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秘儀에 이끌렸고, 

종교적이지는 않았으나 靈性을 흠모해왔다. 

메시앙의 음악이 그려내는 것은

서정적인 서사, 혹은 서정으로서의 서사, 

서사를 넘어선 영성의 파동. 


특정 주제를 등장인물이나 

기타 요소에 연결시키곤 하는

라이트모티프를 사용했으니 서사는 서사인데, 

구체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사가 가진 전반적인 정서가 도드라진달까. 


그러므로 흔히 번역되는 

“아기 예수를 향한 스무 개의 시선”보다

영어권에서 흔히 번역되는

“아기 예수에 대한 스무 가지의 명상”이 

1944년 씌어진 이 작품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메시앙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듣기에 부담없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고, 

특히 15번째 곡인 ‘아기 예수의 입맞춤’은

가 드뷔시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짐작케하는, 

어쩌면 모르는 사람에게는

드뷔시의 작품이라 해도 

아주 어색하지는 않을 정도의,

매우 아름다운 곡.


영국의 피아니스트 조안나 맥그레고르는

엄청난 파워와 섬세함을 겸비해

이 두 시간에 이르는,

복잡하면서도 단정한 곡을 

정말 매끄럽게 해석, 연주해냈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종이

곡에 따라 동시에 울리기도 하고

따로따로 조용히 속삭이기도 하는 듯한, 

하나하나의 음이 종소리와도 같은 

피아노의 음색을 투명하게 잡아낸

녹음도 인상적인 음반 (2010년)



1907년 태어나 1991년 세상을 뜬
터키의 대표적인 작곡가 
아흐메트 아드난 사이군은
(‘러시아 5인조’처럼)
터키의 민속선율과 서유럽의 클래식 작법을 
매우 탁월하게 결합시켜낸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영국 일간지 The Times에 따르면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헝가리의 바르톡,
스페인의 마누엘 데 파야와 같이
터키를 대표하는 작곡가. 

작품의 범위도 상당해서, 
5곡의 교향곡과 2곡의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곡들, 
다수의 실내악곡과 오페라, 
심지어 발레곡까지 손을 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 

그 중에서도 일단 내 귀에 들어온 것이자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연주되는 것이
피아노 협주곡 2곡이니 일단 기록을 남겨본다. 

먼저 1952년에서 1958년 사이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1번 Op.34는
1악장 첫머리부터 서양음악과는 뭔가 다른, 
긴장감 넘치며 동양풍의 분위기가 풍긴다. 
그리고 바로 치고 들어오는 피아노가
뿜어내는 에너지 역시 대단하지만, 
느린 패시지에서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사이군의 솜씨는 탁월하다. 

터키의 민속음계를 활용하면서도
동시대의 경향들에 관심이 많았는지
독특한 동양풍과 현대적인 작법이 
19세기말~20세기초 후기 낭만음악에 익숙하다면
그리 듣기에 어렵지 않은 형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아래 3악장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굴신 오나이의 에너지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이러저러한 배경설명 없이도
작품이 가진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정도.


반면 1985년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조금 더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난해하며

현대적이지만, 

매우 명상적이기도 하다. 

스튜디오 연주로 링크한다.


특히 17분 20초경 시작하는 3악장은

영화음악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선사하며, 

듣기에도 수월하다. 


사실 사이군에 대해 정보도 많지 않고

터키의 민속음악에 대해 분석하기에는

전문적인 지식도 매우 부족하지만

무릇 훌륭한 작품들은 장황한 설명 없이도 

마음에 와닿지 않던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내게 이 두 곡은 

종종 꺼내듣기 충분한 매력을 지녔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Ezio Bosso의 

2016년 음반 “...And the things that remain을 들으며

문득 미니멀리즘이란 

한편으로 푸가의 현대적 변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제시된 주제에 의해 전체 악곡이 규정되는 것, 

제시된 주제에 대한 수학적 변형들, 

주제의 자리바꿈과 역행, 확대와 축소, 

그럼으로써 빚어지는 음악적 칼레이도스코프. 


에치오 보쏘는 이 앨범에서 

바흐의 푸가, 드뷔시의 전주곡과 

자신이 쓴 작품들을 절묘하게 배열해

바흐와 미니멀리즘 사이의 관계를 역설한다. 


스티브 라이히의 작품들, 

이 블로그에서도 한번 다뤘던 

모튼 펠드먼의 작품들, 

미니멀리즘에서 복수의 악기나

혹은 복수의 성부를 사용한 악곡들은

결국 바흐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프로그램

멘델스존, Ruy Blas 서곡

슈만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 교향곡 Eb장조, “영웅”



1. 

