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마가 끝난 뒤로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채소 판매칸을 두고

계산대에 계신 분과 

기후위기에 대해 몇 마디를 나누다가, 


‘아마 저희 세대가 누릴 것 누릴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어요’라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마무리 짓고 돌아나오는데

아차, 싶었다.


어쩌면 나의 세대가 

누릴 것을 웬만큼 누려봤기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건가, 

새삼 깨닫고는 찾아든 아연啞然.


2

환경문제에 나름 관심이 많다고, 

또 일상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내 삶을 많이 바꿔왔다고 생각해 왔으나, 


알고보면 지금보다 훨씬 덜 풍요로웠던

1970, 80년대 유년시절에 비하면

수십 배 내지는 백 수십 배 정도의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것

(코로나19 때문에 사용하는 마스크만 해도!),


나아가 

설령 내가 내 유년 시절의 기준으로 

내 삶을 돌린다해도 나의 삶은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배출의 속도를 다소나마 늦추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는 냉혹한 진실

(흥청망청이거나 야금야금이거나), 


하기는 사람이 숨쉬는 것만 하더라도

이미 다소나마 이산화탄소를 

대기에 더하고 있는 것이니,


호프 자런의 새 책 제목마따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3

작고하신 김종철 선생님이 지난 해 칼럼에서

지금 서양에서는 무너지는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쓰신 적이 있는데[각주:1],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배출하는 탄소의 양 자체를 

줄이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배출하는 기간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져서 다시 한번 아찔하고 

아연啞然해지는 것이다. 

  1. 김종철, ‘툰베리의 결기’, “한겨레” 2019. 9. 2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0196.html) [본문으로]

이 글은 2021. 9. 26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

 

 

1

Adagio.

 

이탈리아어 Ad agio,

영어로는 at ease. 

 

편안하게, 

느긋하게,

 

언젠가 찾아올

안식.

 

2

Andante는

이탈리아어 andare(가다)에서파생된 것,

걸음걸이의 호흡과 박동,

속도와 느낌이라면,

 

Adagio는

끝도 없는 길을 오래도록 걸어온 자가

비로소 취하는 휴식, 

또는 

긴 세월 고단한 생을 이끌어온 이에게

마침내 주어진 안식, 

 

어쩌면 

영원토록.

 

3

우리는 걸어가면서 

곧잘 노래를 부른다. 

 

그러므로 Andante가 노래한다는 뜻의 

cantabile와 같이 쓰이는 것은 

그리 낯설지 않다.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가운데 

2악장인 Andante cantabile가 

워낙 유명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면 Adagio cantabile는 그리 흔치 않다. 

아다지오는 어쩌면 노래라기보다는 

읆조림이나 흥얼거림, 

나직한 속삭임이며

기도와 애도에 더 어울릴 법하기 때문이다.

 

4

하지만 베토벤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의 2악장에 

Adagio cantabile라는 악상기호를 붙였다. 

 

이 독백과도 같은, 

홀로 나직이 부르는 노래는

그러므로 슬픔의,

깊고도 깊은 슬픔의 노래, 

탄식과 회한의 노래,

그리하여 말을 잃은 자를 위로하는.

 

훗날 사람들은 이 소나타에

‘Pathetique, 비창(悲愴)’이라는 별칭을 붙인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24번의 1악장과

바이올린 소나타 7번의 2악장에도

adagio cantabile가 붙어있다.)

 

5

아다지오 뒤에

간혹 슬픔과 눈물을 강조하기 위해 lamentoso를,

감정의 풍부함을 담아내기 위해 espressivo를

붙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저 조금 더, 혹은 조금 덜이라는

assai와 molto, ma non  troppo 따위가 

따라올 뿐,

 

아다지오는 아다지오다.

굳이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6

그럼에도 가장 흥미로운 아다지오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유명한 아다지오 악장 가운데 하나는 

베토벤의 c#단조 피아노 소나타, 

이른바 ‘월광’의 1악장이 아닐까. 

