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저만의 기준을 고집하다가

시대에 뒤떨어진’ 어떤 것을 비유할 때

갈라파고스를 끌어다 붙이는 것은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실상 갈라파고스의 이제는 멸종한 

수많은 생명체들은 

이미 각자의 계통에 있어서는

진화의 첨단에 있었으며, 

포식자와 피식자가 

서로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하며 

비교적 느린 시간 속에서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던 생명체들일 터인데, 


느닷없이 새로운 곳을 정복하고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싸인

인간들의 방문으로, 

그리고 그들에 붙어 따라온

생전 처음 접하는 쥐들이며 세균들 탓에

적응할 새도 없이 무참히 죽어간 것일 뿐인데. 


그러므로 갈라파고스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의 비유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현재도 전지구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이 미처 적응할 여유도 없는

이 위태로운 변화들과 위협들을 상징하는

사례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자신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 지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면서

그저 편의에 따라 입심좋게 

다른 생명체들을 왜곡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무리한 사냥과 남획으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 오염물 배출과

해양 산성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대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뿐이고, 

이제는 분노도 안타까움도 아닌

그저 슬픔만이 가득할 뿐이다. 


1

어릴 적의 그 노래들은, 

그러니까 ‘오빠생각’이나 ‘섬집아기’, 

‘나뭇잎 배’ 등

우리가 좋아한 노래들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슬펐을까. 


아니, 어쩌면, 

오랜 세월을 견뎌낸 노래들은,

이를테면 ‘타박네’나 ‘진주난봉가’나 

수많은 전국의 ‘아리랑’들, 

혹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그런 민요들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서늘한 마음을 담고 있었을까. 


2

무릇 기쁨은 노래보다는 춤이 되고

(그러니까, 덩실덩실),

슬픔은 노래가 되기 마련인가. 


이루지 못한 것들과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더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취하는

모종의 형식인 걸까. 


듣다가 부르다가 망연해지는, 

마음 깊이 묻어놓았던 그리움이며 서글픔이며

애틋함과 애절함, 아쉬움 같은 것들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마무리짓지 못한 이야기들은

늘 돌아보고 반추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렇게 (목놓아) 노래를 불러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시절이며 사람이며,

꿈이며, 연정이며에.

 

3

이런저런 생각들을

빌 에반스가 1962년 녹음한 

‘Danny Boy’를 들으며 머리 속에 궁글려 본다. 


4

‘Danny Boy’는 아일랜드의 민요

‘Londonderry Air’의 곡조에 

웨덜리가 가사를 붙인 노래. 


그러므로 아일랜드의, 

이웃 잉글랜드의 탄압과 척박한 토지에 

농사가 망칠 때마다 수없이

수없는 사람들이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역사,

그리고 아마도 섬나라의 갯마을에는 늘 따를 법한 

배타고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노래.


5

위의 연주는

1999년 발매된 “Time Remembered”의 첫 트랙. 

1958년에서 63년 사이 녹음된 음원들로,

척 이스라엘의 베이스, 래리 벙커의 드럼이 함께 하지만

이 트랙을 비롯한 네 곡은  62년 4월 뉴욕에서 

빌 에반스의 솔로로 별도로 진행된 세션이다. 


1983년에 동일한 타이틀로, 

LP로 발매된 적이 있었으나 

곡의 구성이 다르다. 

위키피디아는 이를 두고, 

가급적 빌 에반스를 좋아하는 팬들이

겹치는 곡들 없이 CD를 살 수 있도록 한 

기획이라고 설명한다. 


페터 한트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가 유고내전과 세르비아의 인종학살을 

자행한 밀로셰비치에 대한 옹호와

학살에 대한 부인 등으로 논란이 되고있다는

기사를 읽다보니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문학상이라는 게 필요한가. 

문학이 어떤 잣대로 잴 수 있는 것인가. 

문학을 평가하고 시상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는가. 

어떤 문학작품이 과연 작가의 이력이나 

사상과는 무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대개의 질문들은 명쾌한 답이 없지만, 

나는 과연 노벨문학상이 필요한가에 대해

언제나 대단히 회의적이었지만 

올해의 논란을 보면서 이젠 없어져도 상관없을, 

없어지는 게 나을 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강금연 외, “시가 뭐고?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중에서


내가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과연. 


이 문장들은 어쩌면 생애 첫 문장,

평생 쓰고읽는 법을 배울 수 없었던, 

배우지 못했던 이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내보이는 속마음. 


