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은

신념(信念)이 아니라 회의(懷疑)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보다 

내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을

늘 상대방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것. 

상대방의 의견이 더 낫다면 

수용해야 하는 것. 


너무 자주 잊혀지지만

그렇다고 아주 잊지는 말자.


묻거나 태우거나, 

인간은 죽으면서도 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쩌면 

다른 생명체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남은 부분이 모여서 灰가 되고 가루가 되고, 

이윽고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천장(天葬),

그 생태적인 소멸. 


And dark, dark tales on the road again 
And dark, dark tales everywhere 
And dark, dark tales from the Desden den 
Those crooked, crooked stairs


세상은 고해(苦海)고, 

모든 노래는 고해(告解)다.


‘모든’이라는 수사가 지나치다면, 

적어도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dark tales’를 주문처럼 외는 

이 노래라면 정말로 그렇다. 


도대체 드레스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마도,


.



1945년 2월, 연합군은 비군사지역이었던 드레스덴에 

사흘간 무차별 폭격해 도시를 초토화시킨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


더 나쁜 폭력을 굴복시키기 위한 폭력은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Schubert - Abschied, D.475
Matthias Goerne (Bar.), Ingo Metzmacher (Pf.)


3도씩 마치 한숨처럼 하강하는 첫 세 화음, 

잉고 메츠마허의 피아노는 그 도입부만으로도

이 곡의 제목이 고별(Abschied)이라는 걸 웅변한다. 


이윽고 작별의 인사를, 

차마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에 나서는 심정을 

나즈막히 전하는 마티아스 괴르네의 목소리. 


슈베르트는 어떤 면에서 늘 고별을 이야기했지만, 

이만큼 쓸쓸한 작별의 노래는 아마 다시 없을 것이다. 

말러의 ‘고별’을 제외한다면. 


.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같은 목관과 함께 

말러의 고별은, 


늘 저 푸른 지평선을 향해야 하는, 

고향을 그리되 고향에 가지 못하는,

(하기야 고향이라고 꿈에도 그리던 그 고향이 아닐진대,)

떠도는 것이 숙명인 자의 고별.

 

그 마지막 싯귀처럼 그리운 그곳은 

언제나, 어디서나 지평선 너머에 있을 뿐. 


Allüberall und ewig blauen licht die Fernen!

Ewig... ewig...

어디서나 영원히 먼 곳으로부터 푸르게 빛나네, 

언제나... 언제까지나...


Mahler - Der Abschied aus “Das Lied von der Erde (대지의 노래)”

Janet Baker (Ms.), 

Rafael Kubelik &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자전거는 느린 듯 보이지만 

충분히 느리지는 않다.


저물녘 안양천에서 

잠자리 4마리와 부딪히고서야 

걷고 달리는 자연 그대로의 육체 이외의 

도움을 받는 움직임은

자연의 입장에서

침입자의 그것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다. 



말 뒤에 숨지 말라. 


말이란 너무 얄팍하기 마련이어서 

나를 다 가릴 수 없다. 


시선을 돌리려 화려하거나 과격하거나, 

선명한 말들일수록 더욱 경계하라. 


‘사람’을 담을 수 없는 말들에

기대지도 기대하지도 말라.


They wanted know why I did what I did, 

Well, sir, I guess there's just a meanness in this world.
— Bruce Springsteen, Nebraska from <Nebraska>, 1982



왜 그는 평화롭던 거리에 19톤 트럭을 몰고
아무 죄없는 사람들을 덮쳤던 것일까.

니스에서의 ‘테러’가 있던 주말
중고 LP 매대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앨범, 
“네브라스카”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모종의 계시인 걸까.  

그는 여자친구와 차를 몰아 사람들을 덮친다, 
그리고 10명이 사망했다. 
와이오밍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차 앞의 모든 것을 죽이면서 지나갔다.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했던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그저 이 세상이 너무 잔인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앨범이 나오던 1982년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밀려난 이들의 절망감과, 
바야흐로 2016년 
세계화된 신자유주의로 주변부로 밀려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불평등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절망감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합의와 동의에 기초한 사회가 아니라, 
배제와 모멸, 사유화된 권력의 집행으로 이끌어지는 시대.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더 인내할 수 있을까. 
아니, 인내하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세상에, 

땅콩이 땅 속에서 열린다니, 

그래서 땅, 콩, 이라니,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많은 신비로 가득차 있는가.


이제부턴 땅, 콩, 하고 발음하면

詩적인 무언가가 내 마음 속에서 

메아리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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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을 들을 때면 

늘 정지용이 생각난다. 


그,

아이 잃은 아비의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외롭고 황홀한 심사’.


베르나르다 핑크의 목소리는 

고요하나 또한 격정적이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는 듯한, 

흐려진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이름을 쓰고 또 쓰고,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써내려가는 먹먹한 심사.


그러고보면 말러와 정지용의, 

그 안경(또다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눈빛 또한, 

이 세계 너머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 또한,

 

닮았다.  




Bernarda Fink (Mezzo-soprano), 

Tonkünstler-Orchester Niederösterreich 

conducted by Andrés Orozco-Estrada 



No Means No. 

It's that cl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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