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법투쟁. 


이를테면

 “컵라면이라도 먹을 점심시간이라도 달라”며

준법투쟁을 한다는 

어느 버스 회사 기사들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며 문득 궁금해진다, 


이 나라 말고 어느 민주국가에, 

‘준법투쟁’이라는 말이 존재할 것인가. 


준법투쟁이 투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건, 

매일매일의 노동을 하기 위해 

매시간 시간 불법을 저질러야 한다는, 

혹은 불법에 동조해야 한다는 이야기. 


스스로의 노동에 끊임없이, 

늘, 

분노와 자괴감을 동시에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 


당신이 그렇듯, 

또 당신 옆의 내가 그러하듯.


Now I do not know which is falling faster; 

a night or a flower.




봄 밤은 서둘러 찾아온다 

어둠이 떨어지는 속도의 아찔함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지 혹은 더딘지

- What you really want is not going to happen in your life, ever. 

- Oh, really? That's great. It is exactly what I always wanted.


말이란 본디 가진 자의 것. 

그러니 믿지 말라, 

간혹 당신을 위하는 말처럼 들린다 해도

얄팍한 시혜 이상이 아닐 것이니. 




자본과 노동, 상품의 세계화로 

삶을 낭떠러지 끝으로 내몰더니

이제는 멍청함과 아둔함마저 세계화하다니,

인류는 역시 구제불능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과 불운에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대부분의 경우 결국은 찾아낸다. 

그게 진짜 이유든 아니든 그들은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의 분노를 그것에 돌릴 수 있기만 하다면. 


분노를 돌리기에는 추상적인 무엇 대신에

주위의 약한 존재들이 더 적합하다. 

편리하고, 

효과적이며, 

자신들이 그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홉스봄씨, 당신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20세기가 극단의 시대였다면 

이제 다가오는 시간들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극단’이라는 말조차 너무나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 세계에. 



혐오에 대해 혐오로 응답하는 것은 정당한가. 


강자의 약자에 대한 혐오와 

약자의 (그러한) 강자에 대한 혐오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하는가. 


혹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내가 사회적으로 

(남성, 정규직, 이성애자, 비장애인, 기타 등등이라는)

‘강자’의 위치에 있는 탓은 아닌가.


과연 ‘약자’의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수마트라 린통이나 만델링과 호환 가능한, 

구수하면서 짙은 맛이 매력적인 커피. 


실제로 내가 원두를 사는 집에서는 

블렌딩을 할 때 린통 대신 쓴다고 한다. 

린통을 구하려 물어보니 아체 가요면 될까요, 

하는 대답이 나오는. 


사실 이 원두 이름을 들었을 때 어딘가 익숙했던 건

신문에서 자주 보던 반군지역이었기 때문이고, 

의아했던 건 그 지역의 분쟁이 어떻게든 마무리가 된 건가, 싶어서였다. 


아체를 우리나라에서는 Ache로 잘못 적기도 하던데, 

공식적으로 영어 표기는 Aceh인 듯 하다. 


내가 그리 좋아하는 맛은 아니지만, 

브라질과 함께 커피의 진한 향이 맡고 싶을 때면

종종 생각이 난다. 


역시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모카포트 등으로 

빨리 내려 뜨겁게 후후 불며 먹는 게 제 맛이라고 생각. 

향보다 맛으로, 깊은 맛으로 먹는 만큼

다른 품종들보다 오래 두고 먹어도 

풍미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도 장점이고, 

그러다 질리면 더치로 내려도 훌륭한 커피. 


살아남기 위해서,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하는 혹은 할 수 있는 
그다지 별볼 일 없는 아버지(혹은, 어머니!)들의 
위대한 하루하루에 바치는
서사시이자 서정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