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를 잡다가 생각하니,

모기 한마리를 잡는 건 어쩌면

그들의 진화에 촉매가 되는 걸 수도 있겠다.


개체에게는 늘 생존이 절대적이지만

종(種)에게는 죽음이 삶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의미가 있지 않은가, 


종(種)을 정의하는 것은 죽음[각주:1],

무릇 모든 진화는 

수많은 죽음을 딛고 이뤄지는 것이다.


  1. 이런 생각이 온전히 내게서 나왔을 리는 없고, 최근 읽은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가 많은 영감을 준 탓일 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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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신들린다는 것은
이런 것,
기타라는 악기는
이렇게 치는 것이로구나.

‘로드리고 이 가브리엘라’[각주:1]의 연주는
언제 들어도, 
또는 이렇게 영상으로 보아도
몸을 들썩이게 만든다. 

이제 더이상
業으로 새로운 음악을 
모니터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앨범들을 모니터하는 건, 

아직도 세상에 내가 모르는 
좋은 음악들이 많아서이고,
다행히 올해 새 음반 “Mettavolution”을
발표한 덕분에 이런 뮤지션들을 알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 때문. 

멕시코 출신의 두 연주자, 
가브리엘라 킨테로(Gabriela Quintero)와
로드리고 산체스(Rodrigo Sanchez)의
듣는 이의 넋을 빼놓는, 
인상적인 조화. 

다음의 영상은 KEXP 방송에서의 실황.
초반에 광고가 하나 끼어들어
좀 짜증스럽긴 해도, 
43분에 이르는 라이브를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다. 



  1. Rodrigo y Gabriela는 ‘로드리고와 가브리엘라’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로드리고 이 가브리엘라로 통용되는 듯하다. [본문으로]

Bach - Goldberg Variations


1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모를 수는 있어도,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아와

마지막 반복되는 아리아 다 카포 사이, 

30개의 변주곡의 구조를 다 이해하기란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 또한 쉽지는 않지만.


3

원래 하프시코드를 위해 씌어졌으나 

1985년, 아제르바이잔 출신[각주:1]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시트코베키가

현악3중주 버전으로 편곡한 것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비올리스트 제라르 코세와 함께 

앨범을 발표한다.


이 편곡 버전은 다른 연주자들이 

여러 차례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고

아예 확대편성해 

현악 오케스트라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우아하고 섬세하며 대위법적인 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반면

뭐랄까, 피아노로 연주한 

골트베르크 연주가 가진 생동감 면에서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 들곤 했다.


4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침머만, 

프랑스 비올리스트 앙뜨완느 타메스티, 

스위스의 첼로 연주자 크리스티안 폴테라 

3인으로 구성된 트리오 침머만의 

새로운 골트베르크 음반은 뭔가 달랐다. 


사실 음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시트코베츠키의 편곡이겠지, 

그러나 믿고 듣는 침머만이니

그래도 들어봐야겠지, 싶어서

청음을 해본 것이었으나, 

알고 보니 세 사람의 

독자적인 편곡이었던 것. 


나중에 음반이 나온 

BIS 레이블 홈페이지에서 보니

골트베르크의 원곡에 충실한 편곡이라고.

그래서일까, 사뭇 심심했던 

시트코베츠키 버전과는 달리

강약도, 빠르기의 변화도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세 악기의 표정도 더 풍부하다. 


이런 비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트코베츠키의 음반이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것 같다면

침머만 3중주단의 편곡은

글렌 굴드의 연주와 비슷하달까.

파격적이고 신선하다.


5

불행히도 아직 유튜브나 어디서도

이들의 연주가 공개되지는 않은 듯 하다.

실황이나 음반 트랙을 링크할 수 없을 경우

웬만하면 포스팅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연주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음원의 링크는 훗날로 미루고

우선 느낌부터 정리하기로 한다. 


