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과 ‘감당한다는 것’ 사이엔 

강이 하나 있는데, 

알면 알수록 감당하기 힘든 것이 그 강의 속성인지라, 

그 말은 그저 그 사이 어디쯤에서 

부단히 헤엄치고 있는 사람만이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영복은 ‘아름다움’이 ‘앎’에서 나온 말이며, 

‘안다’는 건 대상을 ‘껴안는’ 일이라 했다. 

언제든 자기 심장을 찌르려고 칼을 쥔 사람을 껴안는 일, 

그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세상엔 자신의 유서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싸움은 그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싸움의 지속은

타인의 유서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홍은전, ‘그 사람 얼마나 외로웠을까’, 한겨레, 2017년 7월 18일 23면



有口無言,

 

나 같은 사람이 

뭔가 한 마디 붙이기에는 

낯부끄러워 도저히 입을 뗄 수 없으니


그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날인가 ‘本人喪’이 적힌 부고장을 받는 것, 

그렇게 연락처 목록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드는 것,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둘씩 먼저 떠나보내고

여름의 끝무렵 마지막 남은 한떨기 장미처럼

우두커니 홀로, 


아일랜드 시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시에 

곡조가 붙고 베토벤과 쿨라우, 플로토우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곡조를 작품에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이 노래는, 


그렇게 쓸쓸하지만 담담하게 

아직은 살아있는 자의 서글픈 심정을 전한다; 

곧 나도 그 길을 따라가리라는 것을, 

소중한 이들이 사라진 이곳의 황량함을

버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그러므로 이 노래는,

그저 예쁘게 부르는 것보다는 

이 동영상의 레온타인 프라이스처럼

세월의 눅진한 맛이 느껴지는 연주가 더 좋다.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까닭에, 

나나 무스쿠리의 살짝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바이브레이션이 오히려 더 

호소력이 있다고 해야할까. 



So soon may I follow ,
When friendships decay ,
And from Love's shining circle
The gems drop away.
When true hearts lie withered,
And fond ones are flown,
Oh! who would inhabit
This bleak world alone?







그 봄날 소중했던, 마치 보석과도 같던

그 꽃은 시들어가고, 

깊고 깊은, 어두운 우물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길어 뿌려주어도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렇듯 영혼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다 해도, 

그 물을 그대의 발 앞에 뿌린다 해도, 


이제 다시 없을 기쁜 날이여, 

다시 되살리지 못할 그 봄날의, 

내 가슴 속의 장미여, 


(오, 나의 사랑이여)[각주:1]



첫 음부터 눈물을 부르는 노래가 있다면, 

그런 리트Lied가 있다면, 

단연코 로베르트 슈만이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시에 곡을 붙인

이 노래가 아닐까.  


사실 괴르네가 올해 발매한

피아니스트 마르쿠스 힌터호이저와의 녹음[각주:2]이  

훨씬 더 절절하지만, 


2004년 에릭 슈나이더와 함께 한

젊은 시절 괴르네의 

부드럽지만 조금은 건조한, 

‘눈물 없는 울음’도 매력적이다. 


1850년, 그러니까 슈만이 죽기 6년전 

이 곡을 포함해 6곡의 노래와 

마지막 레퀴엠까지 일곱 곡이 같이 출판된

작품번호 90번은 이렇게 내내, 


참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서글픈,

듣다보면 코 끝이 아릿해 오는

마치 한숨과도 같은 노래들이다. 



리트가 흔히 그렇듯이, 

화자의 성별이 달라지면 또 새롭다. 

역시 리트 해석에 탁월했던

메조 소프라노 재닛 베이커의 

녹음도 덧붙인다. 





  1. 이 내용은 원래의 시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아마도 대략의 줄거리라고 보시면 되겠다. 원문과 영어 번역은 http://www.lieder.net/lieder/get_text.html?TextId=10032 를 참고하시라. [본문으로]
  2. Matthias Gerne & Markus Hinterhäuser, “Schumann: Einsamkeit”, Harmonia Mundi, 2017. 유튜브나 인터넷에서는 음원을 아직 찾을 수 없지만, 주옥같은 슈만의 가곡들을 만날 수 있는 음반이다. 2004년의 슈만 녹음보다 원숙해진 괴르네의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인 앨범. [본문으로]

Electricity (2014), 

Gravity (2013), 

The Lobster (2015), 

Fehér isten (White God) (2014), 


부산행 (2016),

Family Weekend (2013), 


Blame (2017), 

Don't Knock Twice (2016)



이따금 그런 공상을 하곤 한다, 

수명이라는 게 양도 가능하다면.


