만을 떠올려보라.

그러면 루이즈 파렝에게 주어진 조건이

그녀의 경력에 매우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파리 음악원 교수였기에

음악계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고, 

자신의 작품을 연주할 뛰어난 연주자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의 9중주곡 초연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도 함께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원에서는,

교향곡이 그리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장르가 아니었던 프랑스에서

그녀가 쓴 세 곡의 교향곡을 연주할 

교향악단을 구성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했다. 

 

4

1842년 작곡된 1번 c단조, Op.32, 

1845년의 2번 D장조, Op.35, 

그리고 1847년 씌어진 3번 g단조, Op.36.

 

루이즈 파렝의 세 교향곡에 대해

1847년 파리의 비평가 모리스 부르제는,

“처음으로 교향곡들을 쓴 여성일 뿐 아니라, 

다른 허다한 남성 작곡가들이 

자신들이 썼다면 자랑스러워 했을 작품들”

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첫 교향곡의 조성을 c단조로 선택한 것은

루이즈 파렝이 전범으로 삼은 것이

베토벤의 교향곡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며,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의도적으로 

베토벤의 동기들을 인용하거나

혹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변형시켜 사용한다. 

단적인 예로, 베토벤이 교향곡 5번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사용한 짧은 3연음+장음의 

리듬은 세 곡 모두에서 들려온다.

 

색채감이 풍부한 관현악법이나

화성적 접근법은 때때로

멘델스존과 슈만을 떠올리게 하는데,

(특히 1번은 멘델스존에 더 가깝고, 

2번 D장조는 슈만을 상기시킨다)

동시대의 음악가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이전 시대는 물론 당대의 작곡 기법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능숙하게 다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녀의 교향곡들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고전주의적이며, 

1829년 발표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의 영향도 언뜻 느껴지나 

전체적으로는 프랑스적이라기보다

독일-오스트리아적인 사운드에 

가깝게 들린다. 

무엇보다 세 교향곡을 여러 번 듣다보면, 

그녀의 영혼 근저에 자리잡은 것은 

다름 아닌 모차르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밀한 분석이라기보다, 

아래 서술할 세 곡의 교향곡에 대한 

설명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주관적 느낌에 불과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달리 느낄 수 있다.)

 

1번 c단조의 1악장에서

저음 현과 목관이 두드러지는 도입부에 이어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수법이

마치 베토벤을 떠올리게 하고, 

프랑스적으로 우아한 미뉴엣인 3악장에 이어 

4악장은 멘델스존의 교향곡이나 

⟨헤브리디스⟩와 같은 서곡들이 연상되지만,

2악장의 노래하는 선율은 아마도

모차르트나 가능했을 법한 서정이 아닐까. 

(물론 베를리오즈의 백일몽과도 같은, 

몽롱한 환상의 느낌도 선사한다.)

 

2번 D장조의 1악장은

두터운 화성의 총주에 이어 

저음현과 목관으로 천천히 쌓아올리는

도입부가 마치 

베토벤의 7번 1악장과 닮았고, 

그 낭만적 색채는 슈만의 교향곡들이나

훗날의 브람스 1번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3악장의 중간 섹션인 트리오 부분은

베토벤의 9번 4악장의 오마주인 듯하며

4악장은 베토벤 3번의 피날레를 

떠오르게 한다. 

 

두 곡 모두 인상적인 작품들이지만,

내게는 세 번째 교향곡이야말로

작곡기법과 악곡의 구조를 다루는 능력,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솜씨,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거의 완성되었음을 드러내주는

(사랑스러운) 명곡이라 생각된다. 

 

                 루이즈 파렝, 교향곡 제3번 g단조, Op.47 | Mikko Franck가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

 

세 번째이자 마지막 교향곡이 된 3번에서,

루이즈 파렝은 모차르트가 

교향곡 40번과 25번에서 사용한, 

흔히 그가 슬픔과 비애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하곤 했다는 g단조를 조성으로 택한다. 

 

그녀의 1번 교향곡 1악장의 도입부가 

조심스럽고 심지어 소심하게 느껴졌다면,

3번의 1악장 도입부에선 자신감이 전해진다. 

오보에 솔로에 이어 목관과 현이 

차분하게 도입부를 열면, 

붓점 리듬이 돋보이는, 춤곡과도 같은 

 제1주제가  등장한다. 

단순하나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제1주제 덕분에 전체 악곡의 구조도

듣고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만큼

(앞서 언급한 슈만의 평가처럼) 

명쾌하고 논리정연하다. 

