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 낭만주의 그리고 숲. 
세 가지 키워드를 조합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적어도 내게는 ‘unheimlich’다. 

기이하고 으스스하고 낯선 무엇. 
집의 편안함과는 정반대의 장소. 

더군다나 슈만이라면, 
누이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우울과 
정신적인 문제들로 평생을 싸웠던 슈만에게라면, 
그런 숲을 연상하는 것도 
퍽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2
대체로 슈만의 피아노 음악들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고
전개나 발전, 혹은 견고한 형식과는 상관없이 
늘 부유하는 듯이 들린다. 

불안과 평온 사이를 정처없이 방황하는, 
닻을 내릴 곳을 찾지 못한 음표들. 
그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줄곧 되돌아오는 듯한, 
끝에서 시작하는 듯한”,[각주:1]

혹은 “언제나 소심한 태도로 쭈뼛거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 하며, 
“민감하고 여린”, 
마치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말하는”[각주:2] 듯한, 

그런 종류의 음악,
어둡거나 애틋하거나. 

3
하지만 1848년에서 49년에 걸쳐, 
그의 정신이 그나마 ‘온전했던’ 시기에 씌어진
“숲의 정경Waldszenen”, Op.82은 예기치 않게 
첫 곡부터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이다. 
‘Eintritt(입구)’로 시작해 ‘Abschied(고별)’로 끝나는, 
목가적이고 소박한 산책. 

그러므로 생각컨대, 
슈만의 이 숲은 아침해가 밝아오는 숲. 
열 보만 걸어 들어가도 어둑어둑한, 
한낮에도 깊은 그늘로 스산한 숲이 아니라,

혹은 한밤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그림자라거나
아니면 나로 인해 놀란 작은 생명체들이 바스락거리며
그 두려움과 공포를 몇 배로 증폭해 내게 돌려주는,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등골이 서늘한 그런 숲이 아니라, 

아침해가 밝아오며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뿜어 내는 안개 사이로 
비추는 갈래진 햇살들에
밤새 내린 서리와 이슬이 새삼 눈부신. 

4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받는다고 하는
g단조의 ‘Vogel als Prophet(예언하는 새)’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슈만스러움 덕분에
이 작품의 당혹스러운 쾌활함에서 비켜나 있고,
네번째 곡 ‘Verrufene Stelle(저주받은 장소, d 단조)’ 역시
비슷한 성격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새는 무엇을 예언하는가?

5
사실은, 어쩌면, 
이 작품은 숲으로의 산책이 아니라
사냥 여행에 바쳐진 곡인지도 모른다. 

숲의 초입을 들어서면 바로 사냥감을 노리는, 
숨어 기다리는 사냥꾼의 매서운 눈길이 
관심을 끌고(2곡 ‘Jäger auf der Lauer’), 

7번째 곡인 ‘예언하는 새’의 불길한 전언을 접하고 나면
개선을 알리는 듯한 ‘Jagdlied(사냥의 노래)’가 
Eb장조[각주:3]로 숲을 울린다. 

그러므로 어쩌면 저 새소리는, 
어쩌다 보니 사냥의 희생물이 된 동물의 
처연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인지도.

홀로 피어난 꽃들(3곡 ‘Einsame Blumen’)을 살피며
귀신 들린 곳(4곡)을 지나
이윽고 익숙한 풍경들(5곡 ‘Freundliche Landschaft’)
그리고 아마도 지난번 사냥에도 들렀던 
여인숙(6곡 ‘Herberge’)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냥의 여정. 

6
이 곡에 대한 정보를 찾다보면 
하인리히 라우베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다 .
그의 “Jagdbrevier(사냥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인데, 
절반 정도만 맞는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가장 신뢰받는 악보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헨레(Henle) 사의 작품 해설(링크)을 보면, 
1849년 1월 작곡을 마치고 이듬해 가을 출판되기 전까지
슈만은 타이틀을 이것저것 바꿔보고
동시대 시인들의 숲과 관련한 시들을 수집했다고. 

그 가운데에는 Liederkreis, Op.35의 시를 쓴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도 있고, 
앞서 언급한 라우베구스타브 파리우스와 
프리드리히 헤벨과 같은 이름[각주:4]이 보인다.

7
앞서 ‘예언하는 새’가 아마도
사냥당하는 존재에게 경고하는지도 모르겠다 했는데, 
실제로 슈만이 수집한 시구들에서 이 예언이란
아이헨도르프의 불길한 경고다.

Hüte dich! Sei wach u.[nd] munter! 
(Take care! Be awake and alert!)