6

누군가 내게 피아노 버전을 추천하란다면,

당연하게도 머레이 페라이어와 글렌 굴드.

그리고 안드라스 쉬프의 ECM 음반과

이고르 레빗[각주:2]베아트리스 라나, 

라르스 포크트를 꼽겠다. 


PS

그래도 조금은 아쉬워서, 

시트코베츠키–마이스키–코세의 

1985년 독일 실황 연주를 첨부한다. 

앨범의 연주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치는 연주.

이렇게 들으니 트리오 침머만과

우열을 가린다는 건 

무의미한 것 같기도.






  1.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고 그래서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로 흔히 소개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2. 이고르 레빗의 “바흐: 골트베르크–베토벤: 디아벨리–르르제프스키: 단결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Sony, 2015)는 기획도 연주도 매우 훌륭한 앨범으로 기억한다.. [본문으로]

이 포스트는 브런치 포스팅을 위해

2021.10.18 수정되었습니다.

 

*

 

1

슬픔으로 말을 잃은 이에게 

음악은 때때로 작지 않은 위안,

 

그러나 어떤 슬픔은 

설령 삶이 다한다 한들

닳아지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돌처럼 단단히 굳어지는 것이어서,

 

(하기는 어쩌면 그나마 시도 때도 없이 

일렁거리고 출렁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언제라도 눈물이 충분하지 않은

그런 종류의 슬픔도 있는 것이어서,

서툰 위로 대신 침묵이 나은 법도 

있는 것이어서,

 

2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다,

 

요한 파헬벨의 이 곡은

1683년 출판한 건반악기를 위한 작품집

⟪Musicalische Sterbens-Gedanken

(죽음에 대한 음악적 사유)⟫에

다른 세 곡과 함께 실렸다고 여겨지는데

(작품집 자체는 현재 망실됐으나

후대의 복원에 의하면 이 곡은

거의 확실히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도 같은해 9월 역병으로 잃은

부인과 아이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지어진 제목이 아닐까, 추정된다. 

 

3

Memento mori, 

누구나, 나와 당신을 포함해 

누구나 마땅히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문구는

이제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인용되면서

충분히 진부해졌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을 더 잘 이해하고 

덜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안톤 바타고프가 연주하는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을

듣다보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아가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한번쯤

겸허히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4

하지만 이제 (어쩌면) 당신도 

작품을 들어 알게 되었다시피, 

D장조의 이 곡이 노래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슬픔 만은 아니다.

(확실히 작품집에 포함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두 곡 역시 

단조가 아닌 장조다.)

 

물론 이 곡은 사랑하는 이들을

느닷없이 잃은 사람의 애가(哀歌)이겠으나,

어쩌면 비탄과 눈물이라기보다는

천상에서의 지복(至福)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와도 같은 것,

 

이별도 두려움도 없는,

나아가 고통도 쇠락도 초월한 세계,

안톤 바타고프가 앨범 속지에 쓴 글처럼,

이 음악은 죽음과 

죽음 너머에 대한 명상이자

죽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준비요,

배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5

파헬벨의 원곡은

주로 오르간으로 연주되게끔 지어진, 

‘코랄과 8개의 파르티타’이다

(주제와 8개의 변주, 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다).

 

바타고프는 2015년 출반한 

같은 제목의 음반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는데, 

아마도 요한 고트프리트 발터가 

편곡했다고 알려진, 

코랄과 5개의 변주곡 버전인 듯하다. 

(각각의 악보는 imslp.org에서 구할 수 있다,

요한 파헬벨의 악보, 발터의 악보.)

 

전체 악곡은 단순한 편으로

먼저 두 개의 악절로 된 코랄(주제)은

네 개의 성부(voice)를 위한 것인데,

첫번째 악절은 반복해 연주하며,

그리고 두번째 악절에서는

5도 위인 A장조로 살짝 전조되기도 한다. 