 

이어서 2악장은 Adagio cantabile,

 낭만적 색채가 가미된 목가로 시작해

중간 섹션에서는 느린 춤곡을 지나

장송 행진곡풍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종합해

그녀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나간다. 

 

3악장은 멘델스존이 사용했을 법한 

잔망스러움 내지 익살스러움과

베토벤의 이른바 ‘운명의 동기’ 리듬의 

기묘하게 어울리는 악장이며, 

 

4악장은 사실 

앞선 두 교향곡의 피날레 악장에 비해

규모도 작고 길이도 짧으며 

구조상 고전주의에 가까워 

더 진취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화성적 접근이나 관현악법에서

낭만주의적 색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단박에 

듣는 이를 매료시키는 주제 선율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의

유려함과 우아함, 과감함을 통해

그녀가 음악을 구성하는 자신만의 방식, 

 무엇보다 악기들이 ‘노래’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그리하여 이 4악장이야말로, 

내게 그녀의 음악적 영혼의 뿌리는

모차르트가 아닐까, 

짐작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의 g단조 교향곡들 뿐만 아니라, 

파리로 여행을 떠났던 1778년 작곡된

31번 D장조, 이른바 “파리” 교향곡도

파렝의 이 작품과 통하는 바가 있다.)

 

5

동시대 관객들로부터, 그리고 비평가들이나

동료 음악가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건만, 

불행히도 파렝의 교향곡들은 그녀의 사후

거의 100여 년 동안 잊혀졌다. 

 

아마도 19세기 중반 이후에 씌어진

일종의 교향곡의 정전(Canon)의 역사에서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고, 

남성 중심의 음악계에서 

경쟁에 밀린 탓도 분명히 컸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교향곡(또는 대규모 관현악곡)이 결코

프랑스가 사랑하는 장르는 아니었다는 점이

오히려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른다.

 

일례로 루이즈 파렝은 

파리음악원의 교수였음에도, 

그리고 음악원 내에 콩세르 소시에테라는

오케스트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3번 교향곡이 초연되기까지는

2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1849년 베토벤의 교향곡 c단조와 함께

대중 앞에 선보였다.)

 

벨기에의 전기작가이자 비평가 

프랑수아-조세프 페티는 1862년,

이러한 장르를 대중 앞에 선보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자원을 동원하는 것은 

“작곡가에게 엄청난 노력을 요구”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작품에 대해

[...] 특히 프랑스의 대중은 귀를 닫아버”린다고

지적하는데, 

사정이 그렇기에 관객 동원이 보장된 

베토벤, 모차르트와 같은 작곡가의

몇몇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아예 무대에서 청중을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파렝은 3번 교향곡 이후에

대규모 관현악곡을 쓰지 않고,

실내악과 독주곡에 집중한다.)

 

사실 어쩌면 교향곡이야말로 

독일-오스트리아적인,

이탈리아의 서곡(Sinfonia)을 맹아로 

삼마르티니 등이 만들어낸 초기의 형식을

만하임 악파와 C.P.E.바흐가 발전시키고 

하이든이 완성한 후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이어진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 아니던가. 

(대규모 기악곡보다는 오페라와 발레를 선호한 

프랑스는 ‘서곡(Ouverture)’이라는 이름을 

오페라 장르에 각인시킨다.)

 

곰곰히 생각하면 프랑스에서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생상스의 ⟨교향곡 3번 c단조, “오르간”⟩을

제외한다면 언급할 작품이 별로 없다. 

 

생상스의 다른 교향곡들이 있을테지만

거의 연주되지 않는 듯하고, 

베를리오즈가 야외 행사용으로 

관악과 보컬을 위해 작곡한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은 

교향곡보다 대관식 미사곡들을 닮았고,

미완성작 하나를 포함한 

구노의 교향곡 세 곡은 존재조차 희미하며,

비제가 습작으로 작곡한 교향곡 C장조는

목가적인 2악장이 매력적이지만

아주 높은 평가를 받지 않는 듯하다. 

 

또 현재의 벨기에 지역에서 태어나

파리음악원에서 안톤 레이하를 사사하고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1888년)는

20세기 전반에는 인기가 있었으나, 

20세기 후반 음악계의 취향이

말러와 브루크너 등으로 이동하면서

이제 거의 잊혀진 작품처럼 취급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현재의 벨기에 지역 태생의 고세크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씌어진 교향곡을 비롯해

수십 곡의 교향곡 작품을 남겼으며

당대에는 유럽이 찬탄하는 작곡가였다지만, 

지금 그의 이름은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은가.

