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댓글을 읽다 보면,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

나는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낙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특히 목사들)이

이미 태어난 생명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그 생명들이 제대로 자라는 데

자신은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길 바란다. 

예를 들어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는지 말이다. 

– 김현경, 아이를 환대하는 사회, 한겨레 2017.11.30(목) 27면

그렇다, 

정말 그렇다. 

이 분의 글을 늘 좋아하지만, 

오늘 아침 읽는 글은

참으로 옳다.

 

낙태의 법적 처벌은 

부모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사라져야 마땅하다. 


세상은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한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미욱하다.)


이를테면, 


1

은행 ATM에서 돈을 꺼내는 것을 깜빡하면

(다행히) 기계가 출금 취소 처리를 한다. 


2

과천에는 아직도 종이로 인쇄된

“벼룩시장”이 나온다. 

신기해서 한 부 집어오고 싶었으나

일행이 있어서 그만,


3

기초자치단체 소식지는 의외로 

볼 만 한 내용이 많다. 

예를들어 신정3동에는 주민들 주도의 

‘마을계획단’이 있고, 

올해의 의제로 ‘제설제 남용 개선’을 

마을 의제로 채택했다고 한다. 

환경을, 그리고 결국은 우리 건강을 위해

염화칼슘 사용은 분명 줄여야 할 일. 

해야할 일을 누군가 하고 있다는 게 반갑다. 


4

언젠가 이런 경험들이 더 모이면 

포스트 하나가 

또 보태질 테다. 



가만히 한 자리에 서 있는 것만큼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시가 발달하고
각종 대중교통 수단이 발달하기 전에
인간은 이동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서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동하려면 자신의 몸을 움직여야 하거나,
최소한 동물이나 마차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이동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보다는 
그 시간에 집 근처의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만히 서있는다는 건 
어쩌면 수도자들의 고행이거나,
군대나 아침조회에서 보듯 권위주의적 훈육이거나
혹은 고문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 

가만히 서 있다는다는 것, 

어떤 생명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마저도. 


그러니 내게, 

그 또는 그녀에게, 

당신 자신에게 가만히 있을 것을

명하지도 기대하지도 마시길.


(2시간의 옥외행사와

왕복 2시간의 전철에서 

서 있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

그래서 지금 선거에 나온

민주노총 활동가들의 과제는 분명하다. 

선거를 활동가들의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것으로 돌려줘야 한다. 

분파적 차별성을 경쟁할 것이 아니라

조합원과 사회적 의제라는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연대를 논의해야 한다. 


현재의 노동문제는 모두 1997년 이후

20년 이상 쌓여온 적폐들이다. 

고작 3년의 임기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들을 해결하려면 노동계급 전체가 힘을 모아 

20년 이상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연합집행부 혹은

모든 분파가 참여하는 상설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장기적으로 대응할 총노동 전선을 꾸려야 한다. 

강신준, “민주노동 선거에 조합원은 있을까”

겨레 2017. 11. 27 (월) 26면


나 역시 최근의 민주노총이

못 미덥지만, 

도대체 누가 후보로 나온 건지

어떤 차이가 있는 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

민주노총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조직이기 때문에

자본론을 번역하기도 했고, 

노동계에 꾸준한 애정을 보여온

강신준 교수의 이 글 일부를 옮긴다. 


이대로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을 접기에는

나는 아직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 배제’를 말하고, 

‘진짜 여성’에 대한 감별 행위가 횡행하는 때 아닌가.

메갈리아 이후, 남성의 전유물로만 생각됐던

호전성과 맹목성을 ‘여성성’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없게 됐으며, 

그 호전성은 어느덧 

‘타자(성)에 대한 혐오’까지도 방불케 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문학은 

어떤 “페미니즘 소설”을 갖게 될까. 


‘생물학적 여성’만을 ‘안고’ 가겠다는 

페미니즘 앞에서

이제 “페미니즘 소설”은 “안도감”을 주는 

자명한 범주가 아니라,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질문의 장소’여야 하지 않을까. 

‘여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진짜 여성’이라는 가상의 범주, 

그 억압의 굴레에 대해. 

– 오혜진, “2017 ‘페미니즘 소설’ 박물지”, 한겨레 2017. 11. 27 (월) 25면


새겨볼 만한 글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남성들이) 페미니즘 내의 논쟁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측면에서. 


승리할 것이 뻔히 보이는 싸움도

이렇게 힘든데, 


패배할 것이 뻔히 보이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지는

요즈음,


승리하든 패배하든

가야할 길은

어떻게든

떠나야 하는 법이다, 


그게

인생이다.

“날개폭이 2미터가 넘는 군함새에게는 

군함새의 깃털보다도 

가벼운 뼈가 있다...”

– 재니퍼 애커먼, “새들의 천재성”, 김소정 역, 까치, 2017. 67쪽


‘깃털보다 가벼운 뼈’, 

라니.


종종 자연 앞에서는, 

그리고 자연을 생생하게 서술한 글 앞에서는

어쩌면 어떤 문학도 명함을 내밀기 

곤란할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깃털보다도 

가벼운, 

뼈,

라니.


이미지 출처: http://ecotopia.hani.co.kr/357678



분노는 강력한 에너지원이다. 

하지만 남도 나도 피폐하게 한다. 

장기화되면 습관이 되고, 

사고를 게으르게 만든다. 

– 권태호,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적이다, 한겨레 2017.11.22(수) 27면


이 문장이 담긴 맥락은 

제목처럼 정치에 대한 평론이나, 

인용한 구절은 우리 삶에 새길 만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분노는 사고를 잠식한다. 


분노라는 에너지에 

너무 의지를 많이 하는 요즈음

때때로 떠올려 봐야 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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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꾼다

나의 滅種을

저녁 무렵 까무룩 졸았던 탓인지, 

비교적 늦게까지 글이랍시고 두어 편 적느라

오랜만에 머리를 썼던 탓인지, 

혹은 글의 내용을 자꾸 곱씹는 탓인지

잠 안 오는 늦가을–초겨울 밤에

십 수 년 전의 그녀 이름을 떠올려보는데

당최 기억나지를 않네.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인가,

아니면 

그 세월들에 기억에도

풀들이 가득 자라난 탓인가. 


오늘은 계속

웃자란 길’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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