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무지개 너머에 
뭔가 대단한 게 있으리라는
헛된 꿈은 버린 지 오래, 
세월의 풍파에 휩쓸려 방황하는 자에게

그래도 당신 만의 어떤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낙관은 아니라도
최소한 위안은 될 수 있다고, 
설혹 그것이 아무리 씁쓸한 
위로라고 할 지라도,

이토록 어둡고 황망한 목소리라니,
듣는 순간 마른 얼굴을 쓸어내려야 할 법한,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올 듯한 
속삭임이라니,

인도네시아 태생 프랑스 보컬 세레나 피소와
뱅상 페라니의 아코디언 연주가 함께 한,
올해 5월에 나온 앨범 “So Quiet”의 
마지막 트랙, 
Over the Rainbow.



6월에 다녀간 러시아 친구가

선물로 가져다 준 이 정체불명의 상자를

언젠가는 열어봐야지 하면서도 

무슨 결명자처럼 생긴 걸 어떻게 먹나 싶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드디어 오늘 친구가 가르쳐 준 대로

끓는 물에 팔팔 10분 정도 익혀

샐러드와 함께 먹어보니 

아니, 이럴 수가, 

이런 쫀득하고 놀라운 맛이라니.


‘크루파 그뤼예취니예바야...’ 어쩌고 하는 이름을

안 되는 러시아어로 타자를 쳐 검색해보니

다시 한 번 아니, 이럴 수가, 

이게 메밀이었다니. 


하기는 우리나라에서야 

빻아서 가루를 내 묵을 쑤거나

국수를 말거나 아니면 메밀전병을 해먹든가

혹은 아예 볶아서 차로 우려 내지, 

통으로 삶아서 샐러드에 먹는다거나

아니면 밥에 넣는 경우도 극히 드물테니

메밀의 낟알, 도정한 낟알을 본 건

생전 처음인 게 당연했다. 


글루텐이 없고 단백질 함량이 높으며

비타민과 아미노산 등 이것저것 

좋은 것도 많이 들어있다고 하고, 

무엇보다 쫄깃한 식감이 좋아

채식을 하는, 또는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꽤 매력적인 곡물일텐데,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도 ‘깐메밀’ 또는 

‘메밀쌀’로 검색하면 판매하는 농가가 좀 있는 듯. 


그 중 한 곳에서는 메밀은 산패가 빨리 돼

주문하면 그제서야 도정해 판매한다고 하니 

우선 1킬로그램을 주문해 봐야겠다. 


만약 러시아산 메밀 맛과 차이가 나면

동대문 쪽을 헤매다 보면 

러시아 식품점이 있지 않을까, 

안 되면 부산 러시아 거리에라도 가든가

어떻게든 구해지겠지,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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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 레더먼, “신의 입자”, 

리처드 뮬러, “나우 - 시간의 물리학”, 


당대 최고의 실험물리학자들이 쓴, 

그래서 근본적으로 어려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아주 난해하지 않으며 심지어 재미있는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마침내 깨달은 것은, 


내가 우주와 양자물리학에 대한 책을 

더이상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해도 

결국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모든 방정식들과 

입자들의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세계와 시간, 그리고 공간의 의미, 

또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결코, 완전히는 커녕, 조금 더 나은 이해조차도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하기는 남아있는 生을 굳이

물리학 만을 벗삼아 지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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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누가 칭찬을 하면 

진짜인 줄 알고

좋아라 했는데, 


나이가 좀 들고보니

누가 칭찬을 하면

진짜가 아닌 줄 알면서도

좋아하게 된다.


물은 끈적거린다, 


한여름 마루바닥을 딛을 때, 

혹은 쓰레기봉투를 벌리기 위해

개수대 물을 손가락에 살짝 묻힐 때,

아니면 투명한 플라스틱 필름 사이

물기가 있을 때를 상상해 본다면


먼 옛날 바다에서

분자 수위의 결합들이 일어나

단백질이 형성되고 결합되어

이윽고 원시생명체가 태어났다는 것을,


이토록 습하고 끈적거리는 계절에

새삼 그것이 그러했을 거라는 사실을,

누군가의 ‘지적 설계’ 없이도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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