안토니오 멘데스의 매력은

상상을 초월. 


다이내믹을 만들어가는 솜씨와, 

크게 선율선을 만들어가면서도 

세심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연주. 


특히 템포 조절이 무척 드라마틱했고

리듬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다. 

베토벤의 3악장은 워낙 춤추는 악장이지만, 

2악장마저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일종의 살풀이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아주 가끔 오케스트라가 이 춤사위를

충분히 좇아가지 못한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훌륭한 연주였다.)


슈만의 협주곡 협연도 깔끔 그 자체로, 

자칫 난장판 직전이 되기 쉬운

사운드를 정돈된 형태로 들려줬다. 

혹시라도 나중에 안토니오 멘데스가

슈만 교향곡을 연주할 일이 생긴다면

꼭 가보리라 생각이 들 정도. 

(교향곡 전곡 싸이클이라면 더 좋고.)


카를로스 클라이버 만큼이나 정열적인

지휘 폼도 인상적. 

(클라이버 이후 최고의 지휘 스타일인 듯.)



2. 

베로니카 에베를레의 바이올린은

매우 음색이 고왔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열일을 해도

딱히 빛은 별로 안 나는 슈만의 협주곡에, 

단정하고 곱되 섬세한 연주가 빛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악보를 보고 연주했는데, 

자세가 구부정해져 보기 안쓰러웠다.

저런 자세로는 커리어를 

계속 쌓아나가기 어려울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것도 잠시, 

앙코르였던 프로코피예프 

무반주 소나타에서는 암보로 훌륭하게, 

자세도 당당하게 연주. 


곱고 예쁘면서도 지적인 그녀의 음색은

어쩌면 독일 레퍼토리 만큼이나

쇼송과 프로코피예프, 

라벨 등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 



3. 

라이브는 역시 

평소보다 집중해 듣다보니

새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존재하는데, 


감히 추측컨대

c단조 교향곡의 저 유명한

‘운명’의 주제는

“영웅”의 2악장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2악장 Marcia funebre는 

3번 교향곡의 조성인 Eb장조의 관계단조인

c단조로 시작한다. 

그러니 3번과 5번은 뭐랄까, 

동전의 앞뒷 면과도 같다.


그리고 그 유명한 ‘따-다-다- 다---’의 

리듬 역시 이 곡의 2악장에서 

덜 성숙한 형태로나마 사용됐다는 점에서, 

운명 교향곡의 명백한 프리퀄이라고나 할까. 





애비 링컨의 Up jumped Spring의 가사를 들여다보다

High hopes was fadin’이라는 구절에서

결국 이 노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일랜드 밴드 Kodaline의 히트 넘버, 

High Hopes. 


But I've only got myself to blame for it, and I accept that now 

It's time to let it go, go out and start again 
But it's not that easy (that easy that easy) 

High hopes, when you let it go, go out and start again 
High hopes, ooh when it all comes to an end 
But the world keeps spinning around


이 주옥같은 가사라니. 

게다가 이 서늘한 보컬은 어쩔 것인가. 

애비 링컨이 황혼의 여유로운 관조자라면, 

코달라인의 화자는 젊은 시절 좌절을 겪은 

그러나 이를 악물고 살아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이가 눈 앞에 그려진다. 


봄비 내리는 날 딱 어울리는 곡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니까. 


I was out promenadin’

And high hopes was fadin’

[...]

Now my heart wants to cheer

Life’s sweet promise here

And love is a lovely thing

[...]

’Cause up jumped Spring... time

So, hello my friend

참으로 독특한 그녀의 목소리, 

착착 귀에 감기는 발성법에 반해

애비 링컨의 앨범을 사모으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남편이기도 했던 드러머 맥스 로치와 

1960년 발표한 명반 We Insist!의 

저항정신이 듬뿍 담긴 주술적인 목소리를 듣고나면, 


우리나라에는 그리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못한

애비 링컨이야말로 재즈 정신의 한 형태를

완벽히 구현한 뮤지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발라드 곡들 역시

예의 그 독특한 음성으로 많이 녹음했는데, 

그녀가 만년에 발표한 음반들에는

사랑 노래 같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그녀의 시각이 담긴 노래들을 많이 담았다. 


이 노래, 

때이른 봄비가 내리는 저녁에 

유난히 귀에 찰떡같이 달라붙는 노래, 

Up jumped Spring은 프레디 허바드의 곡. 


