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간절함도 없이

떠밀리듯 여기까지 이르렀다


언젠가

때가 되면

죽음만큼은 절실해지길

누구든 그렇게까지 비참해지지 말아야 한다. 

무릎을 꿇는 이에게나 그것을 보는 이에게나

그것은 모두 수모와 모멸의 풍경이다. 

– 김종옥, 우리가 무릎을 꿇은 까닭은…, 한겨레 201791327


그만큼 절실한, 

절실해야만 하는 게 서글픈, 

그러나 한편으로 절실한 모든 삶은

존경스럽다. 


(나는 내가 사는 곳에 혹

장애인 학교가 들어온다해도

반대하지 않겠다, 

다짐해본다.)




만약 당신이 재즈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벤을 사랑하게 될 거야. 

당신은 재즈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오네트Ornette Coleman를 좋아할 수는 없을지도 몰라. 

듀크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재즈를 사랑하면서 

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

—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But Beautiful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곰곰 생각해보니 그 시절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고 

그 어떤 관계도 일시적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아마도 내 행복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해 속에 살아간다

때로는 억울하거나

혹은 난감하거나

위기가 지속될 동안에는 문제의 해법을

외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외부의 장막이 걷히면 해법의 칼날이

내부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내부에 준비된 해법이 없으면

기회는 위기로 돌변한다. 

강신준, 적폐청산의 양날과 노동의 갈림길, 한겨레 2017년 9월4일(월) 26면


문제는

내게는 미래를 향한 어떤 비전도, 

욕망도 의지도 혹은 실낱같은 희망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새기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위기는 외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쉽게 끝나지 않을 싸움이 시작됐지만

(그리고 삶은 늘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사실 이 싸움이 끝나는 것 역시 두렵다, 

그때 나는 내 자신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언제나 모든 승리 쉽게 변질되기에 

나는 영원한 패배자이길 바란다, 

무책임하게도.



“세상을 걱정하는 영화는 상업영화이고,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영화는 예술영화입니다.”

– 차이밍량[각주:1]


내가 잘못될까봐가 아니라 

내가 잘못할까봐, 


내가 위험에 처할까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는 데 

일조할까 두려워서, 


온 세상이 불행한데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있어서,


나는 이 세상보다 

내가 더 걱정이다.


  1. 허문영, 인간혐오라는 상투구, 한겨레 2017년 9월 2일(토) 23면에서 재인용.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9325.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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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모든 일에, 

특히 몸을 쓰는 일에 요령이 없었는데,

실로 뭔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고 있더라도 책에서 읽거나 
남에게 주워들은 간접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뭔가를 해본다는 것, 
직접 해본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터득한 지식과 요령이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이제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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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을 자전거로 완주하는 건 바보짓이다. 

서우봉에서 시작하는 19코스를 넘어보니 알겠다.  

뭐든 해보고서야 깨달아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각주:1], 에서

묵직해진 가슴이 

‘(숨어 살 왕국이 필요하다)’[각주:2], 에서

목울대로 울컥, 


제주도 일주를 마쳐가는 즈음 

아쉬운 마음에 자꾸 도착을 미루고 있는

동복항 근처의 어느 카페,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뒤늦게 읽으며

마음 속으로만 끄윽끄윽 울고 있다,


‘하늘이 운다

구름이 운다

일생이 불려가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마지막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각주:3]


  1. 최승자,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본문으로]
  2. 최승자, 어느 봄날 [본문으로]
  3. 최승자, 어느 날 나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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