 

Adagio sostenuto.

sostenuto는 영어로 sustained, 

지속적이고 한결같은 여유로움.

그러나 나는 sostenuto에서 

지긋이 밟는 피아노의 페달을 생각한다,

 

언젠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떠올린다,

이제 여기 없는.

 

7

아다지오에는 레가토가 어울리는 법, 

근본적으로 레가토를 단지 

일종의 환영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피아노에서보다 

현악 연주들에서 

아다지오가 더욱 빛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를테면 새뮤엘 바버의 “Adagio for Strings”, 

현악4중주 Op.11의 2악장처럼, 

혹은 지아조토(Giazotto)의 곡으로 밝혀진, 

“알비노니의 아다지오”처럼.

 

8

그러나 현악기들 중에서도,

아니 어쩌면 모든 악기들 중에서

아다지오에 어울리는, 

아다지오 그 자체인 악기를 하나 꼽는다면

단연코 첼로가 아닐까.*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 신의 날)”이나

또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

아다지오가 아니고선 어떻게 이 곡들을

연주해낼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아다지오로 시작하는 1악장에서

2악장의 렌토(Lento)와 3악장의 아다지오를 거쳐

4악장에서 아다지오로 종지에 이르기까지,

내내 흐느끼고 소리없이 울부짖고 애도하는 듯한

엘가의 협주곡이야말로 애통함과 서러움, 

지극한 슬픔과 눈물의 정수(精髓).

 

9

아다지오에서

음표들은,

그리고 당연하게도 쉼표들은

영원을 향한다.

 

다른 시간다른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초월적인 힘,

 

명상이거나 참선이거나, 

또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한 

궁극의 깨달음과도 같은.

 

10

베토벤이 1825년에서 1826년 사이, 

세상을 떠나기 한두 해 전에 썼던

후기 현악4중주들에서

아다지오 악장들은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의 생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것은 아닐까. 

 

아다지오로 1악장을 시작하는

현악4중주 13번과 14번은 물론이거니와

12번 1악장의 Maestoso, 

그리고 15번 1악장의 Assai sostenuto 역시

아다지오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고

생각해 본다.

 

11

‘월광’ 소나타의 1악장에서 보았던

Adagio sostenuto는, 

훗날 베토벤의 Bb장조의 29번째 피아노 소나타,

이른바 ‘함머클라비어’의 3악장에 다시 쓰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 f#단조인 

이 소나타의 3악장을

“모든 슬픔을 아우르는 거대한 무덤”이라거나

파울 베커(Paul Bekker)의 말마따나

‘치유할 길 없는 고통과 슬픔의 절정(apotheosis)’이라고 

표현하고들 한다.**

 

12

그러나 한편으로 Apotheosis는 

고통과 슬픔의 절정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과 슬픔을 이겨낸 뒤 얻는

신성성을 이르기도 한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지금–여기’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세계로 이끄는 것,

 

1787년 출판된 하이든의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Die sieben letzen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

Adagio의 서주(Introduzione)로 시작해 

Largo와 Grave, 또다른 Adagio로 이어지는

회한과 탄식인 동시에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13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의 2악장이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의 Adagietto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느린 악장 

Adagio sostenuto에서처럼,

 

평온과 위안과 슬픔 그리고 탄식, 

애도와 기도와 위로,

또한 명상과 때로 영원에 이르는, 

영적인(spiritual) 고양감까지 아우르는 것이

바로 아다지오가 가진 힘

 

14

위의 수많은 아다지오 가운데 

하나만 링크한다면 단연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Bb장조, Op.106 

“함머클라비어”의 3악장이다. 

알프레트 브렌델의 연주.

https://youtu.be/0d9UAVfbp2Y?t=837

                              

 

 


그보다 낮은 음역대의 콘트라베이스는 크기 면에서도 영어의 large를 뜻하기도 하는 Largo가 어울리는 악기다. 

