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내가 좀 알지, 하는 자세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실에 대해,

일말의 배경지식도 없는 것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조금의 노력도 없이

사실은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그저 관성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있는 나 역시

스스로 똑똑한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를 하지 않을 만큼 똑똑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겠지. 


이런 아이러니라니.

초등학교 꼬마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거주하는 것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눈 오는 날 하루 종일 밖에 세워 놔

눈이 수북히 쌓여있어야 할 차가

아이들 손이 자라지 않는 몇몇 곳을 제외하면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있다는 점이 아닐까. 


리스트의 Chasse-neige, 

 ‘눈-치우기’가 내게는 늘

‘눈-사냥’으로 보이는 까닭. 



세상에는 채식주의자를 위한

이어패드 옵션이 있는 헤드폰도 있다. 

보통의 가죽 패드 대신에

극세사 재질의 패드를 준다고 하는데,


또 한 번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

솔직히 채식을 한다고 해놓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불행히도 내 헤드폰은 가죽패드를 쓴다. 


앞으로 가죽제품은 

사용하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신념대로 산다는 게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 것인지도

다시 한 번 느낀다.


그런데 지금 ‘정규직’은 오히려 하나의 

신분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

하지만 우리는 정규직의 정의에 포함된 

안정성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자격 있는 몇몇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려할 권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어떤 삶도 비정규일 수 없다. 

고용 형태가 어떻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정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원재, “‘정규직, 비정규직’ 그만 쓰면 어떨까”

한겨레 2017.12.6(수) 27면


아무리 봐도 공채시험제도란

한 사람을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점수 몇 가지로 평생의 지위가 결정되는

참으로 이상한 제도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제는

이 제도마저 없어진다면

그나마 공채제도가 보장하던 

경쟁의 공정성마저 무너져버릴 것이라는 데, 

또 정규직이 상징하던 고용의 안정성 역시

무너져버릴 것이 자명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다보니 공채출신 정규직과 

그렇지 않은 경력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일종의 신분관계가 형성되고 갈등이 증폭된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의 삶은 곤고해지고

정규직의 삶 역시 (언제 비정규화될 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린다.


과연 우리에게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우리에게 해결할 의지가 있을까. 


아니다,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그 많은 비정규직들은 

정규직화될 수 있을까,

정규직화한다면

내가 찬성할 수 있을까? 

나의 기득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는 과연 해결할 방법이 있는가, 

해결할 의지가 있는가.


한국 방송의 근본문제는 그동안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시나브로 

민주주의의 적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한국의 방송이 

민주주의의 적이 된 이유는 명하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성숙한 인간의 사회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체제”(아도르노)인데, 

한국 방송은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기는커녕 

국민의 미성숙 상태를 영속화하려는 

조직으로 퇴화했기 때문이다.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하랴. 

리모컨을 들고 한번 돌려보라. 

한국 방송을 보고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김누리, “한국의 방송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한겨레 2017.12.4.(월) 27면


......불행히도 나는, 

“가능하다”라고 답하지 못 하겠다. 

“앞으로는 그럴 것”이라는 답은

더더욱 못 하겠다. 


내 존재는 왜 

내 삶을 이리도 위반하는가. 

내 일상의 삶은 왜 이리도

내 존재를 부정하는가. 


왜 나의 삶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밟고서야
일궈지는가. 

그리고 그런 삶이란
과연 얼마나 행복하며
안전하겠는가.

(미디어오늘)

지옥철 9호선... ‘9호선 노동자’ 생활은 더 지옥입니다 

(한겨레)


지하철 9호선을 
거의 매일 이용하는 내가
9호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



버스에 설치된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교합 치료 광고를 보다가, 


아, 저렇게까지 

이가 딱딱 물린 삶이라니, 

우리 좀 되는대로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 


대저 지상 위에 

완벽한 삶이란 것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틈새 없는 삶이란 얼마나 피곤한 것이냐고.


1

전시주제가 ‘미황사’라니.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오랜만에 찾는 학고재 갤러리.  


2
가는 길에 들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온통 슬픔으로 가득하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 가운데 하나인 
온갖 비인도적 범죄와 사고들, 
아우슈비츠와 체르노빌, 노근리와 윤이상 묘소, 
그리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유바리와 미카사시,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풍경들을
민담의 텍스트와 시적으로 병치해 낸, 
어쩔 수 없이 표제부터 세월호가 떠오르는, 
보는 내내 눈물을 훔치게 되는 비디오 작품이었고, 

MMCA현대차시리즈 2017전,
임흥순의 2채널 비디오 작업 “환생”에서는 
베트남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이 묵직하게 전해진다. 
특히  마디의 말도 없이 
동작과 표정을 담아낸 베트남 여인, 
마치 가해자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던 듯 싶다. 

3
그러나 막상 삼청동에 간 목적이었던 
미황사 전은 그리 인상적이지 읺았고, 

오히려 며칠 전 기사에서 본 
해남을 그리는 마음만 더 커졌다.

스님과 사람들이 기계 없이 
오로지 손과 손으로 쥘 수 있는 도구로만
길을 냈다는데, 
다른 생명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라니. 

4
한참 쉬었다, 
이제 길을 떠날 때가 되었나 보다,

해남 달마산 미황사. 


용기 본체와 그 뚜껑과

용기에 붙어있는 라벨지의 재질이 

각기 다른

플라스틱 병들, 


종이 박스이긴 하나 완충재로 

(사실은 골판지로 대체 가능한)

스펀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포장재들, 


비닐이 붙어있는 종이봉투, 

아예 비닐로 코팅된 종이들,


제대로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상품들의 포장을 하나하나 

외과수술이라도 하듯 해체하다 보면


이렇게 뜯어내는 데 

왜 나의 에너지를 이리도 많이 써야하는지, 

그리고 결국 뜯어내어질 포장을 위해

왜 이리도 많은 에너지를 

제조업체들은 낭비하는지, 


아예 학교에서 잘 버리는 법도 

가르쳐야 될 모양이야, 

그런데 재활용이 아예 안 되는 

저 포장 쓰레기들은 어떡하나,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이른바 잘 보여서 많이 팔리게 하는

상품미학과 그것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다. 

교육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노동착취를

숨죽여 감내하다 고장 난 기계에 짓눌려

스러진 열여덟 살 민호, 

그리고 현장실습생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수많은 민호들이

사회적 존재로서 질량을 얻는 것은, 

하지만 지독히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대학 비진학자들의 산술적인 지분은

30%를 넘지만, 

현실의 도표에서는 정확히 0%다.

– 안영춘, 조금 다른 수능일은 오지 않았다

한겨레 2017.11.30(목) 27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마포대교 남단을 점거하고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건설노동자 같은 사람들, 


그나마 점거할 만한 조직도 없이

날마다 톱니바퀴 아래 신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이민호 군과 같은 현장실습생들, 


계약된 개인사업자라는 이름으로

노동성조차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사회주변부로 밀려난 장애인들,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 이외에는

제대로 된 정책조차 나오지 않은 농민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록

너무 길어 다 옮길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문제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있는 것인가

보지 않는 사람들에 있는 것인가,


혹은

보는 것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게 만드는 

나 같은 위치에 있는 자들,

이른바 ‘언론’에 몸담은 자들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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