사랑 노래인 듯 인생 노래인 듯, 

이제 젊은 날의 열정과 기대감, 

그 드높던 희망(high hopes)도 엷어지고, 


그저 산책길에 

봄으로 펄쩍, 내던지듯 몸을 맡기고

그럼에도 인생은 아직 달콤한 약속이지, 

사랑이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지, 

나직이 속삭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황혼에 서있는 이의 

여유로운 관조가 아닌가. 


비가 내리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오르고, 

땅에는 물이 괴고, 

이제 비 그치길 기다리는 새싹들에 

가슴이 덩달아 여유로와지는 

2월의 마지막 날, 


애비 링컨의 1991년 발표 앨범

You Gotta Pay the Band를 듣다. 


(참고로 Up jumped Spring에서는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도 함께 했다.)

ps. 

그녀의 젊은 시절, 

We Insist!에서 한 곡. 

All Africa라는 곡으로, 

아프리카의 부족명을 하나하나 

소환해내는 그녀의 목소리. 

이토록 정치적이고도 몽환적인 음악이라니. 



Tim McDonough (narr.), William Ransom (pf.)

 

이런 종류의 퍼포먼스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 낭송인가, 리트의 일종인가, 음악이긴 음악인가. 

 

어쨌든 리햐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을 했으니 

음악의 한 갈래일테고,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알베르트 슈트로트만Albert Strodtmann이 번안한 것이니 

시와도 관계가 깊을텐데, 

 

하여 찾다보니 19세기 말에 유행했던

“멜로드라마”라고 한다. 

살롱 내지는 소규모 극장공간에서 펼쳐지는 

시 낭송과 과하지 않은 ‘연기’, 그리고 악기의 협연

 

당시에는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으로, 

슈트라우스의 작품번호 38로 출판한 이 곡은

그의 교향시보다도 관객의 반응이 좋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대에는 꽤 자주 무대에 올랐던 것 같은데, 

아마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벨 에포크 시대의 

빈과 베를린의 유명한 캬바레의 밤을 수놓았을 법한, 

그런 종류의 문학과 음악의 조화

 

물경 1시간 10분에서 20분 사이의 퍼포먼스이니

영어를 왠만큼 잘하지 않고서는 

평상어도 아닌 시어라 잘 들리지 않겠지만, 

대충 인터넷에서 ‘이녹 아든’의 줄거리를 알고 나면

그래도 꽤 흥미로운 공연이 아닐까 싶다. 

 

연기의 질로 따진다면 위 공연도 수준급이지만, 

이 곡의 최초 녹음인 글렌 굴드와 윌리엄 클로드 레인의

조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1962년 5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코미디를 제외한 Spoken Words/Documentary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면, 

어쩌면 슈트라우스가 이 곡을 쓴 가사는

테니슨의 영시가 아니라 독일어로 번안된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그래서 언어를 알아듣고 말고 여부를 떠나, 

내게는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최고로 여겨진다. 

피아노와 목소리의 완벽한 조화. 

평생을 말(노래)하듯 연기하고, 연기하듯 말(노래)했던

이 성악가의 맺고 끊으며 강약에 변화를 주고

빠름과 느림을 엮어내는 기술은 정말 천의무봉이다. 

 

 

덧붙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다양한 버전의 이녹 아든을 찾을 수 있는데, 

그리스에서 이뤄진 이 공연은 도입부부터

내레이터의 연기까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스어를 하나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가 가진 음악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동영상. 

 

 

물론 전체를 다 감상하기에는 벅찬 작품이고, 

나 역시 아직은 끝까지 동영상을 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19세기말(1897년작) 멜로드라마를

한번쯤 눈요깃거리로나마 감상해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 아닌가.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제20번 A장조, D.959 중

2악장 Andantino (Performed by Alfred Brendel)


슈베르트의 모든 곡 중에서도

오금이 저리도록 가장 시리고 슬픈, 

특히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접한 뒤로는 늘 가슴이 서늘해지는, 

흔히 20번 소나타라고 불리우는

A장조 D.959 2악장의 도입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선율. 


최근에 들은 음반들에서, 

이 주제와 리듬을 변주해 낸

현대 피아노 작품들을 발견하다. 


먼저 피아니스트 Shai Wosner의 연주로

미국 작곡가 Missy Mazzoli가 작곡한

Isabelle Eberhardt Dreams of Piano. 

1980년생의 미시 마촐리의 이 곡은

스위스의 탐험가 이자벨 에버하르트를

기념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D.959 2악장에 대한 헌정이기도 하다. 



또 아이슬란드의 다재다능한 음악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Ólafur Arnalds의 Erla’s Waltz는

D.959 2악장의 선율선을 단순화한 듯 보이며,

에릭 사티 풍의 화성 진행과

오프비트를 사용해

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곡.