** 위키피디아 문서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Piano_Sonata_No._29_(Beethoven)

해는 어제와 다른 산으로 진다.


西南의 산봉우리에서 西北의 산등성이로,

하지夏至의 거처를 향하여 

끊임없이 유랑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 싼 능선과 봉우리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해시계여서, 


한 곳에서 여러 해를 나다 보면

굳이 달력에 적힌 24절기를 보지 않아도

파종의 시기며 수확의 시기며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정보들은

종종 자연에 기록돼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자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오늘은 망종芒種

보름쯤 뒤에 도래할 하지에는 

동지冬至의 골짜기로 해의 귀향歸鄕

시작될 것이다.


* 이 글은 브런치 포스팅을 위해 2022. 3. 13

수정되었습니다.

 

1

베토벤(Op.61), 차이코프스키(Op.35),

브람스(Op.77)와 슈만(WoO 23),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Op.6),

모차르트의 2번(K.211)과 

4번(K.218)을 비롯해

심지어 프로코피예프의 1번(Op.19)과

코른골트(Op.35)에 이르기까지,

 

왜 가장 널리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은

D장조(라장조)가 많은가.

 

뿐만 아니라

이 못지 않게 사랑받는

시벨리우스의 협주곡(Op.47)과

J. S. 바흐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BWV 1043),

하차투리안의 협주곡(Op.46)은

같은 으뜸음을 쓰는 단조인 d단조이다.

 

왜 바이올린 협주곡은 D를 으뜸음으로 하는

장조와 단조로 많이 씌어졌을까?

 

2

사실 이 문제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음악사와 화성학, 관현악법과 

작곡법 등에 정통해야 할 것이므로

내가 감당할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므로 비전문가로서 그간 찾아보고

이것저것 궁리해본 바에 따라

아주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D는 바이올린의 4개의 현 가운데

아래에서 두 번째 현이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은 아래에서부터,

그러니까 연주자의 몸쪽으로부터

G3 - D4 - A4 - E5로 조율한다.

(참고로 C4~C5가 우리에게 익숙한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역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어떤 이득이 있을까?

 

3

무엇보다 개방현은 당연하게도,

왼손으로 현의 어딘가를 짚은 음보다

더 맑고, 더 음량이 크며,

더 순수한 음을 연주할 수 있다.

 

개방현이 어떤 곡의 으뜸음이라면,

대개 으뜸음으로 끝나는

종지(終止, cadence)에서

가장 명료하고 강렬한 음향으로

끝맺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이올린 협주곡은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음악.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악기는 현악기군이고,

D는 비올라의 위에서 두 번째 현(D4)이며,

첼로의 위에서 두 번째 현(D3)이자,

더블베이스의 위에서 두번째 현(D2)이다.

 

그러므로 한 번 더 단순화자면,

독주 바이올린과 모든 현악기군이

옥타브 간격의 개방현으로

종지부의 으뜸음을 총주(總奏)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원론적으로만 그렇다.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종지는 으뜸음 단음이 아닌

화음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으며

무엇보다 능숙하게 훈련된 연주자들은

톤의 컨트롤을 위해, 

그리고 연주 중에 불가피하게 

조율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개방현 연주를 피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또는 들은 바 있다.

 

3

조금 깊이 들어간다면,

피타고라스 이래로

으뜸음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딸림음(5도 위의 음, 여기서는  A) 역시

개방현으로 얻어질 수 있고,

그 음의 딸림음(E)까지

개방현으로 연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조바꿈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5도와 2도, 고전적인 II - V - I 종지가

악기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

다시 말해 튜닝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4

그렇다면

다시 드는 의문.

