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금 선거에 나온

민주노총 활동가들의 과제는 분명하다. 

선거를 활동가들의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것으로 돌려줘야 한다. 

분파적 차별성을 경쟁할 것이 아니라

조합원과 사회적 의제라는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연대를 논의해야 한다. 


현재의 노동문제는 모두 1997년 이후

20년 이상 쌓여온 적폐들이다. 

고작 3년의 임기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들을 해결하려면 노동계급 전체가 힘을 모아 

20년 이상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연합집행부 혹은

모든 분파가 참여하는 상설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장기적으로 대응할 총노동 전선을 꾸려야 한다. 

강신준, “민주노동 선거에 조합원은 있을까”

겨레 2017. 11. 27 (월) 26면


나 역시 최근의 민주노총이

못 미덥지만, 

도대체 누가 후보로 나온 건지

어떤 차이가 있는 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

민주노총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조직이기 때문에

자본론을 번역하기도 했고, 

노동계에 꾸준한 애정을 보여온

강신준 교수의 이 글 일부를 옮긴다. 


이대로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을 접기에는

나는 아직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 배제’를 말하고, 

‘진짜 여성’에 대한 감별 행위가 횡행하는 때 아닌가.

메갈리아 이후, 남성의 전유물로만 생각됐던

호전성과 맹목성을 ‘여성성’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없게 됐으며, 

그 호전성은 어느덧 

‘타자(성)에 대한 혐오’까지도 방불케 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문학은 

어떤 “페미니즘 소설”을 갖게 될까. 


‘생물학적 여성’만을 ‘안고’ 가겠다는 

페미니즘 앞에서

이제 “페미니즘 소설”은 “안도감”을 주는 

자명한 범주가 아니라,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질문의 장소’여야 하지 않을까. 

‘여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진짜 여성’이라는 가상의 범주, 

그 억압의 굴레에 대해. 

– 오혜진, “2017 ‘페미니즘 소설’ 박물지”, 한겨레 2017. 11. 27 (월) 25면


새겨볼 만한 글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남성들이) 페미니즘 내의 논쟁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측면에서. 


어머니 생신이라고 

달리 해드릴 게 생각이 나지 않아

유자차를 담그다 보니 

여러가지 새로 깨닫다


유자에 씨가 이렇게 많았구나, 

10kg을 사면 씨가 2kg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구나, 


농사를 지으며 책을 내신 분이

농가에는 늘 쓰레기가 쌓여있기 마련이라라며, 

누군가 우리가 먹는 걸 생산하기 위해

그 열 배 스무 배는 버려진다고 썼던 것이

돌연히 납득이 되는 순간. 


그렇다면 우리의 먹음이란 

얼마나 곤고한 것인가, 

얼마만한 수고로움이 바탕한 것인가, 

또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 

혹은 먹을 수 없는 것의 구분은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 


정말 내가 먹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런 원재료를 사다 직접 해보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버려지는 것들을 보니

식탐과 미식이라는 게

古來로부터 많은 문화에서 

죄악시되었던 게 당연한 것이로구나,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 

어떤 과정을 겪으며 오는 것인지

보지 않기 때문에

이 시대에 먹을거리로 인해 

이렇게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로구나.


플라스틱과,

또 플라스틱과, 

대개는 다시 플라스틱으로 감싸인

‘상품’ 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에 대해 어떤 반성도 없이

그저 먹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사실 

유자차의 향기란

생유자의 향기를 결코 넘을 수 없으며

그저 그 향기를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이를테면 박제하는 것에 불과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가득한 유자 냄새에 취해

다시 1주일을 

설렘으로 보낼 수 있겠구나. 


유자차를 담그며 심심을 덜었는데

1주일을 더 

심심하지 않겠구나. 


ps.

유자 2킬로그램을 사면 

다이소에서 파는 1리터 용기 

네 개를 가뿐히 채운다. 

그러니 충분히 대비하고 주문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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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할 것이 뻔히 보이는 싸움도

이렇게 힘든데, 


패배할 것이 뻔히 보이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지는

요즈음,


승리하든 패배하든

가야할 길은

어떻게든

떠나야 하는 법이다, 


그게

인생이다.