끝도 시작도 없고

높이도 길이도 없는 듯한, 


마치 5월의 햇살 좋은 날

벤치에 앉아 그 위를 덮은 나무, 

하나하나의 이파리들이 산들바람에 

몸을 뒤집거나 눕히는 것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시간과도 같은, 


모튼 펠드먼(1926-1987)의 

For Bunita Marcus는 

그런 종류의 음악이다. 


아주 미묘한 피치의 변화, 

강약의 변화, 

얼핏 비슷하게 들리는 그러나 조금씩 다른

악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

70여분 동안 듣고 있다 보면,

조금은 엉뚱하게도 

만델브로트 집합에 의한 

프랙탈 도형[각주:1] 연상된다.


 

맨 앞에 올린 캐나다 출신의, 

지적인 해석과 정확한 테크닉으로 

정평이 나 있는

마르크-앙드레 아믈렝의 연주로 

전곡을 듣는다면 좋겠으나, 

인터넷에 없는 관계로 전곡 연주는

스테판 갱스부르Stephane Ginsburgh[각주:2]의 

연주로 링크한다.

 

이런 음악에 익숙치 않다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ps.

타이틀의 Bunita Marcus는 

미국 위스콘신에서 1952년 태어난

작곡가의 이름이다. 


  1. 프랙탈의 수학적 배경을 알만큼 똑똑하지는 못하나 자기 유사성에 기반한 반복되는 패턴, 그러나 패턴의 반복으로 빚어지는 전체의 형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이 경이로워 기억 창고 어딘가에 부정확한 모습으로 저장해 놓았다. [본문으로]
  2. 벨기에 태생인데,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어 일단 프랑스 식으로 음을 적는다. [본문으로]


중국출신으로 

문화혁명 당시 5년여 노역형에 처해진 바 있으며,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지금은 프랑스에서

연주활동과 더불어 후학들을 키우고 있는

주 샤오 메이의 바흐 연주. 


그녀의 연주는 

지난 해 발매된 프랑스 모음곡 음반으로 

처음 듣게 됐는데 뭐랄까,

마치 60년대와 70년대 명인들이 

연상된달까. 

 

총 연주시간이 1시간 20분 정도,

글렌 굴드(약 1시간)보다 훨씬 느리고

페라이어(1시간 30여분)보다 많이 빠르지도 않은데

무척 빠른 연주로 느껴지는 건, 

음들을 연결하고 패시지를 처리하는 게

매우 대범하고 거침없어 그런 듯하다. 


굴드의 바흐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건반 터치와 음색, 

미묘한 톤 변화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바흐가 떠오르는

신선한 연주다. 


조금 과장하자면 80년대에서 현재까지 이뤄진

바로크 시대의 악곡들에 대한 

해석의 변화란 마치 없었다는 듯이, 

바로크 시대라는 특수성보다

음악이 지닌 보편성을 끌어내는 듯한

해석이 돋보이는 연주. 


1번부터 차례대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2번 4번 1번 6번 3번 5번의 순서로, 

단조와 장조를 번갈아 배열한 것도 인상적. 


6곡 중에서도 잘 연주되지 않는 

4번(에서도 첫 곡 allemande)이 가장 좋았으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어 3번의 연주를 링크한다. 




* Added on 9 Jan. 2018 *


왜 자꾸 글렌 굴드가 떠오르는 지 궁금해

굴드를 다시 들어보고 나서 추가로 적는다. 


좀 더 정확히 비교하자면, 

70년대 녹음된 글렌 굴드의 프랑스 모음곡이

보다 대위법적인 음들의 대조와 병치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데 반해

(그래서 각각의 곡들이 춤곡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에 비해)


주 샤오 메이의 연주는 

각각의 악곡들이 춤곡에서 기원했음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사뿐사뿐

춤추는 발등이 느껴질 법한 강약 조절.

그런 면에서 80년대 이래의

바로크 시대 악곡에 대한 연구를

나름의 해석으로 소화해 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굴드와 한 가지 더 비교하자면, 

굴드는 빠른 곡은 더 빠르게, 

느린 곡은 더 느리게 침으로써

악곡 사이의 드라마틱한 구조를 

돋보이게 하는 반면, 


주 샤오 메이는

빠른 곡은 조금 느리게, 

사라방드와 같이 느린 곡은

조금 가볍고 빠르게 해석함으로써

하나의 모음곡이 틈 없이 이어지도록, 

그래서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보이도록 

연주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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