그러므로 흔히 블로그들에 보이듯이
슈만이 정신적인 문제들을 갖고 있어
아름다운 새소리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깃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안감은 의도된 것, 
바로 뒤의 의기양양한 사냥꾼의 노래, 
‘Jagdlied’를 위한 프롤로그인 셈인 것이다.  
조성 역시 g단조에서 Eb장조로, 
‘영웅’[각주:5]의 조성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럴 법하지 않은가.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의 정경”의 전체적인 정조는
간간히 들리는 불협음들에도 불구하고 
밝은 기운이 지배적이며, 
무엇보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악보 역시 극악의 난이도를 보이지는 않으니,
피아노를 웬만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롤랑 바르트의 말마따나 
특유의 내적 요소 때문에 청취보다 연주에 더 적합[각주:6]
그의 음악을 건반 위에서 접해도 좋을 듯. 

9
사실 이 작품은 
“나비Papillons”, Op.2부터 
“유령변주곡Geistervariationene”까지 
슈만의 피아노 음악들 대부분을 담아 앨범으로 내놓은
안드라스 쉬프 덕분에 좋아하게 된 곡이지만, 

서두에 붙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도 
참 좋다고 할 밖에. 


  1. 미셸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La tombée du jour”, 김남주 옮김, 서울:그책, 2015 [본문으로]
  2. 이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슈만에 대한 비판.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이미연 옮김, 서울:시간의흐름, 2018. p.19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당연히 Eb장조는 ‘사냥’의 조성이다. 왕족과 귀족들에게 헌정된 수많은 사냥 음악들도 그러하거니와, 고전시대 이후 이 조성은 트럼펫과 호른의, 눈부신 금관의 조성이 아니던가. [본문으로]
  4. “Meanwhile, Schumann experimented with alter􏰀 native titles and collected relevant verses from sylvan poems by contemporaries – Joseph von Eichendorff, Friedrich Hebbel, Heinrich Laube, and Gustave Pfar􏰀􏰀rius – for possible use as mottos” [본문으로]
  5. Eb장조를 베토벤의 “에로이카”, 혹은 피아노 협주곡 “황제”와 어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본문으로]
  6.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이미연 옮김, 서울:시간의흐름, 2018. p.191 [본문으로]

이제 무지개 너머에 
뭔가 대단한 게 있으리라는
헛된 꿈은 버린 지 오래, 
세월의 풍파에 휩쓸려 방황하는 자에게

그래도 당신 만의 어떤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낙관은 아니라도
최소한 위안은 될 수 있다고, 
설혹 그것이 아무리 씁쓸한 
위로라고 할 지라도,

이토록 어둡고 황망한 목소리라니,
듣는 순간 마른 얼굴을 쓸어내려야 할 법한,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올 듯한 
속삭임이라니,

인도네시아 태생 프랑스 보컬 세레나 피소와
뱅상 페라니의 아코디언 연주가 함께 한,
올해 5월에 나온 앨범 “So Quiet”의 
마지막 트랙, 
Over the Rainbow.


이 글은 2021. 10. 3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

 

1

당연한 이야기지만 

종교음악을 좋아하기 위해

종교를 가질 필요는 없다.

 

하이든이 1785~6년 사이

스페인 카디스의 한 교회로부터 위촉받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역시

어떠한 믿음과 상관없이 

감상하고 좋아할 만한 작품이다. 

 

2

원래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서주와 후주인 “땅이 울리다”에 둘러싸인

7개의 소나타로 구성돼 있는데,

각각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에 해당한다.

 

하이든이 훗날, 아마도 1801년에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 사에서 출판된

오라토리오판 악보에 밝힌 바에 따르면, 

카디스의 교회에서 사순절 기간 

검은 천으로 창문과 벽, 기둥을 감싼 뒤

단 하나의 램프 만을 밝혀둔 채로, 

사제가 일곱 말씀에 대해 

하나씩 읽고 강론한 뒤

각각의 말씀에 해당하는 소나타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야말로 악기들로 올리는 기도이자 묵상, 

삶과 죽음의 근원에 대한 음악적 사유.

 

3

아다지오에 대한 앞의 글에서도 썼지만

기도와 묵상에 아다지오 만큼 잘 어울리는 

악상기호가 또 있을까.

 

하이든은 앞에 언급한 악보 서문에서

청중을 지루하게 하지 않으면서

7곡의 ‘아다지오’로 작품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7개의 소나타가 각각

Maestoso ed adagio, 

Largo, Grave e cantabile, 

Grave, Largo, Adagio와 

Lento로 구성돼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하이든이 느린 곡들 사이에서 

빠르기와 전체적인 느낌을 조정하기 위해

다양한 악상기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소나타가

아디지오의 정서를 바탕으로 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든의 말마따나 1시간 가량의 작품을

빠름과 느림의 조화 없이도

적절하게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그는 뛰어난 작품을 완성했으니

‘불가능에 가깝다’는 그의 말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든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공치사 정도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독일어 제목으로는 

<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이며, 

영어로는 

<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로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네 글자의 한자어로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한다.

