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나불대는 게 아니야. 

사람 아닌 악질 살육과 싸우는 이들의 

꿈을 빚는 거야. 

그걸 비나리라고 하지. 

– 백기완[각주:1]


그래도 한국사회에 

이런 어른이 계시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CCXXIV에서 이어지는 생각)


  1. 한겨레 2017년 11월 17일 금요일 별지 (책과 생각) 1면,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의 "두 어른" 소개 기사에서. [본문으로]

한국 꼰대들의 문제는 

지나치게 물질지향적이면서

동시에 꼰대의 기개도 없다는 거다. 

[...]

자기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기성세대는 

어느 시대든 ‘꼰대’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앞세대의 경험은 뒷세대로 전수되어야 하고, 

꼰대는 욕먹을지언정 ‘꼰대질’을 해야한다. 

물론 분야 나름이다. 

나쁜 건 자기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지도 않으면서

닦달하는 꼰대다. 

이들은 그나마 낫다. 

욕이라도 먹기 때문이다. 

최악은 젊은이들 입속 혀처럼 굴며

격려와 응원의 말을 늘어놓으면서 

실은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이다. 

박권일, ‘꼰대에 관하여’, 한겨레 2017.11.16 21면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어투를 흉내내고, 

취향을 따라 잡으려고 애써봐야

세대차이를 극복할 수도 없고, 

‘꼰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 그냥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 

그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나부터, 

나잇값을 하기로. 

최소한 노력을 하기로. 


어느 SNS였는지 신문 칼럼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누군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지문인식이 되는 스마트폰을 사드렸더니

고된 농사일로 무뎌진 손에 인식이 안 되더라던데, 


그러고 보니 단 1시간만 부엌일을 했는데도

스마트폰 잠금이 해제되지 않는다.


그냥 번호를 누르면 되고

또 1, 20분 뒤면 작동될테니

나 같은 한시적 가사노동자가 

딱히 불편할 것은 없으나,


대저 새로운 기술이라는 게 

결국 사회적 약자나 육체노동자를 

얼마쯤은 소외시키는 것 아닐까. 


인터넷 뱅킹이 발달하면 그만큼

오프라인 지점이 줄어드니 

노인을 비롯해 기기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듯. 



‘이 아이가 학대를 받아 죽음에 이르는 동안

사회가 무엇을 했는가? 

학대를 발견하고 조치할 수 있는 순간들을

국가가 몇번이나 놓쳤는가? 

담당자들의 책임인가, 시스템의 문제인가?’

[...]

연민과 분노를 넘어서 대안을 살피는 것, 

이것이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 세상 어디에나 악마는 있다. 

악마에게서 아이들을 보호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도리어 아이를 악마에게 건넨 자는 누구인가? 

– 이관후, 악마의 탓만은 아니다, 한겨레 2017.11.15, 27면


문제를 지적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과연,

문명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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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정리 차원에서

30년이 넘거나 다 돼 가는 

카세트 테이프 30여개와 

20년 묵은 테이프 데크를 내놨더니

10분도 안 돼 연락이 닿고,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달려온다. 


아직도 이런 걸 갖고 있었다는 것도, 

여전히 이런 걸 원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내 학창시절이 담겨있는 음악들이

또 누군가의 청소년기와 

조우할 것이다.


이런,

음악이 이어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생각해보니

그리그 서거 110년이라고

기념하는 행사를 치러 놓고,


윤이상 선생의 

탄생 100주년에는

(1917년 9월 17일생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음악이 어렵다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


어쩌면 올 한해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늦었으나

그래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후회할 것 

뻔히 알면서

왜 이렇게 자꾸 

말을 보태나. 


말을 많이 한 날은 

메스꺼움, 


혀끝에 매달린

욕지기처럼

견딜 수가 없다.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면

저나 여러분이나 덕을 볼 건데

왜 그 싸움을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맡겨버리나요. 

– 정일우 (데일리 존 빈센트) 신부의 말

한동원, ‘내 친구 정일우: 우리 모두의 얼굴이 그곳에 있다

한겨레 2017.11.4(토) 18면 중에서





물고기에게는 떼를 지어 헤엄칠 때 

서로 충돌하지 않게 막아주는 

이른바 ‘측선’이라는 기관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관이 없다. 

그래서 각자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 더 낫다.

–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잡는법”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 주장하는 것만큼

사회적인 동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과도한 확신은 모든 사실을 잠식시킨다. 

의혹 제기와 어떤 사람을 의혹만으로 

‘악마의 얼굴’을 가졌다고 단정짓는 무책임한 행동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영화가 저널리즘을 대신하는 상황의 심각성에 

언론조차 둔해졌다. 

[...]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추적하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무슨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 

결코 볼 수 없게 만든다. 

이라영, 악처, 한겨레 2017.10.26(목) 22면


사실에 바탕해 진실을 파헤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역할이다. 


다만 내가 그동안 진실을 얘기해왔다는 것 때문에

내가 앞으로 해줄 이야기들 역시 

반드시 진실일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오만일 뿐 아니라 오히려

진실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훼손된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나를 빛낼 수 있는, 

나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그럴 듯한 주장들. 


저널리스트가 유명인사가 되는 순간,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진실보다 내가 더 빛나지 않도록, 

혹 내가 추구하는 진실이 너무 그럴듯해

속아넘어갈 허구가 되지 않도록. 



그런데 과연,


그녀가 선량한 척 했다면, 

순진한 척 했다면, 

약한 척 했다면, 

혹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예뻤다면’,

아니면 성 역할이 뒤바뀌어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런 논란이 벌어졌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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