누군가 세상에 더 도움이 되는 이에게

조금씩 나눠줘도 그리 나쁘지 않을텐데. 


(인생 참 쓸모없이 너무 길다.)

없는 사람들 말을 글로 옮기다 보면, 

힘도 맛도 가락도 깎인다. 

게다가 못 배운 사람들 말을

배운 사람들이 알아먹지 못한다. 

[...]

“내 살은 거럴 우예 다 말로 합니꺼”는, 

서울이나 산골에서 없이 산 노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넋두리다. 

글보다 말보다 ‘살은 거’가 진짜다. 

최현숙, ‘내 살은 거럴 우예 다 말로 합니꺼’, 한겨레, 2017년 7월 3일 25면



배운 자들이 글을 쓰고, 

그들은 당최 알아먹지를 못하고, 

그러한 까닭에 ‘없이 산 사람’의 

진짜 삶이 담긴 글은 드문 것인가. 


“할배의 탄생”이라는 구술사 작업으로

여기저기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이름을 접했는데, 

이제 대구 달성군 산골 할매들의 구술을 받아내고 있단다. 


그러고 보면 요즘에는 이런 책들이 반갑다.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무엇보다 귀로 듣고 쓴 책들. 

이를테면 직장폐쇄와 용역폭력을 겪어낸 

안산 SJM 노동자들을 만난 “호모 파베르의 인터뷰”나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의 구술과 소소한 작품이 어우러진

“나는 참 늦복 터졌다”처럼 

이제 주류 미디어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그저 다른 방법 없이 온몸으로 

견뎌내고 겪어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어지간한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보다

훨씬 흥미롭고 감동적인. 

자전거를 타는 것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오늘 같이 빗줄기가 제법 굵은 날

속옷까지 젖도록 나돌아다녀도

그냥 ‘미친 사람인가봐’ 보다는

뭔가에 미친 사람이로군’ 이라는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온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즐거움.

놀이에 취해 팔뚝으로 허벅지로 흘러내리는, 

또 머리카락을 적시다 못해 마침내 한 방울, 

머리 속을 적시던 순간의 쾌감:

기왕 젖은 김에 더 놀다 가자!


그러다 남자애들이라면 하나 둘 웃통을 벗고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어깨로 등으로, 

이제는 그렇게 놀 친구들이라곤 없겠지만

홀로라도 안장 위에서 페달을 돌려가며, 

그 시절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이미 흠뻑 젖은 김에, 더 타고 가지!



스튜디오 녹음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훨씬 더 열정적이고, 
훨씬 더 도전적인 1964년 TV쇼 라이브. 

싱글 버전이 어쩔 수 없이 
이건 1964년의 사운드로군, 싶다면
이 라이브 버전은 조금만 다듬어도
21세기인 지금 듣기에도 
충분히 현대적으로 들릴 법 하다. 

독립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가사를
스튜디오 버전보다 훨씬 더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레슬리 고어의 열창, 
무려 50년이 넘었어도 
(무한반복으로 듣고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예술이 삶이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도, 

혹은 이해하는 특정한 결과물도 아닌

그 자체가 이해의 대상인 시대, 

예술이란 얼마나 빈곤한가. 


해설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아니 해설로도 이해가 불가능한 

미술이며 음악이며 문학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미 산업/사업의 체계 속으로 편입돼 

이름이 이름을 낳고 이름이 이름을 짓는, 

자본의 호명에 의해 예술이 비로소 정의되는 시대.


아무런 사용가치가 없는, 

이를테면 더이상 노래도 춤도 아닌, 

그렇다고 울음도 위로도 아닌 음악들이 

순수예술로, 순수음악으로 불리우는, 


예술이 인간을 능멸하고 

삶을 모욕하는 시대, 


나는 더이상 예술을 믿지 않는다.



퇴근길 저녁을 먹고 

동네 시장 단골 과일가게에 들러

눈이 부리부리한 넉살좋은 청년과 

실없는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늘 사던 사과 한 봉지와 

기분좋은 농담 한마디에 묻어 온

예정에 없던 참외 한 무더기를 

자전거 바구니에 싣고 돌아오는 길, 


이만하면 썩,

나쁘지 않은 하루다,


사는 곳 가까이에 시장이 있다는 것, 

들어서면 먼저 인사를 나누는 

단골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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