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지 못하네,

아직도 

또 언제까지도


모래가 허물어지는 것이

바람 탓인지 혹은

파도 탓인지

하조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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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우(穀雨). 

이맘 때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 했다. 


2

왕가위의 “동사서독”(1994)을 

십 몇 년 만에 다시 꺼내 본 까닭은

‘곡우’라는 챕터가 있다고 기억했기 때문이지만

경칩과 입하, 백로와 입추에서 다시 경칩, 

끝까지 본 뒤에야 


아아, 

기억이란 얼마나 헛된 것인지. 


3

아무려나 이제 보름쯤 뒤면 입하(立夏), 

여름의 문턱. 


이때 쯤이면 쌀밥을 뜻하는 

이팝’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입하 무렵 꽃이 피기 때문이라는 설을 지닌

이팝나무가 꽃을 피울텐데, 


엊그제까지도 별 소식이 없던 새순에

드디어 초록이 돌기 시작했다. 



마치 죽은 듯 흙빛이었던 새순이

붉은 피가 도는 듯 적갈색으로 변하고, 

하루이틀 사이 물이 오르며 

초록이 터져나오는 과정을 아침저녁 살피다보니,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 생명이구나, 

싶다.


4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이런저런 식물들의 삶을 지켜보는 재미, 

새로운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조그맣게 꽃자리에 

달리기 시작한 매실을 보고 나서야


열매는 꽃이 진 자리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이라는 허물을 한꺼풀 벗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릇 덧없이 지는 꽃은 없는 것이니. 



5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은

무지한 사람인지라, 


해당화라 하여 얼른 사온 해당화는

알고보니 서부해당화, 꽃사과의 일종이었고

(꽃도 樹形도 아름다워 후회스럽진 않지만),


조팝나무 두 그루 사이에 한 그루를 더 심으려

가져온 식물은 왠지 나뭇잎 모양도 다르고

무엇보다 조팝나무는 품종에 관계없이

잎이 어긋나기 마련인데

이 나무는 마주나기로 나고 있는 것이 수상쩍었는데,

꽃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식물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일까 답답해하다, 


몇 년 전 사놓고 까맣게 잊고 있던

“나뭇잎도감”(이광만, 소경자 지음, 나무와문화연구소, 2013)을 

서가에서 찾아내 

‘마주나기’와 ‘톱니모양’ 항목과

인터넷을 교차검색해보니,


아마도 

‘꽃댕강나무’인 모양.


인터넷에서 본 꽃은 충분히 탐스러워, 

꽃이 필 날을 또 기다리게 된다.  


6

아닌 게 아니라, 

이 수많은 나무며 꽃이며 

요즘은 그래스류와 허브류까지, 


해마다 새로 나오는 원예종과 개량종까지 

농원에서도 정확한 이름을 알기가, 

또 안다 해도 이 즈음이면

하루에 수많은 손님들을 받으며 정신없는 가운데 

정확한 묘목을 건네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어서,


그래서 해당화로 알고 가져온 나무는

알고 보니 서부해당화, 

중국 서부에서 자라는 꽃사과의 일종으로

중국에서는 꽃사과를 일반적으로 

해당화라 부른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주 온다며 농원에서 얹어 준 

꽃 화분 하나가 

장미매발톰꽃이라는, 

매발톱꽃의 서양 원예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결국 이름없는 꽃은 없고

꽃이란 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는 걸

책에서 배운 지 수십 년 만에야 비로소,


그렇지, 그런 게로군

무릎을 치게 된다. 


7

곡우가 지나면 

이제 나무를 심기는 애매하고, 

아마도 텃밭에 식용작물을 심어야 할 터. 


입춘에 시골로 이사를 와서 

우수와 경칩, 춘분과 청명을 지나 곡우에, 

비내리는 곡우에 이 글을 적는다. 


그리고 곧, 

봄의 초입(立春)에서 

여름의 초입(立夏)으로.


ps.

그러고 보면 

“동사서독”의 영어 제목인

Ashes of Time은 어쩌면 영화에도, 

또 이 글에도 더 잘 어울릴지도.


꽤 오랜 시간 친구네 현관참에서

화분에 갇혀지냈던 라일락을 얻어와

뜰에 심는다.


아마도 15년은 묵었을 나무의 뿌리는

지상에 펼쳐진 줄기와 가지 만큼이나 

두텁고 육중하여, 


차에서 내려 계단으로 끌고 올라오는 것부터 

땅을 그만큼의 깊이로 파는 것도,

파놓은 구덩이에 앉히는 것도, 

흙을 덮고 돋워주고 밟아주는 것도

다 중노동에 가까운 일. 