내일 조합 사무실 갖다 줄 

레몬청 완성. 

나름 다이소에서

개중 예쁜 병을 구해 담아 보았다. 


백설탕이 아닌 

유기농 황설탕을 써서 그런가, 

달지 않은 건 좋은데 

맛도 조금 죽은 듯 싶다.


여하간 뱅쇼나 과실청을 만드는 게 즐거운 건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선물해 줄 수 있다는 것. 

(혹은 선물을 가장한 ‘임상실험’이라든가.)


정성들여 담근 것이니

곰팡이 슬도록 놔두지 말고 먹어 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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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폭이 2미터가 넘는 군함새에게는 

군함새의 깃털보다도 

가벼운 뼈가 있다...”

– 재니퍼 애커먼, “새들의 천재성”, 김소정 역, 까치, 2017. 67쪽


‘깃털보다 가벼운 뼈’, 

라니.


종종 자연 앞에서는, 

그리고 자연을 생생하게 서술한 글 앞에서는

어쩌면 어떤 문학도 명함을 내밀기 

곤란할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깃털보다도 

가벼운, 

뼈,

라니.


이미지 출처: http://ecotopia.hani.co.kr/357678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는

당신이 아니면

누가 불러주나요.

RIP

16 Oct. 1962 - 22 Nov. 2017


얼마 전 포스팅한 Daniel Herskedal의 음악이, 

그 안개처럼 흩어지는 관악의 사운드가 

W.M. Turner의 화폭을 연상케 한다면, 

듀크 엘링턴 밴드가 연주한 이 음악, 

 Take the ‘A’ Train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아직 기차를 타기 전의 소란스러운 플랫폼이 배경이다. 


빌리 스트레이혼이 작곡한 이 곡, 
제목의 A Train이란 1932년 개통한
뉴욕의 지하철 노선이라고 한다. 
그러니 마치 새로 개통한 
산 위로 오르는 모노레일을 홍보하기 위해 작곡된
‘자, 어서들 오세요, A호선 열차 출발합니다, 
어서들 타세요’, 라는 차장의 외침이 들리며
열차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의 
소란스러운 흥겨움이 묻어나는 곡이다. 

도입부의 기적소리의 메타포, 
그리고 당대의 내로라 하는 연주자들이 포진한
듀크 엘링턴 밴드의 연주는,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내게 이 그림을 연상케 한다. 

La Gare Saint-Lazare de Claude Monet from Wikipedia Commons


1877년 모네가 남긴 그림, 
쌩-라자르 역이다. 

떠들썩한 분위기,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수증기 사이로 
언뜻언뜻 들려올 것만 같은 작별의 인사들. 
(물론 A호선은 당연히 전철이었테니 차이는 있지만.)

재즈라면, 
특히 스윙과 빅밴드 시대의 재즈라면
왠지 흑백이 더 어올릴 것 같지만 
이렇게 총천연색의 기차역 풍경도 썩 나쁘지 않다. 

모네는 같은 해 쌩-라자르역을 
또 한번 화폭에 담았는데,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다음의 그림은
어쩐지 조금더 1940년대 재즈의 느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Claude Monet, Gare St.Lazare, 1877 from National Gallery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뮤지션과 아티스트가 
묘사하는 열차의 풍경들. 
다니엘 헤르스케달과 듀크 엘링턴. 
터너와 모네. 

 
ps.
우리에게도 기차에 대한 음악이 있다. 
산울림 팬이라면 첫 손에 꼽을 명곡 가운데 하나. 
촉촉한 후기의 산울림만 아는 이들에게는 
조금쯤은 놀라운 음악일 수도. 






분노는 강력한 에너지원이다. 

하지만 남도 나도 피폐하게 한다. 

장기화되면 습관이 되고, 

사고를 게으르게 만든다. 

– 권태호,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적이다, 한겨레 2017.11.22(수) 27면


이 문장이 담긴 맥락은 

제목처럼 정치에 대한 평론이나, 

인용한 구절은 우리 삶에 새길 만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분노는 사고를 잠식한다. 


분노라는 에너지에 

너무 의지를 많이 하는 요즈음

때때로 떠올려 봐야 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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