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선정 올해의 책 1위, 

버락 오바마가 뽑은 2015년 최고의 책, 

이런 따위 수식어가 붙은 

운명과 분노”를 읽고 있는데,


도대체 왜 따위 책이 

그런 대접을 받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시적이고 우아한 문체’라는 문구처럼

원문의 유려함이 우리 말로 번역하기 곤란했거나

(그래서 옮긴 이의 힘에 부치는 글이었거나), 


또는 대략 1980년대 이후 미국사회와 

세대 마다의 말투, 문화적 배경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최 알아먹을 수 없는 글이어서 번역이 힘들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시대의 글이란, 

글의 좋고 나쁨의 기준이란 얼마나 괴상한 것인지. 


등장인물들의 삶은 단선적이고

묘사에도 구체성이 너무 떨어져서

삶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저 펜 끝에서 창조된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인물들에 불과해, 


혹여 원문이 워낙 유려했다고 치더라도

유려한 문장 만으로는 용서가 안 될 글. 

마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럽다. 



취향이란 많은 경우

긍정문보다 부정문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떠어떠한 것이 좋더라, 보다는

무엇무엇이 정말 싫더라, 는 식으로.


좋아하는 것들의 가치를 선별하고 

그 의미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반면 

싫어하는 것에는 논리가 없더라도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데 없이 Santo & Johnny의 Sleep Walk에 다시 꽂혀

50, 60년대 음악들을 돌아보며 느끼는 건, 


내가 80년대 후반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여느 학생과 마찬가지로 

영화 “더티 댄싱(1987)”과 사운드트랙의 

자장 안에 있었던 탓에, 


그리고 같은 해 나온 리치 발렌스의 전기 영화

“라 밤바 (1987)”의 OST까지도

테이프가 늘어나 듣기 힘들 때까지

닳도록 들었던 까닭에, 


이 음악들이 사실은 나보다 앞선 세대의 것임에도

마치 고향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최초의, 

또는 최초에 가까운 경험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꿈꾸듯 나른한 동시에 관능적이며, 
시공간을 넘어 당신마저도 까맣게 잊었던 
먼 옛날의 추억까지 소환해내는 마법 같은, 

1959년 발표 이래 
수십번도 더 커버 곡으로 연주되었고, 
이제는 70주년마저 멀지 않았건만
내게는 하나도 낡지 않은, 

언제나 들어도 새로운 이 곡을, 
Better Call Saul이라는 TV시리즈에서 
오랫만에 만나다. 

그리고 오후 내내, 
50년대 60년대 록큰롤과 함께 시간을 때우다. 
그 때운 결과물들은 찬찬히 공개하기로 하고, 

아래는 조금 음질이 깨끗한, 
스튜디오 녹음 음원. 


 


가뭄과 물부족, 연일 계속되는 폭염, 

요즘 몇년 새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제 더이상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은

‘우리가 20XX년까지 OOO를 하지 못하면’ 따위의

조건부 명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다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진척된 재앙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가 들고, 

그 소모된 에너지는 다시 기후변화를 재촉하고, 


앞으로 계속 나빠질 것이다, 

더 빠른 속도로, 

해가 갈수록 더욱 더 

빠르고 철저하게. 

“돌아와줘서 고맙다”

두번째로 확인된 세월호 미수습자,
허다윤양에 대한 기사에 누군가 남긴 댓글에
눈물이 왈칵,


어떤 시보다도 더 시적인,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문장 하나에

문득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

돌아와줘서 정말 고맙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꼭,
어서 돌아오시길.



단순하다. 
촌스럽다. 
유치하다. 

하지만 
영화 Spy (2015)에서 
잠깐 들은 (혹은 본?) 이 노래는, 
엄청나게 인상적이고 중독적이어서
기어코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을 
검색창으로 이끈다. 

혹은,

이제 내가
왜 어르신들이 신나는 트로트를 
즐겨 듣고 부르시는지, 
왜 고속버스의 춤사위가 
그리도 촌스럽지만 매력적인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나이가 
된 것인지도. 


ps.
노래를 곰곰히 듣고 있다보면, 
2007년 드랙 퀸 복장의 
베르카 세르두쉬카라는 이름으로
유로비전 컨테스트에 등장해 2위를 차지
우크라이나 코미디언, 성격파 배우이자 가수,
안드리이 미하일로비치 다닐코 
(Andriy Mykhailovych Danylko)의 노래는,
그저 싸구려 취급하기에는 
녹록치 않은 내공이 담겨있다. 

닥치고 음악과 춤, 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쉽고, 간명하며, 반복적인 리프레인과, 
무엇보다 쉽게 따라할 수 있고 
따라하고 싶은 안무야 말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강남스타일까지 아우르는 
댄스 음악의 매력이 아닐까. 
  


찬물로 하는 샤워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계절, 


비로소 

여름이 코앞이다. 

때로 이 길이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곳으로 가는 것보다

가고 있는 중인 것을 더 좋아하는,


이 빌어먹을 驛馬煞!




자고 일어나면 죽기 전날이었으면 좋겠다,

죽음이 그렇게 쉬울 수 있다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죽음은 ‘사건’이라기보다 ‘과정’이므로, 

죽음에서 고통을 온전히 지워내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죽음에 있어 지름길은 없다, 

평생에 걸쳐 겪어내야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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