 

첫번째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두번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세번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네번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흔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도

잘 알려진 구절이며, 

다섯번째는 ‘내가 목마르다’,

여섯번째 ‘다 이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번째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구성된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얕은 관계로

각각의 말씀에 대한 한글 번역은

하이든의 이 작품에 대한 입문서인

강신덕, “이 사람을 보라”(토비아, 2021)를

참고하여 정리했음을 밝혀둔다.)

 

5

앞서 언급했듯이 원래는 관현악곡으로

1786년 완성돼 이듬해인 1787년 출판됐으나,

같은해 하이든 자신이 현악4중주로 편곡했고,

건반악기를 위한 버전은 누군가에 의해 

완성된 초안을 하이든이 감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수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첨삭이 있었는지, 

또 원래 초안을 만든 작곡가는 누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강신덕의 “이 사람을 보라”에는

체르니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고,

악보 사이트인 imslp.org의 악보 가운데에도

체르니 편곡으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가 아는 카를 체르니는 

이 곡이 출판된 이후인 1791년 태어났으니, 

내가 모르는 다른 체르니가 있었거나

아니면 이 곡의 다른 편곡버전이 있거나,

혹은 그저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는 듯하다.

 

현악4중주와 피아노 버전의 악보 모두

1787년 출판되었는데,

피아노판은 감수했다고는 하지만

헨레(Henle)에서 나온 Urtext 악보의

서문에 인용된 하이든의 편지에 따르면 

그 자신은 출판된 악보에 대해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첫 작곡의 10년 뒤인 1796년에는 

오라토리오판을 작곡해 1798년 초연되고,

1801년에 악보를 출판한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들을 그린만큼

작품이 밝을 수는 없겠으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의 죄를 사하고,

강도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이 땅에 와서 이루고자 한 것들을

스스로의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음을 깨닫고

마침내 신께 영혼과 육신을 내어드리는 과정,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 일곱 말씀이란 절망과 원망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 깨달음과 

궁극적인 초월로의 과정이기에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차분함과 위로, 용서의 정조다.

 

간혹 불안한 조성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는데,

 물론 그리스도가 마지막 숨을 거둔 후, 

땅이 흔들리고 성전이 갈라지는 후주, 

c단조의 Il terremoto(땅이 울리다)는 

예외가 되겠다.

 

7

하이든은 7개의 소나타에서

각각의 말씀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기초삼아

악상을 전개시키는데, 

이 모티브들의 반복으로 인하여

십자가 위에서의 모진 고통의 시간,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없이 외는,

간절한 기도처럼 느껴진다.

 

각각의 소나타가 모두 매력적이지만,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와의 대화인 세번째 소나타와

여섯번째 소나타인 

‘Consummatum est(다 이루었다)’이다.  

 

E장조의 세번째 소나타

‘Mulier, ecce filius tuus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의 첫 주제는

마치 아들이 어머니에게, 

또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하는 위로처럼

아이를 달래는 자장가를 닮았다.

“라루스 세계음악사전”(탐구당, 1998)에서는

불확실한 조성과 불의의 전조, 싱코페이션 등으로

표현상 불안한 곡으로 설명하지만, 

나는 일곱 곡 가운데서도

가장 다정한 곡이라고 생각한다. 

 

여섯 번째 소나타, 

‘Cosummatum est(다 이루었다)’는

단독으로 듣기에도 전혀 손색 없을만큼

구성이 매력적이지만,

 특히 g단조(사단조)로 시작해

같은 으뜸음조인 G장조로 끝난 뒤

다음 곡인 7번째 소나타에서는

장3도 아래의 이른바 ‘영웅적’인 

Eb장조(내림 마장조)로 이어지고

마지막 후주 ‘Il terremoto’에서는

그와 나란한 조인 c단조로 끝맺음하니,

이 영웅적이지만 비극적인 드라마의

종결부로 훌륭한 선택일 수밖에. 

 

하지만 정말 인상적인 것은

여섯 번째 소나타에서 계속 들려오는,

 하행하는 16분 음표 네 개에 이어지는

8분음표 네 개의 상승음형, 

또는 그것의 변형으로 이뤄진

악구의 반복적인 패턴이다.

