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12.7cm까지 갈 것도 없이

인류가 지금 크기의 절반 정도로만 줄어들어도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

게다가 인류를 이 정도로 줄이는 데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작아지는 방향으로 강력한 ‘성선택 압력’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 김현경, 상적인 남자의 키, 한겨레 2018.1.25(목) 23면


문화인류학자다운

유쾌하고도 심오한 상상력이다. 

우리는 너무 커다래졌고, 

그래서 너무 많이 먹고 소비하며, 

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탕진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잘 알려진 문구를 誤用하자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사실 수챗구멍, 

특히 욕실의 수챗구멍을 

청소하는 일은 누가 뭐래도

달가울 수 없는 일이다. 


머리카락과 체모와

떨어져나간 살갗의 찌꺼기들과, 

거기에 들러붙은 미생물들까지, 

뭐랄까, 내 죽음 이후 육체가

어떤 변모를 거칠 것인지

짐작되는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일텐데,

바로 그래서 

이사를 앞두고 오늘

수챗구멍을 청소한다. 


내 살점들과 내 체모도 이렇게

불쾌하고 두려운 법인데, 

이사오자마자 물이 잘 안 빠져서

누구인지도 모를 이의 

그것들을 대면해야 한다면

과연 얼마나 역겨울 것인가. 


누군가 사람은 난 자리가 

깨끗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더럽힌 것은 내가 치울 것, 

할 수 있는 한 더럽히지 않을 것, 

그것이 내가 이사를 하면서 

지키고 싶은 나만의 원칙이자, 


내가 지구라는 별에 

잠시동안 거주하면서

떠날 때까지 마음에 담고 싶은, 

몸으로 옮기고 싶은

삶의 자세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사무치는 나날이다. 

일터 괴롭힘이든 아동 학대든 학교 왕따든 성폭력이든 

다수의 침묵과 방조 없인 불가능하단 얘기다. 

살면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피해자가 됐을 때 대응하자며 공부하지만

시급한 건 목격자로서 행동 매뉴얼,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 같다. 

은유, “서울, 패터슨의 가능성”, 한겨레 2018.1.6(토) 23면


원래 글과를 조금 다른 맥락에서

입을 열면 꼰대가 되

입을 다물자니 방관자가 되는 것 같아

고민스러운 요즈음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이 아닌가.

곰곰, 생각해 본다.


[...]

애기들아, 애기들아, 

이 세상 나쁜 것들은 다 잊어불고

부디 좋은 데로, 

한사코 좋은 데로, 

좋은 데로만 가소 와아. 

나는 그저 먼 데서 손만 비비고 있다. 

공선옥, 세상의 ‘애기’들을 위하여

한겨레 2018.1.8(월) 26면


십 수 년 만에 내 머리에

‘비손’이라는 단어를 

조곤조곤 문장으로 소환해 낸, 

작가 공선옥의 글. 


새해에는 신문 지면에서 

만나게 돼

참으로 반갑다, 

그녀의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한참이나 내가 좋아하던)

그 오롯한 마음들도. 

당혹스럽게도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 가운데 하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의 의견과는 다르게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뜻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의견이 관철되게 하려면

부단한 용기로 다른 공동체원을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종종 이 과정은 

매우 피곤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내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반민주로 규정하고 탓하기 쉽다.


나의 뜻에 반하니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룰이 잘못됐다, 는 식으로.


그러나 

내 의견을 반영하는 

유일한 민주주의적 방법은, 


내 의견의 설득력을 높이고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당연히도 

쉽지는 않겠지만.


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보는가.


말을 하는데

말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를 지적하는가.


나는, 당신은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New Year. 


One year closer to hell.


Marvelous.


“저도 나중에 깨닫게 된 건데, 

‘못하는 걸 잘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잘하는 걸 더 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더라고요. 

그동안 우리는, 아이가 못하는 걸 더 잘하도록 해서

팔방미인을 만들려고 애쓰는 교육을 했잖아요. 

[...]

아이가 가진 능력을 끌어내주는 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동안은 ‘얘가 뭘 못하나?’만 신경 쓰면서

지적질을 하고 있었던 거죠.

[...]

“왜 아이들하고 대화가 안 되냐 하면, 

‘내가 이만큼 하면 얘가 이만큼 변할 거다’ 하는 

기대를 하고 대하니까 그래요. 

‘코칭을 배워서 내가 원하는 뭔가를

애들한테 얻어낼 거야’ 생각하면 애들이 금방 알아요. 

‘왜 그러세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하지. (웃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해야 돼요. 

코칭 스킬 좀 배워서 애한테 써먹는다고

애들이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이유남 in 이진순의 인터뷰, 

이진순의 열림: <엄마반성문> 저자 이유남 서울명신초 교장

한겨레 2017.12.30(토) 20면


모든 변화의, 

나아가 혁명적 변화의

성공 여부는 

어쩌면

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처럼 일하는 기계는 없다. 

기계처럼 일하는 사람이 있을 뿐. 

사람 없이 일하는 기계도 없다. 

설치하고, 운용하고, 점검하고, 

보수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개입하지 않으면

기계는 일을 망치거나 사람을 해친다. 

먼 미래에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모든 기계가 이미 그렇다. 

사람 없는 기계는 위험하다. 

한 명 더 필요한 이유다. 

 전치형,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 한겨레 2017.12.22(금) 21면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비용으로 치환되는 사회에서, 

그리하여 기계가 더 저렴하다면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나갈 것인가. 

그 실마리를 이 글에서 찾는다;


사람 없는 기계는 위험하다. 

한 명 더 필요한 이유다.


정당하게 지불돼야 할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사회가

그 결과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슬픔. 


제 값을 치르지 않은 비용은

언젠가 그 몇 배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문제는 지불하지 않은 자와

지불해야 하는 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비용에 대한 부담은

불행히도

늘 약자에게 전가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비용을 줄이는, 

아니, 


사실은

노동이나 환경 등에 대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회피하고 거부하고 떠넘기는 이외에

이윤을 창출할 방법이 없는

자본주의 그 자체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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