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배움의 최고 동력은 절실함이고 

필수 조건은 덩어리 시간이다. 
당장 생존에 필요하지도 않고 
(놀) 시간도 없는 아이들에게 글을 쓰라니 
얼마나 고역일까. 

[...]

하나는 알겠다. 

해봐서 안다며 책부터 들이밀면 

아이가 스스로 가꾸어갈 

경험과 사유의 자리가 막힌다는 사실이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격려받는 만큼 

싫어하는 아이의 권리도 존중받기를. 

입막음을 당하는 약자에겐 

행동하지 않음도 행동이다.

은유, ‘읽고 쓰지 않을, 권리’, 한겨레 2017.8.12(토) 23면




삶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도

깨달아야 할 것도 

참 많다. 

주말 동안 본 다큐에서는



빙하가 사라지고 (다시 말해 죽어가고), 

Chasing Ice (빙하를 따라서), 2012


버려져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플라스틱 때문에

플랑크톤에서 다양한 물고기와 고래, 새들에 이르기까지

해양생물들이 아프고 병들고 죽어가고, 

A Plastic Ocean (플라스틱, 바다를 삼키다), 2016

 

바닷물의 온도가 상승하면서 산호초가 죽어간다. 

Chasing Coral (산호초를 따라서), 2017



도대체 우리는 

지구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사실은 이미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젠가 올 파국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오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산호초가 죽어가는 걸 보는 건

무고한 이의 죽음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이다. 


비록 다큐멘터리는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산호초의 절멸을,

그리고 이에 의존하는 바다생물의 25%가 

피해를 입는 것을 막는 방법은, 

우리에게 허락된 시일 내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게 명백해보이기 때문에

더 슬프다.


https://www.chasingcoral.com

그러고 보면 

소심하게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머릿 속에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삿된 생각들, 

천박한 욕망과 허황된 욕심을 이루고 싶어하고

성취하려 노력할 정도로 담대했더라면

지금보다도 얼마나 더 나쁜 인간이 되어 있었겠는가. 


나라는 인간 소심해서 참, 

다행이다.

대책은 간단하다. 

더운 시간인 낮 12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에는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고, 

재난 수준의 상황이라면 일을 중단해야 한다. 

[...]

지난 수십년간 세계의 정부와 기업들이

최고급 호텔에 모여 기후변화의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사이, 

전세계 노동자들은 이미 기후변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자신들의 땀과 병원비, 혹은 목숨값으로 말이다. 

박정훈, ‘폭염수당’, 한겨레 2017년 7월 31일 월요일 25면



고맙고, 

죄송하다. 



레일 위를 굴러가는 기차바퀴의 단조로운 소음, 
그 리듬에 몸을 맡기고 흔들거리며 졸린 눈으로 창 밖, 
마치 입자가 만져질 것만 같은 안개를 바라본다, 
기차는 느리게 움직이고 안개 역시 천천히 흘러간다, 
마치 기차가 안개의 근원이라도 향해 달려가듯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 가운데, 
밤이 깊어간다.


덴마크의 튜바 연주자 
다니엘 헤르스케달Daniel Herskedal의 
2015년 앨범 Slow Eastbound Train의 
첫 트랙이자 앨범 전체의 인트로intro격인 
‘Mistral noir (안개 낀 밤)’. 

다분히 미니멀한, 
선율의 진행보다 반복적인 구성으로
오히려 소리의 텍스처를 강조하는 음악. 

안개의 입자와 흐름, 기차의 움직임, 
바퀴와 레일의 마찰음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헤드폰으로 듣는다면 
다채로운 텅잉tonguing[각주:1]으로 
‘칙칙폭폭’처럼 들리게끔, 
내연기관의 소음마저도 흉내내어 
오스티나토ostinato[각주:2]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대개는 저음부를 담당하는 탓에 
프런트 라인에 나서지 않는 악기인 튜바와, 
역시나 빅밴드 편성에서도 보기 힘든
베이스 트럼펫이라는 두 악기의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음악. 


 눈을 감고 음악을 가만히 듣다보면
J.M.W. 터너의 1844년작
Rain, Steam and Speed가 떠오른다.  

물론 이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낮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와, 
비가 일으키는 물안개와, 
기차가 뿜어내는 안개 같은 증기와 
튜바와 트럼펫의 관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입김, 
그리고 안개 만큼이나 속도 탓에 윤곽이 흐려진
기관차의 단단한 몸체가 뒤섞여, 

이토록 시각적인 음악과 
저토록 청각적인 회화가 만난다, 
터너, 그리고 헤르스케달. 