악보출처: http://imslp.org

육신의 힘이 다해 자꾸 떨궈지는 고개,

그러다 문득 기운을 내어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이거나,

혹은 아직 못다한 일들이 남은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는 몸짓이거나,

16분음표의 하강과 8분음표의 상승음형은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 는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망설임과 주저, 

끝까지 지상의 인간들을 염려하는 

고뇌에 찬 시간을 마치 음표로 그려내듯

생생하게 전달한다.

 

8

관현악 버전이나 현악 4중주도 그렇지만, 

피아노 독주를 위한 편곡은 

더욱더 명상적이다. 

아마도 여러 다른 연주자들이 

함께 해야하는 관현악이나 4중주와 달리, 

홀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야 하는 

악기여서 그런 것일까.

마치 십자가 위의 시간은 결국

오롯이 예수 혼자 겪어내야만 하는

것이었듯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이 곡이 가장 사랑받는 편성은 현악4중주지만

나는 피아노 연주 앨범을 듣고 나서야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아직 초급 수준이지만

언젠가 피아노를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연주해보고픈 바람도 작용했을 테지만.)

 

9

아는 게 부족하니 

뭐라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 곡의 현악4중주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들이 떠오른다.

 

후기 현악4중주들에서 

느린 악장들의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이 돋보이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현악4중주 14번 c#단조, Op.131의

느린 안단테 악장인 4악장의 변주곡은, 

전체 악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가장 크고,

모티브의 반복이라는 변주곡 특성상

하이든의 “일곱 말씀”과 참으로 닮았다. 

 

더구나 14번은 전체 7악장이고,

4악장의 변주곡 역시 7개의 변주라고 하니

하이든의 7개의 소나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다.

 

또 15번의 느린 3악장(Molto adagio)에는

1824~5년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베토벤이

‘병에서 회복한 사람이 신께 바치는

거룩한 감사의 노래’라는 

문구를 적어넣었으니, 

대푸가를 포함해 

후기 현악4중주를 작곡하던 당시

만년의 베토벤이 어쩌면

숙명처럼 다가오던 죽음의 그림자를,

삶과 죽음에 대한 기도와 묵상을

이 작품들에 담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도 죽음 앞에 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담아낸

하이든의 “일곱 말씀”에서

자꾸 훗날의 베토벤 4중주들이 

연상되는 것이다.

 

10

이 곡의 건반악기 연주를 추천한다면

하이든 해석으로 유명했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존 맥케이브(John McCabe), 

그리고 시대연주로 포르테피아노 앞에 앉은

로날드 브라우티험(Ronald Brautigam)을 꼽겠다. 

현악4중주 연주는 에머슨 4중주단과

보로딘 4중주단의 연주라면 

훌륭한 시작이 될 것이다.

 

낭만시대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합창 버전에 밀려

연주횟수도 얼마 되지 않고 

현대적 악보도 드물었다던 관현악 버전은,

다행히 시대연주의 붐과 맞물리면서

좋은 녹음들이 많이 나왔다.   

프란스 브뤼헌과 18세기 오케스트라,

그리고 조르디 사발의 음반이 좋았으며

사발의 연주에는 각각의 소나타 앞에

마치 당시를 재현하듯 

라틴어 텍스트를 낭송한다.

만약 시대악기 연주가 낯설다면 

리카르도 무티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오라토리오(합창)버전은 

역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의 조합.

 

11

기도와 묵상은 비단 

종교인 만의 것은 아닐테다.

삶과 죽음의 문제, 

곧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고뇌하는 모든 이에게

음악으로 드리는 기도와 묵상인 

하이든의 “일곱 말씀”은 음악으로 행하는, 

사유와 명상의 훌륭한 사례가 아닐까. 

 

종교나 영적인 가르침이 그렇듯

훌륭한 예술작품 역시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물질주의와 세계의 혼탁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 허락된, 

작지 않은 위안과도 같은 것이다.

 

12

마지막으로 연주 동영상은, 

위에서 언급한 음반들보다 실연 동영상을

2가지 링크한다. 

 

첫번째는 키아라 현악4중주단의 연주. 

무대의 조명이나 각 소타나 앞의

영어 텍스트 낭송을 통해 

하이든이 묘사한 교회의 분위기를

 조금쯤 느껴볼 수 있겠다. 

참고로 제2바이올린을 맡은 사람은

한인 바이올리니스트 윤혜영씨라고 한다. 

(영어로는 혜영 줄리 윤이다.)

https://youtu.be/R2ljYXsWWGs

                              

 

두번째 동영상은 

게리트 치터바르트라는 

포르테피아노 연주자가 올린 영상. 