 

이어지는 5개의 변주는,

이를테면 J.S. 바흐의 푸가처럼

복잡한 대위법적 작법이라기보다

(그의 캐논과 지그 D장조에서처럼)

훨씬 단순하고 명료하며 

주제 선율이 잘 들리는 구조로 되어있다. 

 

6

단순한 화성 진행의 무한한 반복과 변주,

그럼으로써 드러나는 멜로디와

음악적 질감의 미묘한 변화,

 

이러한 변주곡의 어법이야말로

영원 속에서의 평온한 삶을

기원하기 위한 적절한 방식이 아닐까.

 

익숙한 선율의 반복을 통해 표현되는

지극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간절히 되뇌는 기도와 같은 것,

그럼으로써 떠나 보낸 이들이 

천상의 지극한 복락(福樂)을 

누리기를 바라는, 

지극한 정성이 담긴 축원과도 같은 것.

 

7

그러나 도대체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슬픔이 다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남아있는 자의 기도가 

완료되는 시점은 과연 또 언제일 것인가.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tum,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다시 말을 잇는다, 

언제라도 눈물이 충분하지 않은

그런 종류의 슬픔도 있는 것이어서,

서툰 위로 대신 침묵이 나은 법도 

있는 것이어서,

 

슬픈 이들이 단지 마음놓고 슬프도록, 

슬프다는 이유로 눈치보지 않도록,

슬픔이 온전한 슬픔이 되도록

그 손 위에 가만히 나의 손을 

올려 놓으며,

 

이제 나는 마땅하게도

파헬벨의 이토록 고요한 슬픔, 

담담한 음악적 애도(哀悼)와 함께

윤동주의 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 ⟨팔복⟩ 전문

 

 

 


J.S. 바흐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두 곡 남겼는데, 

그 중 첫번째인 BWV 262는

파헬벨의 이 작품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가사 없이 남겨진 악보에 후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여 

노래하기도 한다.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Alles Fleisch vergeht wie Heu;

Was da lebet muss verderben,

Soll es anders werden neu.

Dieser Leib, der muss verwesen,

Wenn er ewig soll genesen

Der so grossen Herrlichkeit,

Die den Frommen ist bereit.

 

영역본을 참고하여 대충 요약해보자면,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삶은 여기서 다하지만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얻고

마땅히 받을만한 이들은

위대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

 

이 가사를 알고 나면, 

왜 안톤 바타고프가 앨범에 쓴 글에서

이 ‘다른 세상’에 이르기 위한 

첫번째 관문으로 제시한 것이

파헬벨의 작품 제목을 직역한

 ‘we must die(우리는 죽어야만 한다)’였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채소를 구워 먹겠다고

4만원이 채 안되는 오븐을 사고 보니 

괜히 욕심이 생겨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를 따라해 본 

가지 그라탱.


가지는 너무 얇게 썬 데다 

양파, 파프리카, 마늘과 토마토 소스는

양이 너무 많아서

가지는 온데간데 없고

사진에 보이는 치즈 토핑은 

그럴 듯해 보여도

삼층밥처럼 재료들이

뭔가 어색하게 쌓여있었는데, 


그러나 생각보다는 먹을 만 했다. 

하기는 치즈와 채소의 조합인데, 

맛이 없으면 얼마나 없겠는가.


다음 번에 또 하게 되면

가지 한 개에 양파 작은 거 하나와

파프리카 작은 거 하나, 

마늘 6쪽 정도와 

토마토 소스 네 숟가락 정도면

적당할 듯 하다. 

가지는 어슷하게 썰지 말고

길게 2등분 해서 해볼까, 싶기도.


모든 레시피가 가지를 

먼저 살짝 굽는 걸로 돼 있는데,

근데 정말 미리 구워야 하는 걸까.


어쨌든 오븐 온도와 시간은

가지를 구워놨다는 가정 하에

180도 10분이면 충분한 것 같다. 