  1. 관악기는 그저 바람을 불어넣는 게 아니다. 능숙한 연주자라면 혀의 위치와 움직임을 통해 음고와 음색, 리듬 등을 조금씩 바꾸는데, 이를 혀를 이용한다 하여 tonguing이라 한다. [본문으로]
  2.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반복적인 리프로 구성된 악구로, 주로 저음부에 사용돼 ostinato bass라고 표기되곤 한다. . [본문으로]


2011년작 영화 Drive는 그 내용보다도

홀린 듯 취한 듯 펼쳐지는 영상이, 

나아가 영상보다도 음악이 앞서 떠오르는 영화다. 

요즘 보기 드물게 음악 때문에 자꾸 생각나는 영화. 


1971년도 이탈리아 영화 Addio zio Tom에 처음 사용된

리즈 오르톨라니 작곡의 Oh My Love는 그 중에서도 백미다. 

어둠, 그러니까 암흑가든 동네 뒷골목이든 

혹은 그저 고난을 상징하든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속해있는 남자에게 건네는, 

그 사내가 광명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보다는 소망에 가까운 메시지. 


리즈 오르톨라니와 결혼하기도 한[각주:1] 가수

카티나 라니에리Katyna Ranieri의 

한 세시간 쯤 울고 난 뒤와 같은 잠긴 목소리,

고조되는 스트링을 배경으로 마치

떠오르는 햇살처럼 청자를 감싸는 에너지. 


무엇보다 종지cadence 없이 끝나는 

화성이 해결되지 않고 열려있는 종결부는

아직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그래서 더욱 간절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듣는 사람을 무한 반복의 수렁에 빠뜨린다.

 

이 곡 뿐 아니라 College & Electric Youth의 

A Real Hero와 더불어

2년 뒤 런던 그래머London Grammar가 

그들의 데뷔 앨범 If You Wait (2013)에서

원곡보다도 훨씬 더 몽환적이고 관능적으로 커버한, 

프랑스 뮤지션 Kavinsky의 Nightcall도 무척 인상적이다.


(사실 런던 그래머의 뮤직비디오는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 같다.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작업들을 떠오르게 하는 

색채와 조명, 그리고 극적인theatrical 연출.)





  1. 이 노래를 녹음할 당시 부부관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관계로, 모호한 시제로 놔둔다. [본문으로]


그는 핀란드에서 왔고

나보다 머리 하나는 좋이 컸다. 

내가 늘 이름을 잊곤 하는 그의 여자친구는 

아프리카계로 지금은 결혼까지 이르러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가깝다고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친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 시절과 그 이후의 내 인간관계가 그렇듯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곤란한 그런 사이였는데

우리 둘을 묶어주는 공통점이 있다면 

이른바 흑인(들로부터 기원한) 음악에 대한 애호, 

재즈와 블루스로부터 나온 음악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빌 위더스의 이 노래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2분’,  

빌 위더스의 Ain’t No Sunshine (1971)은 

사랑을 잃어본 자가 느낄 수 있는 절절함이

음표 하나 하나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모든 노래에는 

노래를 함께 나눴던 이들과의 기억이 

흔적으로 남는다. 

아니, 그 친구들 뿐 아니라 

이제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말로는 지나치게 모자란 

그리움이라 해도 좋겠다. 


언제나 손에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내 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우리 젊은 날의 한 때. 



(그러하기에 이별에는 어떤 음악도 許하지 않기를, 

고별의 순간에는 음악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기를, 

부질없는 기억들을 음악과 함께 당신의 마음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겨두지 않기를, 

부디)




이토록 위태로운 평온함, 
아슬아슬한 아름다움,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이 곡에 대한,

정확하고 선이 굵은, 강건한 해석으로 
결코 감정에 몰익(沒溺)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손길로 그 감정의 기복들을 최대치로 그려낸, 

달리 3중주단의 호연. 

(Fuga Libera, 2011)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섹시한 서사가 아니라 

담백한 지성이다. 

그 지성의 증거는 학력 따위가 아니라

자기객관화 능력이다. 

박권일, 서사과잉: 김어준씨의 경우, 한겨레 2017년 7월 20일 (목) 21면




남을 의심하는만큼이나

자기 자신 역시 의심해본다는 것,


나는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요즘의 인문학 강좌 단골 주제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용으로

시작하는 것일테다. 


김어준씨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한번쯤 새겨봐야 할 화두를 던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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