연주 자체도 나쁘지 않고, 

시대악기의 연주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https://youtu.be/2BOqWk_ByO8

                              

Ranky Tanky, O Death


나이가 들수록 지나친 기교나

이런저런 복잡한 이론이나

개념들로 치장한 것보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좋아지는데,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조지아주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좀 더 넓게는 노스 캐롤라이나와 

플로리다의 잭슨빌까지의 지역에서

저지대 해안가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아프로-아메리칸 그룹인 ‘걸러(Gullah)’ 문화

음악을 현대화시켜 계승했다고 하는, 


2016년 결성된 앙상블 

랭키 탱키(Ranky Tanky)의 O Death

제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장송행진곡의 곡조와 리듬을 사용한 곡.

특히 이렇게 질질 끄는 리듬은

내게는 언제나 족쇄가 채워진 

노예들의 걸음을 생각나게 한다. 


2017년 데뷔 앨범 “Ranky Tanky”에 이은

두번째 앨범 “Good Time”을 최근 내놓았는데,

데뷔 앨범은 2018년초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 1위까지 올랐다고. 

메인 보컬인 Quiana Parler의 구성진 보이스와

트럼펫, 기타(이자 또다른 보컬), 드럼, 

베이스의 간결한 구성으로

가스펠, 재즈와 블루스, 소울의 원형을 찾아 

익숙하지만 새로운 음악으로 들려준다. 


 Ranky Tanky, Good Time


아래 링크의, 

새 앨범 Good Time의 마지막 트랙인

Shoo Lie Loo의 라이브에서처럼,

이런 아프로-아메리카 교회의 

영적인 Call & Response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걸러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라인댄스, 특히 70년대부터 35년간

사랑받은 미국의 장수 프로그램,

TV쇼 “Soul Train”을 연상시키는

흥겨운 분위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아프로-아메리카 음악에는 

그저 음악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는 듯.


Ranky Tanky - Shoo Lie Loo






아, 
신들린다는 것은
이런 것,
기타라는 악기는
이렇게 치는 것이로구나.

‘로드리고 이 가브리엘라’[각주:1]의 연주는
언제 들어도, 
또는 이렇게 영상으로 보아도
몸을 들썩이게 만든다. 

이제 더이상
業으로 새로운 음악을 
모니터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앨범들을 모니터하는 건, 

아직도 세상에 내가 모르는 
좋은 음악들이 많아서이고,
다행히 올해 새 음반 “Mettavolution”을
발표한 덕분에 이런 뮤지션들을 알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 때문. 

멕시코 출신의 두 연주자, 
가브리엘라 킨테로(Gabriela Quintero)와
로드리고 산체스(Rodrigo Sanchez)의
듣는 이의 넋을 빼놓는, 
인상적인 조화. 

다음의 영상은 KEXP 방송에서의 실황.
초반에 광고가 하나 끼어들어
좀 짜증스럽긴 해도, 
43분에 이르는 라이브를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다. 



  1. Rodrigo y Gabriela는 ‘로드리고와 가브리엘라’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로드리고 이 가브리엘라로 통용되는 듯하다. [본문으로]

Bach - Goldberg Variations


1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모를 수는 있어도,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아와

마지막 반복되는 아리아 다 카포 사이, 

30개의 변주곡의 구조를 다 이해하기란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 또한 쉽지는 않지만.


3

원래 하프시코드를 위해 씌어졌으나 

1985년, 아제르바이잔 출신[각주:1]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시트코베키가

현악3중주 버전으로 편곡한 것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비올리스트 제라르 코세와 함께 

앨범을 발표한다.


이 편곡 버전은 다른 연주자들이 

여러 차례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고

아예 확대편성해 

현악 오케스트라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우아하고 섬세하며 대위법적인 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반면

뭐랄까, 피아노로 연주한 

골트베르크 연주가 가진 생동감 면에서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 들곤 했다.


4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침머만, 

프랑스 비올리스트 앙뜨완느 타메스티, 

스위스의 첼로 연주자 크리스티안 폴테라 

3인으로 구성된 트리오 침머만의 

새로운 골트베르크 음반은 뭔가 달랐다. 


사실 음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시트코베츠키의 편곡이겠지, 

그러나 믿고 듣는 침머만이니

그래도 들어봐야겠지, 싶어서

청음을 해본 것이었으나, 

알고 보니 세 사람의 

독자적인 편곡이었던 것. 


나중에 음반이 나온 

BIS 레이블 홈페이지에서 보니

골트베르크의 원곡에 충실한 편곡이라고.

그래서일까, 사뭇 심심했던 

시트코베츠키 버전과는 달리

강약도, 빠르기의 변화도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세 악기의 표정도 더 풍부하다. 


이런 비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트코베츠키의 음반이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것 같다면

침머만 3중주단의 편곡은

글렌 굴드의 연주와 비슷하달까.

