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추운 밤 한뎃잠 자다

 

문득 품은 다디단 꿈들,

 

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生인가

 

대설주의보에 이은 강풍주의보,


바람은 눈의 발자국을 지우고 

눈송이들은 길 잃어 허공을 헤맨다



눈은 길을 지우고 

바람은 눈을 지우더니


이윽고 어둠이 바람을 지운다, 

그리고 오로지 무언가 펄럭이는 소리, 


소리들이 어둠을 지우고 있다



 

1

백건우 선생의 “슈만” 앨범과

다니엘 바렌보임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 디아벨리 변주곡”, 

두 음반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한다,

‘나이듦’은 (어쩌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2

두 앨범 모두 

반짝거리는 광채가 돋보이는 것도, 

두 눈이 휘둥그레질 테크닉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올해 74세의 백건우 선생과

78세의 바렌보임, 

두 연주자가 들려주는 것은

그저 음악이 스스로 말하게, 

노래하게 하는 것. 

 

이 넉넉함과 원숙함은

엄청난 기교와 신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나이어린 연주자들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3

사실 음악이란 삶의 강렬한 유비(類比),

혹은 삶 그 자체여서, 

우리는 오로지 시간의 흐름으로만

음악과 삶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

 

‘살아있음’ 없이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삶을 통해서만,

그 ‘살아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예술이

바로 음악일 것이다.

 

4

미술과 문학을 비롯한 많은 예술장르가, 

특히나 20세기 이후에는 더욱더

참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가치를 인정받으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대개

나아감보다는 뒤쳐짐으로 여겨지고

간혹 자기복제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반해

음악이란 무척 독특하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야, 

경험과 경력과 안목이 쌓여야,

그리고 단지 악보 만이 아니라 

그 음악과 관련된 여러 문헌에 대한

이해까지 갖춰야 

더 깊고 넓은 해석 뿐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까지 

연주에 담을 수 있지 않던가.

 

6

두 앨범에서도 특히나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들이나

슈만의 후기 작품들에 어른거리는

일종의 죽음의 그림자,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삶 너머, 그리고 음악 너머에 대한

사유의 흔적들을 

어린 연주자가 온전히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삶이든 음악이든, 

어떤 시기가 되어야만 비로소 

들리고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7

특히 슈만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마지막 작품인 “주제와 변주 Eb장조”

일명 ‘유령변주곡’은 그야말로 

생의 마지막을 눈앞에 둔 음악가의

마지막 전언이 아니던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슈만에게는 죽음을 상징하는 

정령들(Geister)이 환각으로 나타났고, 

그 와중에 이 곡의 주제 악구들이

그에게 떠올랐다 한다.

 

 

슈만의 후기작품들이 흔히 그렇듯

음표들은 정처없이 부유하고

변주의 악상은 모호하게 흘러가며  

심지어 종지 역시 흐지부지

끝난 듯 아닌 듯 사그라든다. 

(하긴 어쩌면 삶과 죽음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단칼에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계가 모호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가만히 듣다보면 

전체적인 분위기 뿐 아니라

악상의 전개에서도, 주제 면에서도

요한 파헬벨의 코랄과 변주곡,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어쩌면

사뭇 비슷하다는 생각.

(https://documenta.tistory.com/522)

 

7

사실 연주자나 작곡가의 개인사를 

음악과 결부시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백건우 선생의 평생의 동반자,

윤정희 선생이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의 연주가 더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정신적 문제들로 그가 알던 세계, 

혹은 클라라 슈만이 알던 세계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가던 로베르트 슈만과, 

 

알츠하이머로 그녀가 알던 세계, 

혹은 백건우 선생이 알던 세계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가는 윤정희 선생, 

 

어떤 면에서는 후기 작품들 뿐 아니라

사랑과 슬픔과 눈물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인생 전반의 유사한 경험들이

그의 슈만 음악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케 된다.

 

8

바렌보임의 베토벤 전곡 앨범은, 

만약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1순위에 들 만한 앨범은 아니다. 

 

아마도 내게는 영원한 레퍼런스인

알프레트 브렌델의 데카 녹음이나

젊은 연주자들 가운데에서는 

이고르 레빗을 추천하겠지만, 

 

그러나 음악이 어느 연주자의 

삶 그 자체가 되었을 때, 

아니 누군가의 삶이 음악 자체가 되었을 때

베토벤의 32곡의 소나타와 

흔히 기교로도 해석적으로도

최대의 난곡의 하나라고 불리우는 

디아벨리 변주곡마저 

얼마나 편안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고 싶다면, 

 

바렌보임의 음반은 

훌륭한 선택일 수 있을 것이다. 

 

9

베토벤의 만년의 소나타들이나

슈만의 마지막 날들에 써낸

피아노 작품들이나,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삶 속에, 음악 속에 녹여내어

삶 너머, 음악 너머를 바라보는

그들의 음악적 사유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젊은 날의 

민첩함이나 힘과 속도, 지구력은

잃었을 지도 모르지만, 

 

바렌보임과 백건우,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들은

여전히 삶 속에서 음악과 인생,

그리고 세상을,

나아가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기 마련인 나이듦과 죽음을 

우리보다 앞서 이해하고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가짜 뉴스에 대하여 가장 목소리를 높여 
불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책임자인 경우가 흔하다. 

인터넷은 지식을 민주화하는 대신 

무지와 편견을 민주화했다. 

 이언 스튜어트, “신도 주사위 놀이를 한다”, 

장영재 옮김, 서울:북라이프, 2020, 15쪽



민주주의 하에서 

모든 의견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의견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대주의의 깃발 아래

정치와 사회관부터 예술까지,

어떤 말의, 어떤 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을

포기한 채 취향으로 환원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혹은 나쁜 것), 

선한 것과 덜 선한 것 (또는 악한 것),

탁월한 것과 덜 탁월한 것 (아니면 후진 것),

누가 보기에도 그런 것들을 

실로 그러하다고 이야기하는 데에도

사소하지만 담대한 용기가 필요한 시절.



1

고춧잎을 된장에 무치고

밀폐용기에 옮겨 담다가

깜빡 잊고 간도 안 봤음을 

깨닫고서는, 


아, 이제 나도 대충 

어림짐작으로 간을 맞춰도 

내 입맛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는 된 건가

싶어져 혼자서 피식,


2

하기는 코로나19로 

학원까지 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몇 달 째 연습하고 있는

클레멘티의 곡은 이제,


가끔 연습하다 암보한 부분이

갑자기 생각 안 나 머뭇거려 질 때도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


(물론 머리와 손을 모두 동원해도

건반을 잘못 짚거나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더 자주 벌어지지만)


3

역시 무언가가 

몸으로 익숙해지는 것은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악기를 연주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무언가를 몸이 저절로 익숙해질 때까지

들여야 하는 노력에 대해

그야말로 정직한 보상이 주어지는 

일들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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