이제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기쁨, 

맞춤법은 좀 틀리더라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자부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좀 고상한 것 아니냐고, 

내가 감히 써도 되느냐는 겸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짜라’는 건지

어쨌든 뭘 쓰긴 써야겠는데 싶어

솔직하게 툭 내던지는 말들 속의 

견고한 리듬감, 


무엇보다 89명의 ‘할매들’의 

삶의 희로애락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글들이다. 


점점 더 치장하고 숨기고 젠체하는

글들에 더이상 끌리지 않는 요즈음, 

참으로 즐거운 독서다. 


친환경 선풍기 보관 커버를 구했다. 

크기도 너비도 여유가 충분하니

어떤 선풍기든 뒤집어 씌울 수 있겠다. 

외양이 중요하다면 하는 수 없지만.


1
독일, 낭만주의 그리고 숲. 
세 가지 키워드를 조합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적어도 내게는 ‘unheimlich’다. 

기이하고 으스스하고 낯선 무엇. 
집의 편안함과는 정반대의 장소. 

더군다나 슈만이라면, 
누이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우울과 
정신적인 문제들로 평생을 싸웠던 슈만에게라면, 
그런 숲을 연상하는 것도 
퍽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2
대체로 슈만의 피아노 음악들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고
전개나 발전, 혹은 견고한 형식과는 상관없이 
늘 부유하는 듯이 들린다. 

불안과 평온 사이를 정처없이 방황하는, 
닻을 내릴 곳을 찾지 못한 음표들. 
그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줄곧 되돌아오는 듯한, 
끝에서 시작하는 듯한”,[각주:1]

혹은 “언제나 소심한 태도로 쭈뼛거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 하며, 
“민감하고 여린”, 
마치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말하는”[각주:2] 듯한, 

그런 종류의 음악,
어둡거나 애틋하거나. 

3
하지만 1848년에서 49년에 걸쳐, 
그의 정신이 그나마 ‘온전했던’ 시기에 씌어진
“숲의 정경Waldszenen”, Op.82은 예기치 않게 
첫 곡부터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이다. 
‘Eintritt(입구)’로 시작해 ‘Abschied(고별)’로 끝나는, 
목가적이고 소박한 산책. 

그러므로 생각컨대, 
슈만의 이 숲은 아침해가 밝아오는 숲. 
열 보만 걸어 들어가도 어둑어둑한, 
한낮에도 깊은 그늘로 스산한 숲이 아니라,

혹은 한밤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그림자라거나
아니면 나로 인해 놀란 작은 생명체들이 바스락거리며
그 두려움과 공포를 몇 배로 증폭해 내게 돌려주는,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등골이 서늘한 그런 숲이 아니라, 

아침해가 밝아오며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뿜어 내는 안개 사이로 
비추는 갈래진 햇살들에
밤새 내린 서리와 이슬이 새삼 눈부신. 

4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받는다고 하는
g단조의 ‘Vogel als Prophet(예언하는 새)’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슈만스러움 덕분에
이 작품의 당혹스러운 쾌활함에서 비켜나 있고,
네번째 곡 ‘Verrufene Stelle(저주받은 장소, d 단조)’ 역시
비슷한 성격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새는 무엇을 예언하는가?

5
사실은, 어쩌면, 
이 작품은 숲으로의 산책이 아니라
사냥 여행에 바쳐진 곡인지도 모른다. 

숲의 초입을 들어서면 바로 사냥감을 노리는, 
숨어 기다리는 사냥꾼의 매서운 눈길이 
관심을 끌고(2곡 ‘Jäger auf der Lauer’), 

7번째 곡인 ‘예언하는 새’의 불길한 전언을 접하고 나면
개선을 알리는 듯한 ‘Jagdlied(사냥의 노래)’가 
Eb장조[각주:3]로 숲을 울린다. 

그러므로 어쩌면 저 새소리는, 
어쩌다 보니 사냥의 희생물이 된 동물의 
처연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인지도.

홀로 피어난 꽃들(3곡 ‘Einsame Blumen’)을 살피며
귀신 들린 곳(4곡)을 지나
이윽고 익숙한 풍경들(5곡 ‘Freundliche Landschaft’)
그리고 아마도 지난번 사냥에도 들렀던 
여인숙(6곡 ‘Herberge’)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냥의 여정. 

