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시간 친구네 현관참에서

화분에 갇혀지냈던 라일락을 얻어와

뜰에 심는다.


아마도 15년은 묵었을 나무의 뿌리는

지상에 펼쳐진 줄기와 가지 만큼이나 

두텁고 육중하여, 


차에서 내려 계단으로 끌고 올라오는 것부터 

땅을 그만큼의 깊이로 파는 것도,

파놓은 구덩이에 앉히는 것도, 

흙을 덮고 돋워주고 밟아주는 것도

다 중노동에 가까운 일. 


그래도 밭에서, 뜰에서 

흙과 함께 일하는 기쁨이라면

내 몸이 힘든 만큼 고스란히 그 결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좁은 화분에서나마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줬던 나무가

더 무성하고 근사하게 자랄 새 집을 

마련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잘 자라도록

수시로 보살피는 즐거움을 얻었다는 것. 


감히 이 단어를 쓸 수 있다면, 

올해 나무 ‘농사’는 이것으로 마무리.




시골로 이사오니 주위에 벚꽃이며 산수유며

개나리에 매화까지 꽃이 지천인데도

봄이 왔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막연할 뿐이었는데,


장을 보러 가니 마침 매대에 돌나물이 나왔고, 

살살 씻어서 조물조물 버무려 점심상에 올리니

드디어 마침내 봄이구나, 싶다. 


아니, 

아예 봄이 온통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느낌, 

이것이 제철에 나는 채소며 과일의 힘이겠거니,

時와 節을 따르는 맛이겠거니.

매주 이메일로 배달되는 신간 목록을 보다보면

이른바 ‘치유’를 테마로 씌어진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진다. 


참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구나, 

누군가에게 위로와 다독거림이 필요하구나, 싶다가도


한 마디 말로 혹은 고작 한 권의 책으로

치유될 수 있는 아픔이란 어떤 종류의 것일까, 

궁금해하다가


아, 나는 내가 좀 더 아팠으면 좋겠다, 

충분히 좀 더 앓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아픔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 때에만

치유라면 치유랄 것이 이뤄지는 게 아닌가, 


혹은 치유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냥 아픔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닌가 싶다가


아, 내가 언젠가 


당신의 짐을 덜어준 적은 과연 있던가, 

당신의 아픔에 대해 말할 자격이나 있던가, 

퍽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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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1. 10. 27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

 

 

 

0

The message is this:

You be good. I Love You.

X

— Ted Chiang, ⟨The Great Silence⟩

 from ⟪Elctric Lit⟫, Oct. 20, 2016

 

1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의 

메조 소프라노 수산나 몬카요의 목소리로

피아졸라가 곡을 쓰고 마리오 트레호가 시를 쓴,

“Los pájaros perdidos”를 듣다가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이별을 겪고,

또 언젠가는 궁극의 이별인 

죽음을 경험할 것인 한,

우리는 언제나 상실을 삶 속에서

끌어안을 준비를 해야하는 것 아닐까. 

 

2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우루과이 출신의 베이스-바리톤

어윈 슈로트의 2011년 앨범 

⟨Rojotango⟩에서였다.

https://youtu.be/J_N8h6dKL4I

                              

3

쓸쓸한 회한이 묻어나올 듯 읊조리는 도입부, 

그리고 1분 5초 쯤부터 분위기가 일변하며

참고있던 눈물이 터져나오듯

슬픔이 말이 아닌 몸짓이 되는 순간, 

 

탱고의 강렬한 리듬이라면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 

혹은 당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을까, 

씩씩하면서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배어나오는

대단원으로의 진행의 대비가 인상적인 곡.


4

사실 스페인어를 모르니

“Los pájaros perdidos”가 과연 

‘길 잃은 새’인지‘잃어버린 새’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lyricstraslate.com의 영어번역과 

벅스뮤직에 올라와있는 한글 가사를 참고하자면

perdidos는 상황에 따라 ‘길 잃은’ 새로도,

혹은 젊음이며 환상이며 사랑이며와 같은, 

살아가면서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여전히 못 잊은, 

‘잊고 싶은’ 그대에 대해 노래할 때의 감정에도

공히 적용될 만한 형용사로 보인다. 


길 잃은 새들에 대해 노래하다, 

내가 잃어버린, 사랑하던 모든 것에 대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해 울먹이다, 

그렇게 잊으려 해도 당신 만은 왜 

잊혀지지 않는지 궁금해하다가,

종국에는 잃어버렸던 새들, 

그 기억들이 하나하나 달겨들면서

아, 실은 내가 ‘길 잃은 새’였던 것이로구나

(Soy sóloun pájaro perdido / 

que vuelve desde más allá),

하는 깨달음.

 

5

불행히도 수산나 몬카요의 목소리로는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고

(또 하나의 ‘잃어버림’이라는 점에서 

이 곡에 참으로 어울리는 상황이지만),

앞서 링크한 어윈 슈로트의 라이브 버전과

밀바와 같은 팝가수들이 

남긴 영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들은 것이 

베이스-바리톤의 묵직한,

잔기교보다는 감정의 변화를

굵직한 선으로 표현하는 목소리였다보니

 이렇게 극적인 음악에는

역시 메조소프라노나 알토, 

혹은 베이스-바리톤처럼

저음역대의 노래가 더 잘 어울린다고

느껴진다. 

