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 링컨의 Up jumped Spring의 가사를 들여다보다

High hopes was fadin’이라는 구절에서

결국 이 노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일랜드 밴드 Kodaline의 히트 넘버, 

High Hopes. 


But I've only got myself to blame for it, and I accept that now 

It's time to let it go, go out and start again 
But it's not that easy (that easy that easy) 

High hopes, when you let it go, go out and start again 
High hopes, ooh when it all comes to an end 
But the world keeps spinning around


이 주옥같은 가사라니. 

게다가 이 서늘한 보컬은 어쩔 것인가. 

애비 링컨이 황혼의 여유로운 관조자라면, 

코달라인의 화자는 젊은 시절 좌절을 겪은 

그러나 이를 악물고 살아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이가 눈 앞에 그려진다. 


봄비 내리는 날 딱 어울리는 곡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니까. 


I was out promenadin’

And high hopes was fadin’

[...]

Now my heart wants to cheer

Life’s sweet promise here

And love is a lovely thing

[...]

’Cause up jumped Spring... time

So, hello my friend

참으로 독특한 그녀의 목소리, 

착착 귀에 감기는 발성법에 반해

애비 링컨의 앨범을 사모으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남편이기도 했던 드러머 맥스 로치와 

1960년 발표한 명반 We Insist!의 

저항정신이 듬뿍 담긴 주술적인 목소리를 듣고나면, 


우리나라에는 그리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못한

애비 링컨이야말로 재즈 정신의 한 형태를

완벽히 구현한 뮤지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발라드 곡들 역시

예의 그 독특한 음성으로 많이 녹음했는데, 

그녀가 만년에 발표한 음반들에는

사랑 노래 같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그녀의 시각이 담긴 노래들을 많이 담았다. 


이 노래, 

때이른 봄비가 내리는 저녁에 

유난히 귀에 찰떡같이 달라붙는 노래, 

Up jumped Spring은 프레디 허바드의 곡. 


사랑 노래인 듯 인생 노래인 듯, 

이제 젊은 날의 열정과 기대감, 

그 드높던 희망(high hopes)도 엷어지고, 


그저 산책길에 

봄으로 펄쩍, 내던지듯 몸을 맡기고

그럼에도 인생은 아직 달콤한 약속이지, 

사랑이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지, 

나직이 속삭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황혼에 서있는 이의 

여유로운 관조가 아닌가. 


비가 내리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오르고, 

땅에는 물이 괴고, 

이제 비 그치길 기다리는 새싹들에 

가슴이 덩달아 여유로와지는 

2월의 마지막 날, 


애비 링컨의 1991년 발표 앨범

You Gotta Pay the Band를 듣다. 


(참고로 Up jumped Spring에서는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도 함께 했다.)

ps. 

그녀의 젊은 시절, 

We Insist!에서 한 곡. 

All Africa라는 곡으로, 

아프리카의 부족명을 하나하나 

소환해내는 그녀의 목소리. 

이토록 정치적이고도 몽환적인 음악이라니. 



Tim McDonough (narr.), William Ransom (pf.)

 

이런 종류의 퍼포먼스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 낭송인가, 리트의 일종인가, 음악이긴 음악인가. 

 

어쨌든 리햐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을 했으니 

음악의 한 갈래일테고,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알베르트 슈트로트만Albert Strodtmann이 번안한 것이니 

시와도 관계가 깊을텐데, 

 

하여 찾다보니 19세기 말에 유행했던

“멜로드라마”라고 한다. 

살롱 내지는 소규모 극장공간에서 펼쳐지는 

시 낭송과 과하지 않은 ‘연기’, 그리고 악기의 협연

 

당시에는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으로, 

슈트라우스의 작품번호 38로 출판한 이 곡은

그의 교향시보다도 관객의 반응이 좋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대에는 꽤 자주 무대에 올랐던 것 같은데, 

아마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벨 에포크 시대의 

빈과 베를린의 유명한 캬바레의 밤을 수놓았을 법한, 

그런 종류의 문학과 음악의 조화

 

물경 1시간 10분에서 20분 사이의 퍼포먼스이니

영어를 왠만큼 잘하지 않고서는 

평상어도 아닌 시어라 잘 들리지 않겠지만, 

대충 인터넷에서 ‘이녹 아든’의 줄거리를 알고 나면

그래도 꽤 흥미로운 공연이 아닐까 싶다. 

 

연기의 질로 따진다면 위 공연도 수준급이지만, 

이 곡의 최초 녹음인 글렌 굴드와 윌리엄 클로드 레인의

조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1962년 5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코미디를 제외한 Spoken Words/Documentary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면, 

어쩌면 슈트라우스가 이 곡을 쓴 가사는

테니슨의 영시가 아니라 독일어로 번안된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그래서 언어를 알아듣고 말고 여부를 떠나, 

내게는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최고로 여겨진다. 