나머지 개방현인 G도, A나 E도

마찬가지 아닌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앞의 D장조와 d단조 작품들 못지 않게 

자주 연주되며 사랑받는

멘델스존의 협주곡 Op.64는 e단조이고,

브루흐의 협주곡 1번(Op.26)은 g단조이며

(그보다 덜 알려진 2번 Op.44와 

3번 Op.58은 d단조),

무엇보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Le quattro stagioni)”의

‘봄’과 ‘여름’은 각각 E장조와 g단조이다.

(참고로 ‘가을’과 ‘겨울'은 

각각 F장조와 f단조이다.)

 

또 J. S. 바흐의

1번 협주곡(BWV 1041)은 a단조,

2번(BWV 1042)은 E장조이며,

모차르트의 5번 ‘Turkish’(K. 219)는 A장조,

3번(K. 216)은 G장조이고,

쇼스타코비치의 1번(Op.77)은 a단조,

비외탕의 협주곡 7곡 가운데

2번(Op.19, f#단조)을 제외하면

모두 E, A, D, G가 으뜸음이다.

 

요약하자면

D만큼이나 A와 G, E음도

바이올린 협주곡의 조성으로

곧잘 사용된다는 얘기다.

 

5

그렇다면 왜 그 중에서도

유독 D장조와 d단조 곡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을까?

 

다시 한 번 단순화하자면,

D음은 바이올린의

아래에서 두 번째 현이라서 그렇다.

 

다시 말해

왼손의 포지션을 바꾸지 않고

우리에게 익숙한 높은음자리표 상의

D4에서 한 옥타브 위의 D5를 지나

더 위로는 B5까지 연주할 수 있고,

그리고 아래로는 버금딸림음인

낮은 G까지 내려갈 수 있으니,

 

아찔하게 솟구치는 악구들 뿐만 아니라

숭고하며 웅장한 저음부의 패시지를

왼손의 기본 포지션 내에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현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아닐까.

특히나 왼손의 포지션이 

기본 위치에 가까울수록, 

다시 말해 목(neck)에 가까울수록 

더 투명하고 또렷하며 풍부한 음색을 

얻을 수 있다. 

(브리지 쪽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좀 ‘신경질적인’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이는 곧 같은 소릿결을 가진

오케스트라 내의

수많은 현악기들 속에서

조화로움이 흐트러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독주 바이올린이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밑바탕이기도 하다.

 

6

오스트리아의 음악가이자 교육자였던

에른스트 파우어에 따르면

D장조는 위풍당당함, 장엄함,

위엄과 승리, 축제와 행진곡의 느낌,

그리고 장중함 등을 표현한다.

(Maureen Buja, “How You Should Feel 

in the Key of D Major”. 

https://interlude.hk/feel-key-d-major/ 참고) 

 

독일의 시인이자 음악가

크리스티안 슈바르트 역시

D장조에 대해 마찬가지의 특징과 함께

교향악과 행진곡이 내재돼 있다고 설명하며,

d단조에 대해서는 멜랑콜리와

여성적인 특성, 비장함과 유머를 들고 있다.

(https://wmich.edu/mus-theo/courses/keys.html 참고.)

 

사실 이런 느낌은 어쩌면

평균율에 의한 조율이 정착되기 전, 

혹은 순정율로 연주할 경우에 느껴지는

D장조의 속성일 수도 있겠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D장조 자체가 

현악기군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오케스트라에 최적화된 조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D장조는 현악기에 어울리고, 

그래서 작곡가들이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바로크와 초기 고전 시대의 교향곡과

관현악에 많이 사용하고, 

그러다보니 위풍당당한 D장조라는

일종의 정서적 바탕이 마련된 것. 

 

7

모든 조성에 각각 정서적, 감정적 특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던

낭만주의적인 과잉해석이 아닐까 싶지만, 

그럼에도 아마도 D장조와 더불어, 

어쩌면 오히려 그보다 더 특징적일

Eb장조(내림마장조)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을 수 없겠다.