 

6

그리고 이제 또 새삼 떠올리기를,

 

아침에 뜰에 잠시 왔다 간 

박새 두 마리와, 

지난 해 겨울 초입에 본, 

무리들에서 외따로 떨어져 날던 

그 기러기와,

수 년 전, 십수 년 전, 그리고 

수십 년 전의 그대는

문득 잘 지내고 있는지,

 

내가 잊고 잃어버린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상실이 낯설고 이별에 서툴어

 작별이 작별일 때, 

안녕이 영원한 이별이 될 때

(quando un adiós es un adiós)를 

아직 알지 못하니, 

 

그저 길을 잃은 

또 한 마리,

새일 뿐.

 


0 (reprise)

아마도 내가 21세기 들어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심오하며

쓸쓸하고도 서글픈 소설 가운데 하나일

⟨거대한 침묵⟩의 끝맺음을, 

테드 창은 2019년 ⟪Exhalation(숨)⟫이라는

소설집에 묶어내며 이렇게 바꾼다. 

 

The message is this:

You be good. I love you.

 

물론 이것이 실존했던 회색앵무 알렉스가

연구자이자 친구였던 

아이린 페퍼버그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

“You be good. I love you. 

See you tomorrow.”에

더 가까와진 것이겠지만, 

 

입맞춤의 표시 ‘X’가 사라지면서

화자인 앵무새의 다정함도 

조금 사라져버린 느낌이 드는 것은, 

 

과연 우리가,

이렇게 무서운 속도로 다른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 상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탕진하고 있으면서도 

과연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인류가, 

그런 다정함을 받을 자격이나 있을 것인가, 

싶은 깊은 의문 때문인지도.

       

내게 남은 것은 하루하루가

애도의 나날, 


지난 죽음에 대해서가 아닌

다가올 죽음들에 대하여, 


이미 만연한, 머지않아 파국으로 치달을 

인류에 의한 죽음과 인류를 위한 죽음들, 


그리고 이윽고 (이 또한 머지않은) 

인류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숙명을 피해보려는 온갖 노력이

마침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고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모든 것은 예고되었으나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테고


그러므로 내게 남은 하루하루는 

애도의 나날일 것이니.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인간의 대응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대응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이다.

—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자본주의 대 기후”, 

이순희 옮김, 파주:열린책들, 2016


마리스 얀손스

14 January 1943 ~ 30 November 2019


늘 간결하고 정확한 해석으로, 

어떤 곡이든 그 곡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한 연주를 선사했던

거장 마리스 얀손스,


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는

그가 지휘했던 연주들에 

말로 다 못할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영면을 빈다.


(이 밤은 그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으로

새우게 될 것 같다.)

이제 더이상 이야기를 들려줄,

들려주고 싶은 누군가가 없어서,

오른손이 왼손에게, 왼손이 오른손에게.



비오는 12월 첫날 동네 뒷산에 오르니

산책로에는 떨어진 참나무 잎들이 가득한데, 

아주 자그마한 어린 참나무 한두 그루가

때아니게 푸르른 이파리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이제 해도 짧아지고 날도 추운데 차암—, 싶다가

아하, 큰 나무들이 무성할 때보다 차라리

잎사귀 떨어진 지금이 

어린 나무에게는 숨쉬고 햇빛을 받을 

어쩌면 최적의 시기로구나, 무릎을 친다.


저 푸르름이, 저 씩씩함이 얼마나 갈 지, 

내년 봄에 혹은 여름에 저 나무들이 살아남을 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생태계중요한 것은 개체의 지속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生이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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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말을 잃은 자들에게 

음악은 위안이 되곤 하지만

말을 잃어 슬픈 자들에게

음악은 종종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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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가는 길에는 고작’ 해발 50미터 정도의 

동네 뒷산이 하나 있는데, 

산책로에 따라 가로등이 설치가 안 된 곳이 많아

밤길을 걷게 되면 실로 으스스하다. 


빨리 걷는다면 10분여로 지나갈 수 있고

바로 옆길로 빠지면 아파트 단지가 있어

특별히 위험할 일이야 없지만, 

작은 손전등으로 길을 비추며 걷다 보면

내 그림자에 깜짝 놀라곤 한다. 


딱히 담도 크지 않고 겁도 많은데 

굳이 밤에 이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사람없는 길, 달빛도 느슨한 밤

과연 불빛도 없는 숲이 어떨지 상상하기에, 

조금이나마 맛보기에 적당하기 때문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이룩한 것들에 대해

겸허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인간이 문명으로 이뤄낸 성취는 대단하지만, 

그리고 감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편리함과 이로움을 얻기 위해 치러진,

자연이건 혹은 타인의 노동력이건 간에, 

그 비용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편리함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어떤 것들의 희생이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일 터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을 떠나서, 

사람들이나 불빛이 보이지 않는 숲길은

스산하며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아름답다, 

잠시 손전등을 끄면 내 자신이

마치 숲으로 스며들거나 빨려들 것만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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