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까무룩 졸았던 탓인지, 

비교적 늦게까지 글이랍시고 두어 편 적느라

오랜만에 머리를 썼던 탓인지, 

혹은 글의 내용을 자꾸 곱씹는 탓인지

잠 안 오는 늦가을–초겨울 밤에

십 수 년 전의 그녀 이름을 떠올려보는데

당최 기억나지를 않네.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인가,

아니면 

그 세월들에 기억에도

풀들이 가득 자라난 탓인가. 


오늘은 계속

웃자란 길’의 연속.


https://youtu.be/AOHRabxpg1Y

— 모라비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루돌프 피르쿠스니의 연주 —

                              

이 글은 2021. 11. 3 

브런치에 포스팅하기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1

길이 있다(혹은 있었다),

오래 찾지 않아 흔적만 희미하게 

남은,

 

간혹 이름을 알고 대개는 

이름도 모르는 풀들이 무성해진, 

가보지 않았다면 길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법한, 그런

길. 

 

2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 출신 작곡가 

야나체크의 피아노 소품의 모음집인

⟪Po zarostlém chodníčku⟫는

영어로는 ⟪On an Overgrown Path⟫,

우리말로는 보통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로 소개되는데, 

이 제목이 너무 산문적인 것 같아

나의 경우 (딴에는) 보다 중의적으로 

그저 “무성한 길”이나

혹은 “웃자란 길”로 소개하곤 한다. 

 

오랫동안 가보지 않은 길에

과연 풀들만 무성하겠는가. 

풀들이 무성해진(overgrown) 만큼

그 길 자체도 웃자라는(over-grown) 것은

 아닐까. 

 

3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체코어 제목은 

지나간 시절의 추억을 묘사할 때 쓰는

관용적 어구라고 한다.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의 

2014년 음반(Hyperion)의 해설을 쓴 

해리엇 스미스에 따르면,

모라비아 지방의 신부가 부르는 결혼식 노래, 

“엄마 집으로 가는 길에는 

토끼풀만 무성하게 자랐네”라는 가사처럼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워도 되찾을 수 없는 아쉬움과

일말의 서글픔이 묻어나오는 

표현이다. 

 

4

열 곡으로 구성된 첫번째 시리즈와 

때로 두 곡, 현대에는 4~5곡으로 이루어진

두번째 권으로 나뉘어지는데, 

첫번째 시리즈가 더 자주 연주되고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글에서도 첫번째 권에 대해서만 다룬다.)

 

첫번째 시리즈에 포함된 곡 각각의 제목은

제1곡 Our evenings (우리의 저녁들)

제2곡 A blown-away leaf (바람에 떨어진 잎새)

제3곡 Come with us! (같이 가요!)

제4곡 The Frýdek Madonna 

(프리데크의 동정녀 마리아)

제5곡 They chattered like swallows 

(그들은 참새들처럼 지저귀고)

제6곡 Words fail! (어떤 말도 소용없네)

제7곡 Good night!

제8곡 Unutterable anguish 

(말못할 고통)

제9곡 In tears (눈물 속에서)

제10곡 The barn owl has not flown away!

(헛간올빼미는 아직도 날아가지 않았네)이다. 

 

1897년 하르모니움이라는 악기를 위해

민요 선율을 편곡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1901년에 세 곡이 ⟪슬라브의 멜로디⟫라는

악보집에 묶여 출판된 이후

1911년 12월에 출판되기까지 

각각의 곡들이 씌어지고, 수정되고, 

곡들이 더해지고, 제목이 붙었다가, 

제목이 바뀌고,

다양한 출판업자들과 

실랑이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한다. 

 

다만 “On an Overgrown Path”라는 제목은

1901년 세 개의 소품이 출판될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니, 

야나체크가 언젠가는 완성될

이 피아노 소품 사이클의 성격을

애초부터 ‘멀어져간 추억의 회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5

사실 야나체크의 음악을

(그리고 후기 낭만주의 이후의 음악을)

곡의 구조나 화성의 분석 등을 통해

음악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비전공자, 비전문가에게는 

지나치게 버거운 일이다. 