피아노와 목소리의 완벽한 조화. 

평생을 말(노래)하듯 연기하고, 연기하듯 말(노래)했던

이 성악가의 맺고 끊으며 강약에 변화를 주고

빠름과 느림을 엮어내는 기술은 정말 천의무봉이다. 

 

 

덧붙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다양한 버전의 이녹 아든을 찾을 수 있는데, 

그리스에서 이뤄진 이 공연은 도입부부터

내레이터의 연기까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스어를 하나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가 가진 음악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동영상. 

 

 

물론 전체를 다 감상하기에는 벅찬 작품이고, 

나 역시 아직은 끝까지 동영상을 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19세기말(1897년작) 멜로드라마를

한번쯤 눈요깃거리로나마 감상해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 아닌가. 

 

감기를 핑계로 

열흘 넘게 산책을 안 했더니, 

언 땅이 녹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겨우내 허옇게 말라 부풀어오른 채 

딱딱하게 굳어진 흙에, 

물기가 돌고 있었다.


한참을 푹신푹신한 그 느낌에 취해, 

사실은 질퍽질퍽한 그 흙길을

오래도록 밟아보고 싶었다. 


이 온기가 씨앗들까지 도달하려면

또 며칠 더 걸리겠지만,

봄비라도 한번 내리면

나뭇가지에도 움이 틀 것이다. 


기분좋은 봄 느낌에 취해, 

그리고 저녁 무렵 전해진

또다른 봄소식에 취해도 좋은, 

그런 날이다.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제20번 A장조, D.959 중

2악장 Andantino (Performed by Alfred Brendel)


슈베르트의 모든 곡 중에서도

오금이 저리도록 가장 시리고 슬픈, 

특히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접한 뒤로는 늘 가슴이 서늘해지는, 

흔히 20번 소나타라고 불리우는

A장조 D.959 2악장의 도입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선율. 


최근에 들은 음반들에서, 

이 주제와 리듬을 변주해 낸

현대 피아노 작품들을 발견하다. 


먼저 피아니스트 Shai Wosner의 연주로

미국 작곡가 Missy Mazzoli가 작곡한

Isabelle Eberhardt Dreams of Piano. 

1980년생의 미시 마촐리의 이 곡은

스위스의 탐험가 이자벨 에버하르트를

기념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D.959 2악장에 대한 헌정이기도 하다. 



또 아이슬란드의 다재다능한 음악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Ólafur Arnalds의 Erla’s Waltz는

D.959 2악장의 선율선을 단순화한 듯 보이며,

에릭 사티 풍의 화성 진행과

오프비트를 사용해

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곡.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12.7cm까지 갈 것도 없이

인류가 지금 크기의 절반 정도로만 줄어들어도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

게다가 인류를 이 정도로 줄이는 데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작아지는 방향으로 강력한 ‘성선택 압력’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 김현경, 상적인 남자의 키, 한겨레 2018.1.25(목) 23면


문화인류학자다운

유쾌하고도 심오한 상상력이다. 

우리는 너무 커다래졌고, 

그래서 너무 많이 먹고 소비하며, 

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탕진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잘 알려진 문구를 誤用하자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사실 수챗구멍, 

특히 욕실의 수챗구멍을 

청소하는 일은 누가 뭐래도

달가울 수 없는 일이다. 


머리카락과 체모와

떨어져나간 살갗의 찌꺼기들과, 

거기에 들러붙은 미생물들까지, 

뭐랄까, 내 죽음 이후 육체가

어떤 변모를 거칠 것인지

짐작되는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일텐데,

바로 그래서 

이사를 앞두고 오늘

수챗구멍을 청소한다. 


내 살점들과 내 체모도 이렇게

불쾌하고 두려운 법인데, 

이사오자마자 물이 잘 안 빠져서

누구인지도 모를 이의 

그것들을 대면해야 한다면

과연 얼마나 역겨울 것인가. 


누군가 사람은 난 자리가 

깨끗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더럽힌 것은 내가 치울 것, 

할 수 있는 한 더럽히지 않을 것, 

그것이 내가 이사를 하면서 

지키고 싶은 나만의 원칙이자, 


내가 지구라는 별에 

잠시동안 거주하면서

떠날 때까지 마음에 담고 싶은, 

몸으로 옮기고 싶은

삶의 자세다.


끝도 시작도 없고

높이도 길이도 없는 듯한, 


마치 5월의 햇살 좋은 날

벤치에 앉아 그 위를 덮은 나무, 

하나하나의 이파리들이 산들바람에 

몸을 뒤집거나 눕히는 것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시간과도 같은, 


모튼 펠드먼(1926-1987)의 

For Bunita Marcus는 

그런 종류의 음악이다. 


