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저만의 기준을 고집하다가

시대에 뒤떨어진’ 어떤 것을 비유할 때

갈라파고스를 끌어다 붙이는 것은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실상 갈라파고스의 이제는 멸종한 

수많은 생명체들은 

이미 각자의 계통에 있어서는

진화의 첨단에 있었으며, 

포식자와 피식자가 

서로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하며 

비교적 느린 시간 속에서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던 생명체들일 터인데, 


느닷없이 새로운 곳을 정복하고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싸인

인간들의 방문으로, 

그리고 그들에 붙어 따라온

생전 처음 접하는 쥐들이며 세균들 탓에

적응할 새도 없이 무참히 죽어간 것일 뿐인데. 


그러므로 갈라파고스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의 비유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현재도 전지구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이 미처 적응할 여유도 없는

이 위태로운 변화들과 위협들을 상징하는

사례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자신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 지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면서

그저 편의에 따라 입심좋게 

다른 생명체들을 왜곡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무리한 사냥과 남획으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 오염물 배출과

해양 산성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대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뿐이고, 

이제는 분노도 안타까움도 아닌

그저 슬픔만이 가득할 뿐이다. 


페터 한트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가 유고내전과 세르비아의 인종학살을 

자행한 밀로셰비치에 대한 옹호와

학살에 대한 부인 등으로 논란이 되고있다는

기사를 읽다보니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문학상이라는 게 필요한가. 

문학이 어떤 잣대로 잴 수 있는 것인가. 

문학을 평가하고 시상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는가. 

어떤 문학작품이 과연 작가의 이력이나 

사상과는 무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대개의 질문들은 명쾌한 답이 없지만, 

나는 과연 노벨문학상이 필요한가에 대해

언제나 대단히 회의적이었지만 

올해의 논란을 보면서 이젠 없어져도 상관없을, 

없어지는 게 나을 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강금연 외, “시가 뭐고?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중에서


내가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과연. 


이 문장들은 어쩌면 생애 첫 문장,

평생 쓰고읽는 법을 배울 수 없었던, 

배우지 못했던 이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내보이는 속마음. 


이제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기쁨, 

맞춤법은 좀 틀리더라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자부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좀 고상한 것 아니냐고, 

내가 감히 써도 되느냐는 겸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짜라’는 건지

어쨌든 뭘 쓰긴 써야겠는데 싶어

솔직하게 툭 내던지는 말들 속의 

견고한 리듬감, 


무엇보다 89명의 ‘할매들’의 

삶의 희로애락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글들이다. 


점점 더 치장하고 숨기고 젠체하는

글들에 더이상 끌리지 않는 요즈음, 

참으로 즐거운 독서다. 


친환경 선풍기 보관 커버를 구했다. 

크기도 너비도 여유가 충분하니

어떤 선풍기든 뒤집어 씌울 수 있겠다. 

외양이 중요하다면 하는 수 없지만.

사진이 본질적으로 덧없는ephemeral 것들을

영원 속에 포착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라면, 

음악은 영원에 가까운 어떤 것들을
울리자마자 곧 사라지고 마는 소리들에, 
그 덧없음에 의탁해 풀어내는 예술이 아닐까. 


맛없는 맥주를 마시는 것의 장점은, 

과음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다, 

고로 몸에 편하고 입에 단 것을 주의할 것.


'Soliloqu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CCCXII : 사진, 음악, 이토록 덧없는  (0) 2019.09.20
CCCX : 문명의 아이러니한 운명은  (0) 2019.08.26
CCCIX : 낙관주의자  (0) 2019.08.18

화석연료에 바탕한 의 이용과

그에 바탕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기후 온난화의 위험이

목전에 닥쳤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어쩌면 문명의 아이러니한 운명은

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 

과잉 발전하는 시점에 이르러야 

비로소 문명 자체가 문명을 향한 

가장 큰 위협이라는 점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지도.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넓은 우주에서 

다른 문명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지도. 



만약 스스로 바람직하다 믿는 상태가

언젠가 도래하리라는 믿음을 가진 자를 

낙관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구 상에 인류가 없는 것이 낫고,

(그가 생각하기에 천만다행히도)

인류 자신이 만들어 낸 변화로 인해

그런 시대가 곧 다가오리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믿는 그를 


낙관주의자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리온 레더먼, “신의 입자”, 

리처드 뮬러, “나우 - 시간의 물리학”, 


당대 최고의 실험물리학자들이 쓴, 

그래서 근본적으로 어려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아주 난해하지 않으며 심지어 재미있는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마침내 깨달은 것은, 


내가 우주와 양자물리학에 대한 책을 

더이상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해도 

결국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모든 방정식들과 

입자들의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세계와 시간, 그리고 공간의 의미, 

또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결코, 완전히는 커녕, 조금 더 나은 이해조차도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하기는 남아있는 生을 굳이

물리학 만을 벗삼아 지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Soliloqu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CCCIX : 낙관주의자  (0) 2019.08.18
CCCVII : 예전에는 누가 칭찬을 하면  (0) 2019.07.30
CCCVI : 물은 끈적거린다  (0) 2019.07.23

예전에는

누가 칭찬을 하면 

진짜인 줄 알고

좋아라 했는데, 


나이가 좀 들고보니

누가 칭찬을 하면

진짜가 아닌 줄 알면서도

좋아하게 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