파격적이고 신선하다.


5

불행히도 아직 유튜브나 어디서도

이들의 연주가 공개되지는 않은 듯 하다.

실황이나 음반 트랙을 링크할 수 없을 경우

웬만하면 포스팅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연주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음원의 링크는 훗날로 미루고

우선 느낌부터 정리하기로 한다. 


6

누군가 내게 피아노 버전을 추천하란다면,

당연하게도 머레이 페라이어와 글렌 굴드.

그리고 안드라스 쉬프의 ECM 음반과

이고르 레빗[각주:2]베아트리스 라나, 

라르스 포크트를 꼽겠다. 


PS

그래도 조금은 아쉬워서, 

시트코베츠키–마이스키–코세의 

1985년 독일 실황 연주를 첨부한다. 

앨범의 연주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치는 연주.

이렇게 들으니 트리오 침머만과

우열을 가린다는 건 

무의미한 것 같기도.






  1.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고 그래서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로 흔히 소개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2. 이고르 레빗의 “바흐: 골트베르크–베토벤: 디아벨리–르르제프스키: 단결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Sony, 2015)는 기획도 연주도 매우 훌륭한 앨범으로 기억한다.. [본문으로]

이 포스트는 브런치 포스팅을 위해

2021.10.18 수정되었습니다.

 

*

 

1

슬픔으로 말을 잃은 이에게 

음악은 때때로 작지 않은 위안,

 

그러나 어떤 슬픔은 

설령 삶이 다한다 한들

닳아지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돌처럼 단단히 굳어지는 것이어서,

 

(하기는 어쩌면 그나마 시도 때도 없이 

일렁거리고 출렁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언제라도 눈물이 충분하지 않은

그런 종류의 슬픔도 있는 것이어서,

서툰 위로 대신 침묵이 나은 법도 

있는 것이어서,

 

2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다,

 

요한 파헬벨의 이 곡은

1683년 출판한 건반악기를 위한 작품집

⟪Musicalische Sterbens-Gedanken

(죽음에 대한 음악적 사유)⟫에

다른 세 곡과 함께 실렸다고 여겨지는데

(작품집 자체는 현재 망실됐으나

후대의 복원에 의하면 이 곡은

거의 확실히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도 같은해 9월 역병으로 잃은

부인과 아이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지어진 제목이 아닐까, 추정된다. 

 

3

Memento mori, 

누구나, 나와 당신을 포함해 

누구나 마땅히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문구는

이제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인용되면서

충분히 진부해졌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을 더 잘 이해하고 

덜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안톤 바타고프가 연주하는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을

듣다보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아가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한번쯤

겸허히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4

하지만 이제 (어쩌면) 당신도 

작품을 들어 알게 되었다시피, 

D장조의 이 곡이 노래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슬픔 만은 아니다.

(확실히 작품집에 포함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두 곡 역시 

단조가 아닌 장조다.)

 

물론 이 곡은 사랑하는 이들을

느닷없이 잃은 사람의 애가(哀歌)이겠으나,

어쩌면 비탄과 눈물이라기보다는

천상에서의 지복(至福)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와도 같은 것,

 

이별도 두려움도 없는,

나아가 고통도 쇠락도 초월한 세계,

안톤 바타고프가 앨범 속지에 쓴 글처럼,

이 음악은 죽음과 

죽음 너머에 대한 명상이자

죽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준비요,

배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5

파헬벨의 원곡은

주로 오르간으로 연주되게끔 지어진, 

‘코랄과 8개의 파르티타’이다

(주제와 8개의 변주, 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다).

 

바타고프는 2015년 출반한 

같은 제목의 음반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는데, 

아마도 요한 고트프리트 발터가 

편곡했다고 알려진, 

코랄과 5개의 변주곡 버전인 듯하다. 

(각각의 악보는 imslp.org에서 구할 수 있다,

요한 파헬벨의 악보, 발터의 악보.)

 

전체 악곡은 단순한 편으로

먼저 두 개의 악절로 된 코랄(주제)은

네 개의 성부(voice)를 위한 것인데,

첫번째 악절은 반복해 연주하며,

그리고 두번째 악절에서는

5도 위인 A장조로 살짝 전조되기도 한다. 

 

이어지는 5개의 변주는,

이를테면 J.S. 바흐의 푸가처럼

복잡한 대위법적 작법이라기보다

(그의 캐논과 지그 D장조에서처럼)

훨씬 단순하고 명료하며 

주제 선율이 잘 들리는 구조로 되어있다. 

 

6

단순한 화성 진행의 무한한 반복과 변주,

그럼으로써 드러나는 멜로디와

음악적 질감의 미묘한 변화,

 

이러한 변주곡의 어법이야말로

영원 속에서의 평온한 삶을

기원하기 위한 적절한 방식이 아닐까.