 

영국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가

스크랴빈과 야나체크의 음악을 연주해

2015년 내놓은 앨범(Hyperion)에 

언급한 말에 따르자면, 

‘야나체크는 짧은 악구나 악절을

때로는 강박적으로 반복해 사용하며, 

화성적 어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편’하며,

그래서 야나체크를 너무 많이 듣거나 

혹은 연주하는 것은 

상당히 ‘진이 빠지는(exhausting)’ 일이다. 

 

불확실한 조성감 탓에

마치 들풀이 무성한 길에서처럼

방향을 잃어버린 듯한 선율과 화성.

나아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오른손은 흘러가려 하지만

왼손은 아래로 하강하며 발길을 붙들고,

음표들은 마치 수직으로 자라난 풀들처럼

추억 속으로의 여행을 가로막는 듯하다. 

첫번째 곡 Our evenings의 부분 (악보 출처는 http://imslp.org)

두번째 곡 A blown-away leaf의 부분 (악보 출처는 http://imslp.org)

 

6

야나체크의 음악은 그렇다,

언뜻 달콤함이 비치는 순간에도

서늘함은 늘 그곳에 있다. 

잠깐 다정함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씁쓸함이 엄습한다. 

 

이 기이하고 불안한 화음이며,

발길에 자꾸 채이는

온전한 추억으로의 생각의 흐름을 

방해하는 리듬이라니. 

 

야나체크는 이 곡들을 쓸 무렵인 1903년, 

딸 올가를 장티푸스로 잃는다. 

그보다 십여 년 전에 이미 아들을 잃었고, 

이후 야나체크 부부는 예전의

애틋함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특히 첫번째 곡과 마지막 곡은

딸의 사망 직전에 씌어졌는데, 

마지막 곡 제목의 올빼미가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불길한 전조를 상징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그 앞의 곡이 In tears임을 떠올리면

이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슬픔을

조금쯤 이해하게 된다. 

 

7

따지고 보면 

굳이 옛 시절을 떠올리는 이의 심사에는,

현재가 보잘 것 없고 고통스럽거나

혹은 과거의 슬픔이 가시지 않았거나,

설령 행복한 기억이라 해도 

그 바탕엔 늘 온갖 아쉬움과 그리움, 

서글픔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과연 우리의 기억이란 

또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지나간 시절은 대체로 희미하기에

보이지 않는 이정표들을 간신히 엮어내어 

우리는 더듬더듬, 

자라난 세월에 묻힌 길을 

한없이 헤매곤 하지 않던가. 

풀들이 무성히 자라난 만큼, 

우리가 더듬어야 할 길도 자라나며 

생각의 가지들은 이리로 저리로,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간다.

 

그러므로 이 무성함은, 

풀들이 무성하다면 자연스레 떠오를 법한

여름날 초록의 무성함이라기보다, 

물기 없이 누렇게 말라버린 풀들로 덮인

밤이 길어지는 이맘 때의 황량한 

풍경과도 같은 것, 

 

혹은 여섯 번째 곡의 제목(Words fail!)처럼

뭐라 표현할 낱말조차 찾지 못한 채

옛 시절의 자취를 하릴없이 좇으며

뒤척이는 고단한 밤이거나 

사나운 꿈자리와도 

같은.

 

8

이 작품 자체가 감상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사적인 것이다보니 

유려함과 낭만성을 강조하는 해석보다는 

오히려 좀 건조하고 깔끔하게, 

감정을 굳이 너무 담아내지 않고

소리의 울림에 집중하는 연주가 

더 좋은 듯하다. 

 

글 머리에 링크한 

모라비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루돌프 피르쿠스니(Rudolf Firkušný)의 연주는

아무래도 모라비아 민요 선율이 쓰인 

이 작품의 해석에 있어

레퍼런스라 할 만하다.