6
이 곡에 대한 정보를 찾다보면 
하인리히 라우베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다 .
그의 “Jagdbrevier(사냥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인데, 
절반 정도만 맞는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가장 신뢰받는 악보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헨레(Henle) 사의 작품 해설(링크)을 보면, 
1849년 1월 작곡을 마치고 이듬해 가을 출판되기 전까지
슈만은 타이틀을 이것저것 바꿔보고
동시대 시인들의 숲과 관련한 시들을 수집했다고. 

그 가운데에는 Liederkreis, Op.35의 시를 쓴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도 있고, 
앞서 언급한 라우베구스타브 파리우스와 
프리드리히 헤벨과 같은 이름[각주:4]이 보인다.

7
앞서 ‘예언하는 새’가 아마도
사냥당하는 존재에게 경고하는지도 모르겠다 했는데, 
실제로 슈만이 수집한 시구들에서 이 예언이란
아이헨도르프의 불길한 경고다.

Hüte dich! Sei wach u.[nd] munter! 
(Take care! Be awake and alert!)

그러므로 흔히 블로그들에 보이듯이
슈만이 정신적인 문제들을 갖고 있어
아름다운 새소리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깃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안감은 의도된 것, 
바로 뒤의 의기양양한 사냥꾼의 노래, 
‘Jagdlied’를 위한 프롤로그인 셈인 것이다.  
조성 역시 g단조에서 Eb장조로, 
‘영웅’[각주:5]의 조성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럴 법하지 않은가.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의 정경”의 전체적인 정조는
간간히 들리는 불협음들에도 불구하고 
밝은 기운이 지배적이며, 
무엇보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악보 역시 극악의 난이도를 보이지는 않으니,
피아노를 웬만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롤랑 바르트의 말마따나 
특유의 내적 요소 때문에 청취보다 연주에 더 적합[각주:6]
그의 음악을 건반 위에서 접해도 좋을 듯. 

9
사실 이 작품은 
“나비Papillons”, Op.2부터 
“유령변주곡Geistervariationene”까지 
슈만의 피아노 음악들 대부분을 담아 앨범으로 내놓은
안드라스 쉬프 덕분에 좋아하게 된 곡이지만, 

서두에 붙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도 
참 좋다고 할 밖에. 


  1. 미셸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La tombée du jour”, 김남주 옮김, 서울:그책, 2015 [본문으로]
  2. 이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슈만에 대한 비판.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이미연 옮김, 서울:시간의흐름, 2018. p.19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당연히 Eb장조는 ‘사냥’의 조성이다. 왕족과 귀족들에게 헌정된 수많은 사냥 음악들도 그러하거니와, 고전시대 이후 이 조성은 트럼펫과 호른의, 눈부신 금관의 조성이 아니던가. [본문으로]
  4. “Meanwhile, Schumann experimented with alter􏰀 native titles and collected relevant verses from sylvan poems by contemporaries – Joseph von Eichendorff, Friedrich Hebbel, Heinrich Laube, and Gustave Pfar􏰀􏰀rius – for possible use as mottos” [본문으로]
  5. Eb장조를 베토벤의 “에로이카”, 혹은 피아노 협주곡 “황제”와 어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본문으로]
  6.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이미연 옮김, 서울:시간의흐름, 2018. p.191 [본문으로]

사진이 본질적으로 덧없는ephemeral 것들을

영원 속에 포착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라면, 

음악은 영원에 가까운 어떤 것들을
울리자마자 곧 사라지고 마는 소리들에, 
그 덧없음에 의탁해 풀어내는 예술이 아닐까. 


맛없는 맥주를 마시는 것의 장점은, 

과음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다, 

고로 몸에 편하고 입에 단 것을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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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연료에 바탕한 의 이용과

그에 바탕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기후 온난화의 위험이

목전에 닥쳤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어쩌면 문명의 아이러니한 운명은

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 

과잉 발전하는 시점에 이르러야 

비로소 문명 자체가 문명을 향한 

가장 큰 위협이라는 점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지도.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넓은 우주에서 

다른 문명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지도. 



만약 스스로 바람직하다 믿는 상태가

언젠가 도래하리라는 믿음을 가진 자를 

낙관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구 상에 인류가 없는 것이 낫고,

(그가 생각하기에 천만다행히도)

인류 자신이 만들어 낸 변화로 인해

그런 시대가 곧 다가오리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믿는 그를 


낙관주의자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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