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끈적거린다, 


한여름 마루바닥을 딛을 때, 

혹은 쓰레기봉투를 벌리기 위해

개수대 물을 손가락에 살짝 묻힐 때,

아니면 투명한 플라스틱 필름 사이

물기가 있을 때를 상상해 본다면


먼 옛날 바다에서

분자 수위의 결합들이 일어나

단백질이 형성되고 결합되어

이윽고 원시생명체가 태어났다는 것을,


이토록 습하고 끈적거리는 계절에

새삼 그것이 그러했을 거라는 사실을,

누군가의 ‘지적 설계’ 없이도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광주로 문상가는 길,

꼭 그래서 고른 건 아니었으나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


서너 페이지 읽다 쉬고 눈물이 고이고

또 읽다가 멍해져서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 돌리고,


이런 슬픔은 단련되지 않는다,

하필이면 오늘 광주는 

비 소식도 있는데,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각주:1]




  1. 한강, “소년이 온다”의 첫 세 문장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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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를 잡다가 생각하니,

모기 한마리를 잡는 건 어쩌면

그들의 진화에 촉매가 되는 걸 수도 있겠다.


개체에게는 늘 생존이 절대적이지만

종(種)에게는 죽음이 삶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의미가 있지 않은가, 


종(種)을 정의하는 것은 죽음[각주:1],

무릇 모든 진화는 

수많은 죽음을 딛고 이뤄지는 것이다.


  1. 이런 생각이 온전히 내게서 나왔을 리는 없고, 최근 읽은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가 많은 영감을 준 탓일 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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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의 붉은 글자들이 흐릿하다

왜 가장 더딘 파장이 가장 먼저 오는가,

혹은,


글자들이 멀어저가며 나타나는 적색편이

(어쩌면 나의 세계는 팽창하고 있는가),

어쨌거나


이제는 근시안적 삶에서 벗어나

멀리 보며 살라는, 


나이듦이 주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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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나들이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본, 

요즘 것처럼 말끔하지는 않아도

우아하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담긴, 


이런 손잡이가 좋은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나는 

옛날사람이군, 

싶다.



아무래도 나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길고양이에게 밥주는 일은 충분히 자애로우나

그렇담 그 고양이들에게 생명을 위협받을

새들과 더 무해로운 생명체들은 어떡한담 싶다가

또 이렇게 걱정하는 내가 혹여 동정심 없는

냉혈한이 아닌가 싶다가 (정말 그런가 싶다가)

그래도 어째 고양이와 개들에게만 이렇게

관심이 쏟아지는 건 아무래도 생태적인 방식은

아니지 않을까, 인간중심적 사고의 다른 한

방편이 아닌가 싶다가, 그러나 너는 밥 한끼

사료 한 톨이라도 줘 본 적 있느냐 누가 묻는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는 사람 아닌가 싶다가,

매번 걱정만 죽어라 하는 내 자신이 좀 걱정되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싶다가도 아무래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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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리페커리가 어떤 동물인지 찾아보다가, 

어랏, 돼지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런데 페커리과가 따로 있다니 

그럼 돼지과가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돼지과는 없고 멧돼지과가 있는데, 

심지어 우리가 아는 돼지는 

멧돼지과–멧돼지속–멧돼지종의

아종에 불과했다. 


뭐랄까 그동안 돼지가 

훨씬 인간의 삶에 가까와서였는지

돼지가 기본이고 멧돼지가 하위분류인 것으로

오해해왔는데, 


따지고 보면 그렇겠다, 

멧돼지를 길들여 집돼지로 가축화된 것일테니

돼지가 멧돼지의 변종이고 

아종일 수밖에. 


그러나 또 페커리과와 멧돼지과는

우제목/경우제목의 아목인 돼지아목에 속하니, 

이런 인간중심주의적인 아둔함은

나만의 것은 아니겠구나 싶기도. 


참고삼아 적자면, 

멧돼지과의 학명은 Suidae인데

페커리과는 Tayassuidae로 new world pig, 

그러니까 ‘신대륙의 돼지(suidae)’라는 뜻. 

알고 나니 역시 학명은 훨씬 더 

이들의 관계가 정돈된 느낌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영국의 Classic FM을 

습관적으로 맞춘다. 


나의 아침은 실은

어젯밤의 음악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영국은 썸머타임, 

누군가는 자정을 넘기며

이 음악들을 같이 듣겠다. 


인터넷이 열어놓은

이 기묘한 시간의 감각, 

새삼 흥미롭다.

수레국화니 애기똥풀이니 개망초

요즘 주변에 흔한 식물들 

이름을 알아가는 게,


그래서 예전에는

못 보고 지나치던 자리에 피어난

이런 들꽃들을 보는 게

몹시도 신기하고 아이처럼 즐거운데, 


그런데 꽃이 지면 어쩌나, 

꽃이 져도 내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혹은 꽃을 피우기 전

싹이 돋아낼 때의 모습들을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최근 알아가는 

‘이름’들은 알고보면 어떤 식물이 아니라

그 식물의 일부에 불과한 

꽃의 이름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수레국화꽃, 애기똥풀꽃, 개망초꽃, 

그 꽃들이 지면 기억도 사라지겠지, 

싶어져서,


(그리고 또 이미지 검색으로도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꽃들은

도대체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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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참 좋죠? 팝콘 같이 생겼죠? 그래서 이름도 조팝나무예요.


국립수목원에서 딴청피는 유치원생들 관심을 

어떻게라도 모아보려 애쓰던 숲 해설가의 설명에, 

아, 아무리 그래도 저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조팝나무는 노란 꽃술에 좁쌀이 생각나니 

좁쌀이 섞인 밥, 조팝나무이고,

쌀알 같은 기름한 꽃이 맺히는 이팝나무와 함께

5월의 산과 들을 풍년이라도 든 마냥 하얗게 채워가는

아름다운 꽃나무인데, 


조금쯤은 팝콘과 닮았다, 면 모르되

팝콘 같이 생겨서, ‘그래서 조팝나무’라니.


쌀은 이미 옛적에 바닥나고 보리 수확은 달포나 남은 5월, 

들판을 수놓기 시작하는 조팝꽃과 이팝꽃들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나마 허기를 달랬던 것일지도, 

그러면서 희망을 쌓아나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이름을 아는 것만큼

이름들을 지어낸 상상력을 유추해 보는 게

어쩌면 더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조팝나무는,

저리 설명되면 곤란한 게 아닐까, 

생각해보다가 그래서 뭐 어쩔 것인가 싶기도 하다가, 


아, 

뭐 그래도, 

조팝나무는 늘 조팝나무일테고, 


5월이면 늘 아가들 웃음같은 그 꽃들을 볼 수 있을텐데,


하기는 뭐 

이름 따위가 대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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