 

6

그러나 나는 조금 더 상상해 본다.

 

앞서 서술한 그녀 생전의 일종의 ‘행운’, 

 비교적 개혁적인 프랑스 태생으로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었고, 

출산과 육아의 부담이 크지 않았다는

조건들이 어쩌면, 

그녀 사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기억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루이즈 파렝은 1859년

피아니스트이던 딸 빅토린이 사망하자

작곡을 더이상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든든한 우군이던

남편 아리스티드는 1865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 굳이 무언가 작곡을 할 이유도, 

혹여라도 작곡을 했다 해도 

출판할 이유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역시나 공정하지는 않겠지만)

클라라 슈만의 경우와 비교해본다. 

여러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은 했으나

큰 딸 마리 슈만을 비롯한 자녀들이

로베르트와 그녀의 작품과 삶을 알리고

나아가 그녀가 삶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생전에는 작곡하는 데에 걸림돌이었던

로베르트 슈만의 명성이 

훗날 그녀의 작품이 재발견되고

공연되는 것에 도움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두 사람의 사랑, 

그리고 나중에는 브람스까지, 

대중들이 좋아할 로맨스 요소까지 

두루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부부 사이의 일기와 편지를 비롯한

개인사에 대한 자료도 풍부하기에

공연이나 음반 기획자들 입장에서

(파렝보다) 훨씬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녀는 19세기 말 이래

클래식 음악의 뼈대를 형성한

독일 음악 전통의 한가운데 있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나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7

하지만 다행히도 20세기 후반 들어

음악계에서 그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980년에는 비 프리들랜드(Bea Friedland)가 

그녀의 전기를 펴낸다.  

(하지만 지금은 절판돼 구하기 매우 힘들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그녀의 가장 유명한 ⟨9중주곡⟩을 

비롯한 실내악 작품들과

교향곡들이 꾸준히 녹음되고 있다. 

 

파렝의 교향곡 전곡 녹음은

요하네스 고리츠키(Johannes Goritzki)가

지휘하는 하노버 북독일 방송 오케스트라

(1, 3번은 1998년, 2번은 2004년)의 연주,

슈테판 잔덜링(Stefan Sanderling)의 지휘로

브르타뉴 오케스트라의 연주(2013년)로도

만날 수 있는데, 

내게는 고리츠키의 연주가 좀 더

호방하고 담대하게 들린다. 

 

지난해 프랑스의 (여성)지휘자 

로랑스 에퀼비(Laurence Equilbey)가 

인슐라 오케스트라와 내놓은 음반은

교향곡 1번과 3번이 담겨 있는데, 

연주 뿐 아니라 녹음 사운드도 훌륭하다.

(왜인지 모르지만) 1악장을 제외한 

나머지 악장들의 동영상을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중에 3악장의 연주를 링크한다.

(앞서 링크한 미코 프랑크 지휘,

라디오 프랑스 필의 연주도 훌륭하다.)

 

                 루이즈 파렝, 교향곡 제3번 c단조의 3악장 Scherzo. Vivace | 로랑스 에퀼비 지휘, 인슐라 오케스트라
 

 

8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역사적으로 위대한 작품들의 공인된 목록,

이른바 정전(正典, Canon)은 종종

유용한 가이드라인이 되지만

그것을 영원불변의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이 작품들의 목록 안에서만

그 예술을 즐기려 한다면

당연하게도 위험한 일일 터이다.

 

음악의 역사를 풍부하게 해주는 것은 

어쩌면 정전 안에 포함된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작품 만큼이나 

서구의 정전 중심적 역사서술로 인해

잊혀지고 사라져간 작곡가들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이 단지 

당대의 ‘위대한’ 뮤지션들의 음악만이라면, 

그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새삼 생각해본다. 

위대한 것과 별 볼 일 없는 것을 나누려는, 

작품의 위대함을 줄세우려는 시도란 

얼마나 부질없는가. 

 

수많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부담이 된

베토벤의 존재란 물론 각별하지만, 

그러나 이후의 모든 교향곡이 

그의 것과 비교됨으로써만 

가치를 얻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편벽된 것인가. 