연꽃(lotus)과 수련(water lily)을 구분하려면

꽃보다 잎을 보아야 한다고 한다.[각주:1] 


연꽃은 프로테아목 연꽃과 연꽃속이고

수련은 수련목 수련과 수련속인데

꽃의 모양과 부엽(浮葉)하는 섭생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혼동하곤 한다. 


대개 수련의 잎은 물 표면에 떠있으며

한쪽이 예리하게 파여 들어가 있는 반면

연꽃의 잎은 수면 위로 올라와 자라며

사진과 같이 크고 둥그런 형상이라고 한다. 


연꽃은 오염된 물에서 자랄 수 있으며

물을 정화하는 능력을 지닌 반면,[각주:2] 

수련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그냥 아름답게 자랄 뿐이다. 


연꽃의 잎이 무성해지면

수면 위 10~20cm 올라오는 특성 때문에 

너무 우거져 보이고 말끔하지 않아 보이지만,

수련은 표면을 깔끔하게 덮고 

꽃의 모양과 색깔도 다양해서

관상용으로 개량도 많이 되고 많이 심어진다고.


그렇게 연꽃 대신 수련이 많이 보이면서

사람들은 수련이 연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각주:3]

실제로 연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뭐랄까, 

體는 사라지고 用만을 추구하는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라고나 해야할까.


7월과 8월 사이, 

창덕궁 후원에 연꽃이 핀다 하니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 

아니면 양평의 세미원이나 강화의 신원사라도.


  1.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해가 지거나 비가 올 때 꽃잎이 닫히는가를 보는 것이겠으나 (닫히면 수련일테니), 하루종일 꽃만 보고 살 수는 없으므로 꽃대와 잎을 보는 것이 또다른 방법일 테다. [본문으로]
  2. 더러운 물에서 자라며 물을 깨끗이 하는 연꽃의 특성이 불교와 유교에서 연꽃을 귀히 여기게 됐다 한다. [본문으로]
  3. 심지어 한국 위키피디아에는 수련의 사진이 연꽃 항목에 버젓이 실려있기도 하다. [본문으로]

화면의 붉은 글자들이 흐릿하다

왜 가장 더딘 파장이 가장 먼저 오는가,

혹은,


글자들이 멀어저가며 나타나는 적색편이

(어쩌면 나의 세계는 팽창하고 있는가),

어쨌거나


이제는 근시안적 삶에서 벗어나

멀리 보며 살라는, 


나이듦이 주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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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라는 열매가 있으니

꽃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정작 꽃을 본 기억이 없는 것은

크기에서도 색깔에서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아서일까.


허나 꽃을 발견하고 나니

이렇게 귀엽고 예쁜 꽃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참 점잖게 아름다운 꽃이구나, 

싶기도 하다. 


꽃과 함께 담은 잎사귀도

딱히 돋보인다기보다 모든 것이 그저, 

아주 적당하다.



수원 화성 나들이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본, 

요즘 것처럼 말끔하지는 않아도

우아하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담긴, 


이런 손잡이가 좋은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나는 

옛날사람이군, 

싶다.



아무래도 나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길고양이에게 밥주는 일은 충분히 자애로우나

그렇담 그 고양이들에게 생명을 위협받을

새들과 더 무해로운 생명체들은 어떡한담 싶다가

또 이렇게 걱정하는 내가 혹여 동정심 없는

냉혈한이 아닌가 싶다가 (정말 그런가 싶다가)

그래도 어째 고양이와 개들에게만 이렇게

관심이 쏟아지는 건 아무래도 생태적인 방식은

아니지 않을까, 인간중심적 사고의 다른 한

방편이 아닌가 싶다가, 그러나 너는 밥 한끼

사료 한 톨이라도 줘 본 적 있느냐 누가 묻는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는 사람 아닌가 싶다가,

매번 걱정만 죽어라 하는 내 자신이 좀 걱정되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싶다가도 아무래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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