그래도 밭에서, 뜰에서 

흙과 함께 일하는 기쁨이라면

내 몸이 힘든 만큼 고스란히 그 결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좁은 화분에서나마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줬던 나무가

더 무성하고 근사하게 자랄 새 집을 

마련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잘 자라도록

수시로 보살피는 즐거움을 얻었다는 것. 


감히 이 단어를 쓸 수 있다면, 

올해 나무 ‘농사’는 이것으로 마무리.




시골로 이사오니 주위에 벚꽃이며 산수유며

개나리에 매화까지 꽃이 지천인데도

봄이 왔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막연할 뿐이었는데,


장을 보러 가니 마침 매대에 돌나물이 나왔고, 

살살 씻어서 조물조물 버무려 점심상에 올리니

드디어 마침내 봄이구나, 싶다. 


아니, 

아예 봄이 온통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느낌, 

이것이 제철에 나는 채소며 과일의 힘이겠거니,

時와 節을 따르는 맛이겠거니.

매주 이메일로 배달되는 신간 목록을 보다보면

이른바 ‘치유’를 테마로 씌어진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진다. 


참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구나, 

누군가에게 위로와 다독거림이 필요하구나, 싶다가도


한 마디 말로 혹은 고작 한 권의 책으로

치유될 수 있는 아픔이란 어떤 종류의 것일까, 

궁금해하다가


아, 나는 내가 좀 더 아팠으면 좋겠다, 

충분히 좀 더 앓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아픔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 때에만

치유라면 치유랄 것이 이뤄지는 게 아닌가, 


혹은 치유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냥 아픔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닌가 싶다가


아, 내가 언젠가 


당신의 짐을 덜어준 적은 과연 있던가, 

당신의 아픔에 대해 말할 자격이나 있던가, 

퍽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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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것은 하루하루가

애도의 나날, 


지난 죽음에 대해서가 아닌

다가올 죽음들에 대하여, 


이미 만연한, 머지않아 파국으로 치달을 

인류에 의한 죽음과 인류를 위한 죽음들, 


그리고 이윽고 (이 또한 머지않은) 

인류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숙명을 피해보려는 온갖 노력이

마침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고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모든 것은 예고되었으나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테고


그러므로 내게 남은 하루하루는 

애도의 나날일 것이니.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인간의 대응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대응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이다.

—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자본주의 대 기후”, 

이순희 옮김, 파주:열린책들, 2016


이제 더이상 이야기를 들려줄,

들려주고 싶은 누군가가 없어서,

오른손이 왼손에게, 왼손이 오른손에게.



비오는 12월 첫날 동네 뒷산에 오르니

산책로에는 떨어진 참나무 잎들이 가득한데, 

아주 자그마한 어린 참나무 한두 그루가

때아니게 푸르른 이파리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이제 해도 짧아지고 날도 추운데 차암—, 싶다가

아하, 큰 나무들이 무성할 때보다 차라리

잎사귀 떨어진 지금이 

어린 나무에게는 숨쉬고 햇빛을 받을 

어쩌면 최적의 시기로구나, 무릎을 친다.


저 푸르름이, 저 씩씩함이 얼마나 갈 지, 

내년 봄에 혹은 여름에 저 나무들이 살아남을 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생태계중요한 것은 개체의 지속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生이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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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말을 잃은 자들에게 

음악은 위안이 되곤 하지만

말을 잃어 슬픈 자들에게

음악은 종종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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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가는 길에는 고작’ 해발 50미터 정도의 

동네 뒷산이 하나 있는데, 

산책로에 따라 가로등이 설치가 안 된 곳이 많아

밤길을 걷게 되면 실로 으스스하다. 


빨리 걷는다면 10분여로 지나갈 수 있고

바로 옆길로 빠지면 아파트 단지가 있어

특별히 위험할 일이야 없지만, 

작은 손전등으로 길을 비추며 걷다 보면

내 그림자에 깜짝 놀라곤 한다. 


딱히 담도 크지 않고 겁도 많은데 

굳이 밤에 이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사람없는 길, 달빛도 느슨한 밤

과연 불빛도 없는 숲이 어떨지 상상하기에, 

조금이나마 맛보기에 적당하기 때문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이룩한 것들에 대해

겸허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인간이 문명으로 이뤄낸 성취는 대단하지만, 

그리고 감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편리함과 이로움을 얻기 위해 치러진,

자연이건 혹은 타인의 노동력이건 간에, 

그 비용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편리함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어떤 것들의 희생이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일 터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을 떠나서, 

사람들이나 불빛이 보이지 않는 숲길은

스산하며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아름답다, 

잠시 손전등을 끄면 내 자신이

마치 숲으로 스며들거나 빨려들 것만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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