 

그 외에 동유럽과 슬라브 문화의 전통에 

가깝고 친숙할 법한 연주자들, 

헝가리 태생인 안드라스 쉬프(ECM, 2001), 

사라예보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이바나 가브리치(Champs Hill, 2011)가 

추천할 만하다. 

 

위의 세 사람 모두 왼손, 혹은 내성부가 

흐름을 끊고 맺고 이어가는 음악적 어법을, 

그 안의 달콤함과 서늘함과 씁쓸함을

매우 탁월하게 소화하고 있다. 

 

9

마지막으로 공연 실황 동영상을 

하나 더 링크한다. 

 

일본계 영국 피아니스트

미스즈 타나카인데, 

그녀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체코에서 이반 모라베크 등을 사사하기도 한, 

야나체크에 대한 이해가 깊은 

연주자로 보인다.

 

연주 자체도 훌륭하고

(특히 이 작품의 페달 사용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연주만큼이나 절제된 의상도 인상적이며 

제스처도 과장되지 않아 좋다. 

2016년 내놓은 앨범에서 

야나체크의 이 곡과 커플링된 것이 

바흐의 파르티타인 것으로 보아

그녀의 지향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https://youtu.be/PG_dKoGM4AI

                              

 


도라 페야체비치 Dora Pejačević.

1885년 태어나 1923년 사망한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크로아티아에도, 그렇다, 클래식 작곡가가 

당연하게도 존재했다. 

 

가곡에서 피아노 독주를 위한 작품들,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곡들,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1곡까지, 

상당히 많은 양의, 폭넓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의 여성–비독일–근현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탐구된 적은 거의 없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다. 


처음 동영상은 그녀의 피아노 소품, 

Maštanja (6개의 환상적 소품), Op.17 중 한 곡. 


크로아티아어를 알지 못하고 사전도 없는 관계로

구글에서 번역과 사전을 뒤져본 결과, 

Maštanja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Maštanje라는 단어가 Daydreaming, 

백일몽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단어의 여성형이 아닐까 싶은데 확실치는 않다. 

그럭저럭 곡의 분위기와도 어울린다 싶어 

보다 확실해질 때까지는 이렇게 짐작해 본다. 


동영상은 Zudja, 그리움이나 갈망을 뜻한다. 

그리움, 슬픔, 의문, 비탄, 애원, 광란, 

이렇게 여섯 곡 중에서

첫번째 곡이다. 


여러 면에서 체코의 작곡가 야나첵의 

웃자란 길(Po zarostlém chodníčku; On an Overgrown Path)”을

떠오르게 하는 곡이다. 


다음 이어지는 곡은 Maštanja가 씌어진 이듬해인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쳐 완성된

Život cvijeća (꽃들의 생애, Life of the Flowers) 중에서

8번째 곡인 Krizantema (국화). 


아마도 이 소품집에서 가장 대중적인 선율과

화성을 지닌 듯 싶은 이 곡, 

푸치니의 현악4중주 작품인 Crisantemi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어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시는 나불대는 게 아니야. 

사람 아닌 악질 살육과 싸우는 이들의 

꿈을 빚는 거야. 

그걸 비나리라고 하지. 

– 백기완[각주:1]


그래도 한국사회에 

이런 어른이 계시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CCXXIV에서 이어지는 생각)


  1. 한겨레 2017년 11월 17일 금요일 별지 (책과 생각) 1면,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의 "두 어른" 소개 기사에서. [본문으로]

한국 꼰대들의 문제는 

지나치게 물질지향적이면서

동시에 꼰대의 기개도 없다는 거다. 

[...]

자기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기성세대는 

어느 시대든 ‘꼰대’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앞세대의 경험은 뒷세대로 전수되어야 하고, 

꼰대는 욕먹을지언정 ‘꼰대질’을 해야한다. 

물론 분야 나름이다. 

나쁜 건 자기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지도 않으면서

닦달하는 꼰대다. 

이들은 그나마 낫다. 

