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없는, 

참고목록이 없는 글들이, 

그래서 

사실 여부를 판단할 

1차 찾을 수 없는 글들이

반복적으로 ‘복붙’되는 걸 보고 있으면

두려움에 심장이 멎는 듯하다. 


이제는 노시인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시인의 새 시집을 여는 순간

얼굴이 화끈, 


예전만 못한 문인의 글을 보는 건

情人의 치부를 보는 듯 하여, 


‘쉽게 씌어진’ 시는 없는 법, 

그러나 쉽게 읽히는 시는 있는 법이고

쉽게 읽혀지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어서


서른 편의 시를 읽고는 차마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진하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렇다, 

진한 삶의 냄새가 풍긴다. 


어느 알코올 중독자, 

인생의 단맛보다 쓴맛을 더 많이 본, 

삶은 막막하지만 그저 살아내는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을 몰라 그저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막다른 곳에 내몰리는 것은 

누구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톰 역시 마찬가지였을테지만, 

그러나 달리 선택할 무엇도 없는 삶. 


후렴구에 반복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광부들이 부르던 민요 

Waltzing Matilda[각주:1]로 인해 더 인상적인, 


탐 웨이츠의 시그너 송. 

Small Change (1976)의 첫 트랙이다. 










  1. 마치 사람 이름인 듯한 마틸다(Matilda)는 사실 광부들이 어깨에 둘러매던 일종의 가방이다. 그러니 '왈칭 마틸다'란 그들이 일터에 나가면서 어깨에서 데롱거리며 흔들리던 그 모양새에서 나온 제목이다. 노동자의 땀냄새가 묻어나는 이 곡을 탐 웨이츠가 후렴으로 쓴 건 탁월한 선택. [본문으로]

대다수가 존엄하지 못한 사회에서 극소수만 존엄해지는 것, 

그건 존엄이 아니라 ‘특권’이다. 

박권일, ‘혼자 존엄할 수는 없다’, “한겨레” 2017년 2월 2일 목요일 (25면)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누구의 생명도 지킬 수 없다. 

한 사람의 죽음 위에 눈물을 떨구지 않는다면 세상에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 위에 세운 ‘국가안보’라는 것은 1퍼센트를 위한 허구일 뿐이다. 

진정한 안전보장은 한 사람의 불안을 

촉촉한 눈매로 함께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그 근본을 잊을 때 국가는 ‘국가안보’라는 초월적 제단에 

인간을 희생양으로 바친다.

서재정, ‘국가안보를 묻는다’, “한겨레”, 2017.1.26 23면

People know what they do; 

frequently they know why they do what they do; 

but what they don’t know is what what they do does.

— Michel Foucault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여전히 신선한 음악적 시도는 계속된다.
그리고 그 중에도 주목할 만한 음악들이 꽤 많다. 
 
통영국제음악제에도 왔었다는 
오스트리아의 타악 연주자 마르틴 그루빙어와 
뮌스터슈바르차흐의 베네닉트 수도원 수도사들의 만남.  

재즈와 월드뮤직, 클래식 등 장르의 구분없이 넘나드는
다양한 배경의 연주자들이 빚어내는, 
흥미로운 음악들. 

(스타급 오보에 주자 알브레히트 마이어도 
가운데 이름을 올렸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 정세랑, “피프티 피플”



또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난다.

사실은 내일도 별 일 없이 지날 것이라는 걸 안다. 


이 즈음의 매일이란 

앞서의 날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주 미세하게 나빠지고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쓸모없어지고


10:57초부터 시작되는 2악장의 쉴 틈 없는, 
결코 듣기 편하다고 할 수 없는 긴장감이 인상적이다. 

흔히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서 이렇게 쌓아올려진 에너지는
해소된다기보다는 빗겨간다, 고 해야할 것만 같다. 
마치 그런 긴장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혹은 이 곡의 3악장(17:24에 시작)에서처럼, 
사태의 해결은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니
아예 포기하고 넋두리로 이어가듯이. 

그러나 넋두리란 본원적인 해결이 아니므로
결국 또다른 긴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존재의 불안은 끝없이 이어진다. 
종지이되 종지가 아닌 마지막 음표까지, 
듣다보면 먹먹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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