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소셜미디어 계정을 정리하다보니

사실 나는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다. 

누구와도, 아무하고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과연 ‘대화’였던가? 

잘 모르겠다. 


그저 혼잣말들, 

혹은

들어줬으면 바라면서 허공에 대고 토하는, 

한숨 같은 방백들. 

– 그예 떠나십니까.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 애초에 居한 곳도 處한 곳도 없는데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이냐.


내가 용서를 구할 수, 

바랄 수 있을까 

과연


스스로 용서 못 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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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안다고 해서 
꼭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이유는

최소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Merde!

 Merde!

 Merde!



(살다보면 그냥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고들 한다. 

다시 말해 디테일이 부족하다면 

그 작품은 비판이라는 ‘악마’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김훈의 “공터에서”(해냄, 2017)는

1979년에서 시작해 80년대가 주된 배경이다. 


언론통폐합으로 직장을 잃은 주인공이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마침내 자리잡은 곳이 택배회사, 

그 중에서도 오토바이 퀵서비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적어도 한국 위키피디아의 자료 따르면[각주:1]

1984년에 한국의 유학생이 일본에서

유사한 서비스를 보게 된 후

90년대 초반 귀국해 최초의 이륜택배 회사를

개업한 것이 이른바 퀵서비스라고 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이 신호대기선에서 

주위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난데 없이 외제차들이 즐비하다. 

80년대에, 과연 주인공은 

어느 동네 신호등 앞에 서있었던 것일까?


많이 양보해서 이 부분이

90년대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친다고 해도

10여년의 세월에 대한 어떠한 서술도 없이

시대를 건너뛴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80년대라는 암시가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터라 더욱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

마장세에게 느닷없이 들러붙는 

마약 밀수입이라는 혐의는, 

도대체 소설 전체에서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 아버지들의 삶은 이런 특이한 것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신산스럽고 고달팠다. 

특수한 사례들을 外揷함으로써 

오히려 소설의 핍진성, 

다시 말해 ‘그럴 법함’만 의심스러워졌다. 


느슨한 구조, 

앞뒤가 맞지 않는 플롯, 

엉성한 디테일. 

이른바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그 관심에 값할 만큼 충실한 작품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다시 한번,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 

그리고 21세기 한국 소설 가운데, 

이 악마를 극복한 사례들은 참으로

찾기 쉽지 않다. 






  1. 물론 위키피디아의 자료가 오류가 있는 경우도 많고 절대적으로 옳은 자료는 아니다. 더 확실한 1차자료는 업태로서 "이륜택배업"이 언제부터 세무서에 등록됐는지 알아보는 것이나, 이 글을 위해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안녕, 활기차고 행복한 도시여 안녕, 

말은 숨을 씩씩거리며 발로 땅을 차고, 

이제 담담하게 떠남을 받아들이네. 

지금껏 그대에게 슬퍼하는 모습 보여준 적 없기에 

이별의 순간 역시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리라고.[각주:1] 


떠나는 것은 영혼이 젊은 자의 숙명.

미지의 세계가 환영해줄테니,

그러니 슬프지 않게, 

씩씩하게, 

안녕, 

안녕. 



이런 작별의 인사라면, 

그리 쓸쓸할 것 같지 않다.


슈베르트 사후에 “백조의 노래”로 

한 데 묶여 출판됐지만 그 노래들이 연가곡처럼 

서로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연가곡처럼 포장된 건 다분히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출판업자의  기획이었으나,

다만 마지막으로 한번 운다는 ‘백조의 노래’에

하필이면 고별(Abschied)이 포함된 건

아무래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마이르호퍼(Mayrhofer)의 시에 곡을 붙인, 

마치 기나긴 탄식과 한숨과도 같은 

또다른 고별(Abschied), D.475과는 달리

이렇게도 유쾌한 작별인사라니. 

이토록 사랑스러운 

세상에의 고별을 남길 수 있는 건, 

아마도 슈베르트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그토록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있었을 법한 일.  




  1. Ludwig Rellstab이 쓴 원시의 1연을 풀어 써 보았다. 독일어 원문과 영어 번역은 lieder.net 참조. http://www.lieder.net/lieder/get_text.html?TextId=13375 [본문으로]

만약 당신이 첼바를 좋아한다면

아리차도 좋아할 확률이 크다. 

어쩌면 그보다 더 좋아하게 될 수도. 


요즘 하는 말로 하자면

꽃향기와 과일향기의 ‘끝판왕’이라고 해야할까. 

첼바와 기본적인 성격은 유사한데, 

그보다 더 산뜻하고 짙은 향기가 일품. 


좀 굵게 갈아서 상큼하게 마시든

잘게 갈아서 바디감을 올라오게 하든, 

핸드 드립이라면 어떻게 내려도 맛있다. 


모카포트로 내리는 건

맛보다는 향을 뽑아내는 것이 더 어울리는

아리차에는 그닥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 

굳이 블렌딩까지 해서 빨리 내리는 것보다

핸드 드립으로 마땅한 대접을 해주는 것이 좋다. 


100g에 몇 만원씩 하는 고급 원두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가격대에서

이만한 커피는 또 없을 것이다. 



오랫만에 전율이 일었다.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래퍼’인 

케이트 템페스트.


구글에서 가사를 검색해야 겨우 

노래의 뜻을 반쯤 알까말까 한 영어실력이 

한탄스럽기는 하나


고유한 리듬감이 살아있는, 

영국 남동부 액센트로 전해주는 

싯귀들이 인상적이다. 


레너드 코언 이후 음악을 듣고서 

시집을 살까 고민하게 된 

첫 아티스트다.


지난 해 나온 앨범 Let Them Eat Chaos의 

뒤늦은 발견. 




인류에게 남겨진 시간은 너무 짧고, 

내게 남은 세월은 너무 길다. 


혹은 내게 남겨진 세월이 너무 긴 탓에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짧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동원하든 

그 차이란 매우 사소하다. 


인류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남아있는 나날은  

아마도 대개는 끔찍할 것이므로. 


너무 많이, 

너무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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