욕이라도 먹기 때문이다. 

최악은 젊은이들 입속 혀처럼 굴며

격려와 응원의 말을 늘어놓으면서 

실은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이다. 

박권일, ‘꼰대에 관하여’, 한겨레 2017.11.16 21면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어투를 흉내내고, 

취향을 따라 잡으려고 애써봐야

세대차이를 극복할 수도 없고, 

‘꼰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 그냥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 

그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나부터, 

나잇값을 하기로. 

최소한 노력을 하기로. 


어느 SNS였는지 신문 칼럼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누군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지문인식이 되는 스마트폰을 사드렸더니

고된 농사일로 무뎌진 손에 인식이 안 되더라던데, 


그러고 보니 단 1시간만 부엌일을 했는데도

스마트폰 잠금이 해제되지 않는다.


그냥 번호를 누르면 되고

또 1, 20분 뒤면 작동될테니

나 같은 한시적 가사노동자가 

딱히 불편할 것은 없으나,


대저 새로운 기술이라는 게 

결국 사회적 약자나 육체노동자를 

얼마쯤은 소외시키는 것 아닐까. 


인터넷 뱅킹이 발달하면 그만큼

오프라인 지점이 줄어드니 

노인을 비롯해 기기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듯. 




의도치 않게 직장생활의 ‘방학’을

두 달 넘게 맞다보니

그냥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 

인터넷 보고 따라했는데

내가 봐도 뭔가 어설프지만, 

1주일 뒤에는 알게 되겠지.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1시간 동안은 즐거웠으니. 


‘이 아이가 학대를 받아 죽음에 이르는 동안

사회가 무엇을 했는가? 

학대를 발견하고 조치할 수 있는 순간들을

국가가 몇번이나 놓쳤는가? 

담당자들의 책임인가, 시스템의 문제인가?’

[...]

연민과 분노를 넘어서 대안을 살피는 것, 

이것이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 세상 어디에나 악마는 있다. 

악마에게서 아이들을 보호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도리어 아이를 악마에게 건넨 자는 누구인가? 

– 이관후, 악마의 탓만은 아니다, 한겨레 2017.11.15, 27면


문제를 지적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과연,

문명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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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정리 차원에서

30년이 넘거나 다 돼 가는 

카세트 테이프 30여개와 

20년 묵은 테이프 데크를 내놨더니

10분도 안 돼 연락이 닿고,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달려온다. 


아직도 이런 걸 갖고 있었다는 것도, 

여전히 이런 걸 원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내 학창시절이 담겨있는 음악들이

또 누군가의 청소년기와 

조우할 것이다.


이런,

음악이 이어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노래라기보다 읊조린다고 해야할 것 같은, 

마치 샤먼의 입에서 나오는 招魂과도 같은 

Melanie de Biasio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2013년 발매된 No Deal이었다. 


니나 시몬의 I’m Gonna Leave You를 

멋지게 재해석한 것을 비롯해, 

어둡고 음침하며 싸이키델릭한 

7곡의 노래가 매력적이었던 앨범.  

    

벨기에 태생으로

플루트와 클래식 성악의 기초 위에

재즈와 소울, 블루스를 적절히 배합해

자기 만의 음악으로 직조하고 있는 가수다. 


얼마 전 내놓은 새 음반 Lilies의 마지막 트랙, 

And My Heart Goes On. 

PC나 스마트폰 스피커 말고 

번들이어폰이라도 귀에 꽂고 

볼륨을 조금 높여 들으면

이 곡의 진가가 드러난다. 

(누군가는 어두울 때 차 안에서

혼자 듣기는 무서울 것 같다고도 하지만.)


오지은의 당신이 필요해요

좀 쓸쓸하기는 해도 여전히 사랑의 박동이라면, 

이 노래의 심장은 좀 더 존재론적으로 뛴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어, 라는,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심장이 공명하는 음악이랄까. 


다음은 1집의 첫 곡, 

I Feel You의 라이브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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