 

익숙한 선율의 반복을 통해 표현되는

지극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간절히 되뇌는 기도와 같은 것,

그럼으로써 떠나 보낸 이들이 

천상의 지극한 복락(福樂)을 

누리기를 바라는, 

지극한 정성이 담긴 축원과도 같은 것.

 

7

그러나 도대체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슬픔이 다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남아있는 자의 기도가 

완료되는 시점은 과연 또 언제일 것인가.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tum,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다시 말을 잇는다, 

언제라도 눈물이 충분하지 않은

그런 종류의 슬픔도 있는 것이어서,

서툰 위로 대신 침묵이 나은 법도 

있는 것이어서,

 

슬픈 이들이 단지 마음놓고 슬프도록, 

슬프다는 이유로 눈치보지 않도록,

슬픔이 온전한 슬픔이 되도록

그 손 위에 가만히 나의 손을 

올려 놓으며,

 

이제 나는 마땅하게도

파헬벨의 이토록 고요한 슬픔, 

담담한 음악적 애도(哀悼)와 함께

윤동주의 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 ⟨팔복⟩ 전문

 

 

 


J.S. 바흐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두 곡 남겼는데, 

그 중 첫번째인 BWV 262는

파헬벨의 이 작품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가사 없이 남겨진 악보에 후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여 

노래하기도 한다. 

 

Alle Menschen müssen sterben,

Alles Fleisch vergeht wie Heu;

Was da lebet muss verderben,

Soll es anders werden neu.

Dieser Leib, der muss verwesen,

Wenn er ewig soll genesen

Der so grossen Herrlichkeit,

Die den Frommen ist bereit.

 

영역본을 참고하여 대충 요약해보자면,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삶은 여기서 다하지만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얻고

마땅히 받을만한 이들은

위대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

 

이 가사를 알고 나면, 

왜 안톤 바타고프가 앨범에 쓴 글에서

이 ‘다른 세상’에 이르기 위한 

첫번째 관문으로 제시한 것이

파헬벨의 작품 제목을 직역한

 ‘we must die(우리는 죽어야만 한다)’였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angela hewitt waldstei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
안젤라 휴이트가 
베토벤 소나타 시리즈를 새로 내놓았다. 
Opp.2-1(1번), 14-2(10번), 
53(21번 발트슈타인) 과 54(22번).[각주:1]
드디어 그녀가 ‘발트슈타인’을! 싶어
얼른 들어보니 역시나, 싶다. 

2
32곡의 베토벤 소나타 가운데
가장 아끼는 곡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곡, Op.53 C장조이다. 

8분음표의 연타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듣고 있노라면
내 심장도 같은 박자로 뛴다. 
이토록 설레는 시작이라니. 

더 흥미로운 건
오른손의 경우 첫 반박자를 
쉬고 들어간다는 것. 
이미 첫 음표부터 
듣는 이의 혼을 빼놓는다.

그런 리듬의 담대한 사용이야말로
베토벤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하는 편.

* Downloaded from https://imslp.org



3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의 연주에 대한 평가는 
나의 경우 보통,
위 악보의 네 마디를 포함한
도입부 열세 마디에서 결정되곤 한다. 

특히 저 첫 네 마디에서
마치 메트로놈과 같은 정확성으로, 
그러면서도 디테일을 유려하게, 
첫 두 마디 뒤에 이어지는 
셋째 넷째 마디의 도약이 
얼마나 산뜻한가가 대체로 
나의 평가 기준인데,

물론 겨우 1악장의 열세 마디로  
전체 연주를 평가하는 건
연주자로서 좀 억울할 수 있겠지만,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발트슈타인’ 대신
‘ L'aurora (The Dawn)’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도입부에서 동이 트는 걸 상상한다고 하니,
영 잘못된 평가 방식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4
그리하여 다시 듣는 
안젤라 휴이트의 ‘발트슈타인’은, 
그야말로 산뜻함의 정수. 

늘 믿고 듣는 그녀, 
박자에서도 흐트러짐이 없고
음표들도 뭉치지 않으며
날아갈 듯 오른손이 오르내린다. 
(음원이 인터넷에 아직 없어
링크를 못 하는 것이 유감이다.)

다만 첫 도입이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뭐랄까 좀 더 대담한 해석이 
나의 취향인 듯. 

5
그래서 역시 발트슈타인’은, 
2014년 발매된 이후 줄곧
나의 레퍼런스가 되어 온
조나단 비스의 아래 연주를, 
아직까지 가장 아낄 수밖에 없게 된다. 