 

모든 작품의 평가는

그 작품이 얼마나 완성도가 높은가,

음악적 아이디어의 전개가 얼마나 정교한가, 

또 개념과 기법의 관계가 얼마나 정밀한가, 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볼 때 19세기의 한가운데,

남성 중심의 음악계에서

돋보이리만치 재능을 발휘한

여성 작곡가 루이즈 파렝의 교향곡들은, 

누군가 그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게는 충분히 위대하고 매력적인 작품의 

 한 예시다. 

 

 


i

지인의 조언에 따르면 Louise Farrenc에서

Farrenc의 ‘c’는 묵음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국립국어원의 표기 방법에 따르면

‘루이즈 파렝크’로 적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동안 ‘파렝’으로 통용되어 온 까닭에 

글 제목과 내용에 ‘루이즈 파렝’을 사용했다.

 

ii

글을 쓰면서 참고한 주요 자료는 다음과 같다. 

위키피디아의 루이즈 파렝 항목

톰 서비스, Symphony guide: Louise Farrenc's Third in The Guardian, 2014, 6. 24

Vivien Schweitzer, LOUISE FARRENC on Explore Classical Music

Carolyn Raney, Louise Farrenc, 1804-1875: Composer, Performer, Scholar, by Bea Friedland       

 

나아가 음악이론을 영어로 접하는데 무리가 없다면 

다음의 링크도 참고하면 좋겠다.

지휘자 Joseph Bozich의 블로그

(교향곡 3번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

J. Cameron Stephenson의 파렝 교향곡 비교 분석 논문

(세 교향곡에 대한 간략한 서술과 2번에 대한 상세한 분석)

 


진하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렇다, 

진한 삶의 냄새가 풍긴다. 


어느 알코올 중독자, 

인생의 단맛보다 쓴맛을 더 많이 본, 

삶은 막막하지만 그저 살아내는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을 몰라 그저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막다른 곳에 내몰리는 것은 

누구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톰 역시 마찬가지였을테지만, 

그러나 달리 선택할 무엇도 없는 삶. 


후렴구에 반복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광부들이 부르던 민요 

Waltzing Matilda[각주:1]로 인해 더 인상적인, 


탐 웨이츠의 시그너 송. 

Small Change (1976)의 첫 트랙이다. 










  1. 마치 사람 이름인 듯한 마틸다(Matilda)는 사실 광부들이 어깨에 둘러매던 일종의 가방이다. 그러니 '왈칭 마틸다'란 그들이 일터에 나가면서 어깨에서 데롱거리며 흔들리던 그 모양새에서 나온 제목이다. 노동자의 땀냄새가 묻어나는 이 곡을 탐 웨이츠가 후렴으로 쓴 건 탁월한 선택. [본문으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여전히 신선한 음악적 시도는 계속된다.
그리고 그 중에도 주목할 만한 음악들이 꽤 많다. 
 
통영국제음악제에도 왔었다는 
오스트리아의 타악 연주자 마르틴 그루빙어와 
뮌스터슈바르차흐의 베네닉트 수도원 수도사들의 만남.  

재즈와 월드뮤직, 클래식 등 장르의 구분없이 넘나드는
다양한 배경의 연주자들이 빚어내는, 
흥미로운 음악들. 

(스타급 오보에 주자 알브레히트 마이어도 
가운데 이름을 올렸다.)





10:57초부터 시작되는 2악장의 쉴 틈 없는, 
결코 듣기 편하다고 할 수 없는 긴장감이 인상적이다. 

흔히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서 이렇게 쌓아올려진 에너지는
해소된다기보다는 빗겨간다, 고 해야할 것만 같다. 
마치 그런 긴장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혹은 이 곡의 3악장(17:24에 시작)에서처럼, 
사태의 해결은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니
아예 포기하고 넋두리로 이어가듯이. 

그러나 넋두리란 본원적인 해결이 아니므로
결국 또다른 긴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존재의 불안은 끝없이 이어진다. 
종지이되 종지가 아닌 마지막 음표까지, 
듣다보면 먹먹한 곡이다.  



늘 후회하지 않을 선택, 
페라이어의 바흐. 

악곡의 구조와 디테일을 살리면서도
노래하듯 유연하게 흐름을 만드는 그의 연주
이 음반에서도 빛을 발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프랑스 모음곡을 집중해듣기는 
페라이어의 이 음반이 처음 아닌가 싶다. 
프랑스 모음곡이 바흐의 다른 독주 피아노 작품에 비해
살짝 어렵다고 (다시 말해 귀에 안 들어온다고)
느껴지는 나 같은 이에게 
딱 맞는 음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