 

Eb장조는 흔히 ‘영웅적’이라고 여겨지는데,

일명 “영웅(Eroica)”이라는 별칭이 붙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Op.55)의 영향이 

아무래도 매우 크겠으나, 

그 이전부터 귀족들의 사냥 여행에 앞서

연주되던 이른바 

“사냥(le chasse) 교향곡”은

대부분 Eb장조였고, 

이는 Eb장조가 관악기, 특히 금관악기가

앞에 나서기 좋은 조성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과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을 비롯해

많은 호른과 트럼펫 협주곡이 Eb장조이며

초기 고전 시대의 클라리넷 협주곡도 

Eb장조가 상당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악기들의 조음(調音)과 연주 원리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Eb장조가 

(현악기의 D장조와 마찬가지로)

이 악기들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용이하고 적합한 조성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호른과 트럼펫과 같은 금관악기는

전쟁과 사냥에 관련이 깊으며

(이 악기들이 돌진과 퇴각을 알리는

수많은 영화의 장면을 떠올려 보라),

특히 사냥 교향곡과 같은 경우는, 

근현대의 브라스 밴드의 행렬처럼 

야외에서 연주되곤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관악기들이 중요했으므로

Eb장조라는 조성이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관악기들은 기본 조성이 

여러 가지인 경우가 많으며, 

바로크에서 고전을 거쳐 낭만으로 오면서

많은 변화와 개량을 거쳤기에 

이 또한 그저 비전문가의 아주아주 

단순화된 추측임을 (변명삼아) 덧붙여 둔다. 

 

1

봄에 사다 심은 라임라이트, 

네덜란드 나무수국은

하필 몹시도 건조하고 바람도 강한

봄날씨에 화상을 입듯

위쪽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넓지 않은 뜰이지만

좀 더 그늘지고 습한 곳으로

두 번씩이나 옮겨심어가며 지켜봤더니

얼마전 새 잎들을 밀어올리고는

드디어 꽃대까지 올라왔다. 


식물을 잘 키우기란 참 어렵지만

특별히 병이나 벌레만 없다면

죽이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그 경이로운 생명력이라니.


2

뽑고 돌아서면 생겨난 것이

밭의 잡초라더니, 


집이 깔끔하게 보이자면 어쩔 수 없이 

가끔씩 뽑아주고 정리해야 하는 

이른바 ‘잡초’들,

실로 그렇다. 


뿌리만 살아있어도, 

혹은 어떤 풀들은 줄기든 잎이든

한 부분만 흙에 착생하고 나면 

엄청난 융통성으로 조직을 변형시켜

뿌리도 내리고 잎도 꽃도 만들어내는 

그 유연함이라니. 


역시 식물을 죽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


3

그러나 미우나 고우나

저마다 이름이 있고 용처(用處)가 있으며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약으로도 쓰는 

이런 풀들을


무작정 ‘잡초’로 뭉뚱그려 부르고

무조건 뽑아버리고 

때로 제초제까지 쓰는 건 

또 얼마나 무식하고 무지한 일인지.


춘궁기로 굶주리던 시절,

죽거나 배앓이 할 식물이 아니라면

뭐든지 먹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각주:1]

뜯어도 캐어도 다시 자라나는 

이 강인한 초록의 생명체들이

오히려 자연의 귀한 선물이었을 터.


4

그러므로 

괭이밥풀이며 토끼풀,

고들빼기와 쑥, 살갈퀴, 씀바귀에 

망초 등속의 풀들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


이제는 적당히, 

너무 자란 것들만 솎아내고

같이 어울려 자라게끔 놔두어

가끔씩 식탁에 올리기로 한다. 


그렇게 다른 생명체들과 

같이 사는 법을, 

또 하나씩 배워간다. 


  1. 니체가 언젠가 썼듯이, 우리를 죽일 수 없는 것이라면 늘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법이 아닌가. That which does not kill us, makes us stronger.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