6
사족이지만 조나단 비스의 연주는
올해초 그라모폰誌에서도
이 곡의 Ultimate Choice로 꼽기도.

7
사실 클래식 악곡에 
C장조는 생각만큼 흔치 않은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이 곡과 Op.2-3 (3번) 밖에 없다. 

우리가 익숙한 그 C장조이지만
이 곡이 연주자에게 요하는 
엄청난 테크닉이야말로
이 곡의 유명세와 평가에 기여했다고.

특히 앞의 도입부만 해도,
명인들 연주 가운데에서도
박자가 흔들리거나 음표가 뭉치거나,
아니면 셈여림의 섬세한 조절에서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도 많다. 

8
‘발트슈타인’은 베토벤 초기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Count Ferdinand Ernst Gabriel 
von Waldstein을 말한다. 


  1. Op.는 단수의 작품에 붙는 작품번호이고, 보통 복수의 작품을 열거할 때 Opp.를 쓴다. 마치 책을 인용할 때 한 페이지면 p., 복수의 페이지이면 pp.12~13 하는 식으로. [본문으로]
ingeborg holm palle solling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Palle Sollinger (더블베이스), Fredrik Hermansson (피아노), 
Daniel Migdal (바이올린), Lisa Långbacka (아코디언), 
이상 4명의 낯선 연주자들이 발표한
“Ingeborg Holm” (2019). 

앨범 제목이 뜻하는 게 뭘까, 
궁금해 찾아보니 1906년 씌어진 
Nils Krok의 동명의 희곡을 바탕으로
1913년 만들어진 무성영화였다. 
Victor Sjöström(빅토르 죄스트룀) 감독.

행복한 가정의 중산층 여성, 
세 아이의 엄마인 잉게보리 홀름이
대출을 받아 식료품점을 낸 후
병으로 남편이 사망하게 되자 겪는, 
아프고도 슬픈 이야기를 다룬 내용. 


오랜만의 무성영화여서, 
더구나 1시간 12분여의 길이여서
몰입이 어려울 것 같았으나
보다보니 어느새 눈물을 찔끔거리게 되는,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1시간 넘게 
아무 소리도 없이 영화를 보기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는 시점에서
그리 쉽지 않은 게 사실.
그래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앨범을 들으며 보니, 
이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된 만큼
꽤 잘 어울린다.

다른 유명한 무성영화들에도, 
이렇게 음악을 제작해 같이 들려줘도 
흥미로울 듯하다.

오랜만에 서로 다른 장르의 
스웨덴 수작 두 편을 
함께 감상하게 된 하루.

다음 링크는 앨범의 마지막 트랙. 



1

음반 사는 비용을 아끼려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다보니

한 아티스트를 몰아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최근에는 재즈 기타리스트 그랜트 그린.


2

이 앨범은 4년간의 공백을 깨고 1969년 녹음돼 

1970년 블루노트 레이블에서 발표

Carryin’ On.


이전까지의 스트레이트하고 깔끔한, 

여운이 많지 않던 그랜트 그린은 어디로 가고

나긋나긋하고 샤방샤방한 60년대 말의 

분위기로 가득. 


그 중에서도 제목은 의미심장하게

‘폭격을 멈추라’고 지었으면서, 

솔솔 바람에 꽃향기처럼 들려오는

비브라폰과 펜더 로즈, 기타의 톤은 참으로

꽃무늬 패턴이 새겨진 품이 넓은 셔츠마냥

사뿐사뿐 스텝을 밟는다. 


3

그래서 사실 이 앨범은

그랜트 그린의 오랜 팬들에게 외면당하고, 

오히려 후대에 애시드 재즈의 추종자들로부터

걸작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전해진다. 


4

그러나 어쨌든 전쟁을 멈추는 건

또다른 전쟁이 아니어야 한다. 

최소한 이 시대는 그렇게 믿었다. 


마크 리부(Marc Riboud)가 1967년에 찍은

유명한 사진, 

반전 시위에서 꽃을 든 여성과 

총검을 쥐고 도열한 군인들의 대면을 다룬

The ultimate confrontation: the Flower and the Bayonet이나

혹은 같은 해 찍은 버니 보스턴(Bernie Boston)의

Flower Power에서 보듯이.


Jan Rose Kasmir confronts the American National Guard outside the Pentagon during the 1967 anti-Vietnam march. This march helped to turn public opinion against the U.S. war in Vietnam.

©Marc Riboud


© Bernie Boston  


5

그리고 그런 믿음이 

혐오와 증오로 만연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싶다. 


전쟁을 멈추려거든, 

갈등을 해결하려거든, 

혐오를 끝내려거든 이렇게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속삭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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