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지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모름지기 밥은 한번에 

많이 해야 맛있다. 

그렇게 맛있는 밥을 

기분좋게 지어 먹을 수 있는

그런 명절이었으면, 

누구에게나.



You see? Life.
Yes, life sentence.
So what?
I will do what needs to be done,
even if they hate me or love me.
You have to be solid
so that it makes no
difference what they think.

Read more: https://www.springfieldspringfield.co.uk/movie_script.php?movie=locke
You see? Life.
Yes, life sentence.
So what?
I will do what needs to be done,
even if they hate me or love me.
You have to be solid
so that it makes no
difference what they 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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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ee?

Life.

Yes, life sentence. 

So what?

I will do what needs to be done,

even if they hate me or love me. 

You have to be solid

so that it makes difference 

what they think. 

Locke (2013) directed by Steven Knight


인생이란 결국

우리 각자가 받은 종신형, 

그저 묵묵히 감내하는 수밖에. 

싫든 좋든. 


정크 푸드’라는 말을 만들어 낸, 

또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하다. 


그게 어떤 이유가 되었든

누군가가 먹는 음식에

‘쓰레기’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니. 


특히나 시간이나 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종류의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이고 상처가 될 만한 말이 아닌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심지어 해로운 음식에 대한

경각심을 심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선정적인 언어 사용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나는


좋은 사람도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다,

줄곧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핑계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어떤 간절함도 없이

떠밀리듯 여기까지 이르렀다


언젠가

때가 되면

죽음만큼은 절실해지길

누구든 그렇게까지 비참해지지 말아야 한다. 

무릎을 꿇는 이에게나 그것을 보는 이에게나

그것은 모두 수모와 모멸의 풍경이다. 

– 김종옥, 우리가 무릎을 꿇은 까닭은…, 한겨레 201791327


그만큼 절실한, 

절실해야만 하는 게 서글픈, 

그러나 한편으로 절실한 모든 삶은

존경스럽다. 


(나는 내가 사는 곳에 혹

장애인 학교가 들어온다해도

반대하지 않겠다, 

다짐해본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 시절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고 

그 어떤 관계도 일시적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아마도 내 행복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해 속에 살아간다

때로는 억울하거나

혹은 난감하거나

위기가 지속될 동안에는 문제의 해법을

외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외부의 장막이 걷히면 해법의 칼날이

내부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내부에 준비된 해법이 없으면

기회는 위기로 돌변한다. 

강신준, 적폐청산의 양날과 노동의 갈림길, 한겨레 2017년 9월4일(월) 26면


문제는

내게는 미래를 향한 어떤 비전도, 

욕망도 의지도 혹은 실낱같은 희망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새기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위기는 외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쉽게 끝나지 않을 싸움이 시작됐지만

(그리고 삶은 늘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사실 이 싸움이 끝나는 것 역시 두렵다, 

그때 나는 내 자신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언제나 모든 승리 쉽게 변질되기에 

나는 영원한 패배자이길 바란다, 

무책임하게도.



“세상을 걱정하는 영화는 상업영화이고,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영화는 예술영화입니다.”

– 차이밍량[각주:1]


내가 잘못될까봐가 아니라 

내가 잘못할까봐, 


내가 위험에 처할까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는 데 

일조할까 두려워서, 


온 세상이 불행한데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있어서,


나는 이 세상보다 

내가 더 걱정이다.


  1. 허문영, 인간혐오라는 상투구, 한겨레 2017년 9월 2일(토) 23면에서 재인용.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9325.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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