아주 미묘한 피치의 변화, 

강약의 변화, 

얼핏 비슷하게 들리는 그러나 조금씩 다른

악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

70여분 동안 듣고 있다 보면,

조금은 엉뚱하게도 

만델브로트 집합에 의한 

프랙탈 도형[각주:1] 연상된다.


 

맨 앞에 올린 캐나다 출신의, 

지적인 해석과 정확한 테크닉으로 

정평이 나 있는

마르크-앙드레 아믈렝의 연주로 

전곡을 듣는다면 좋겠으나, 

인터넷에 없는 관계로 전곡 연주는

스테판 갱스부르Stephane Ginsburgh[각주:2]의 

연주로 링크한다.

 

이런 음악에 익숙치 않다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ps.

타이틀의 Bunita Marcus는 

미국 위스콘신에서 1952년 태어난

작곡가의 이름이다. 


  1. 프랙탈의 수학적 배경을 알만큼 똑똑하지는 못하나 자기 유사성에 기반한 반복되는 패턴, 그러나 패턴의 반복으로 빚어지는 전체의 형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이 경이로워 기억 창고 어딘가에 부정확한 모습으로 저장해 놓았다. [본문으로]
  2. 벨기에 태생인데,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어 일단 프랑스 식으로 음을 적는다. [본문으로]


중국출신으로 

문화혁명 당시 5년여 노역형에 처해진 바 있으며,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지금은 프랑스에서

연주활동과 더불어 후학들을 키우고 있는

주 샤오 메이의 바흐 연주. 


그녀의 연주는 

지난 해 발매된 프랑스 모음곡 음반으로 

처음 듣게 됐는데 뭐랄까,

마치 60년대와 70년대 명인들이 

연상된달까. 

 

총 연주시간이 1시간 20분 정도,

글렌 굴드(약 1시간)보다 훨씬 느리고

페라이어(1시간 30여분)보다 많이 빠르지도 않은데

무척 빠른 연주로 느껴지는 건, 

음들을 연결하고 패시지를 처리하는 게

매우 대범하고 거침없어 그런 듯하다. 


굴드의 바흐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건반 터치와 음색, 

미묘한 톤 변화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바흐가 떠오르는

신선한 연주다. 


조금 과장하자면 80년대에서 현재까지 이뤄진

바로크 시대의 악곡들에 대한 

해석의 변화란 마치 없었다는 듯이, 

바로크 시대라는 특수성보다

음악이 지닌 보편성을 끌어내는 듯한

해석이 돋보이는 연주. 


1번부터 차례대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2번 4번 1번 6번 3번 5번의 순서로, 

단조와 장조를 번갈아 배열한 것도 인상적. 


6곡 중에서도 잘 연주되지 않는 

4번(에서도 첫 곡 allemande)이 가장 좋았으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어 3번의 연주를 링크한다. 




* Added on 9 Jan. 2018 *


왜 자꾸 글렌 굴드가 떠오르는 지 궁금해

굴드를 다시 들어보고 나서 추가로 적는다. 


좀 더 정확히 비교하자면, 

70년대 녹음된 글렌 굴드의 프랑스 모음곡이

보다 대위법적인 음들의 대조와 병치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데 반해

(그래서 각각의 곡들이 춤곡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에 비해)


주 샤오 메이의 연주는 

각각의 악곡들이 춤곡에서 기원했음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사뿐사뿐

춤추는 발등이 느껴질 법한 강약 조절.

그런 면에서 80년대 이래의

바로크 시대 악곡에 대한 연구를

나름의 해석으로 소화해 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굴드와 한 가지 더 비교하자면, 

굴드는 빠른 곡은 더 빠르게, 

느린 곡은 더 느리게 침으로써

악곡 사이의 드라마틱한 구조를 

돋보이게 하는 반면, 


주 샤오 메이는

빠른 곡은 조금 느리게, 

사라방드와 같이 느린 곡은

조금 가볍고 빠르게 해석함으로써

하나의 모음곡이 틈 없이 이어지도록, 

그래서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보이도록 

연주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사무치는 나날이다. 

일터 괴롭힘이든 아동 학대든 학교 왕따든 성폭력이든 

다수의 침묵과 방조 없인 불가능하단 얘기다. 

살면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피해자가 됐을 때 대응하자며 공부하지만

시급한 건 목격자로서 행동 매뉴얼,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 같다. 

은유, “서울, 패터슨의 가능성”, 한겨레 2018.1.6(토) 23면


원래 글과를 조금 다른 맥락에서

입을 열면 꼰대가 되

입을 다물자니 방관자가 되는 것 같아

고민스러운 요즈음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이 아닌가.

곰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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