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희망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면

아무 곳에서나 흙을 퍼다 화분에 담고

물을 뿌린 며칠 뒤 들여다보면 될 일이다. 


화분에 무성히 돋아난, 미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새싹들이, 그 생명력이, 희망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혹은 한 사나흘 내버려둔 텃밭에 자라난 

저 풀들이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희망이겠는가. 


그리 생각해 본다,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은 절망이라기 보다는

무관심, 달리 말해 게으름이라는 것을, 

희망이라면 도처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돌아보지 않은 사이 어느새 

그곳에. 


(곧 겨울이 다가올 것이다, 

시클라멘 화분이나 하나 구해와야겠다.)


우리는 이제 진지하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하고

물어야 한다, 


살아있다는 게, 

하루하루 무사히 마치는 게 

기적인 나라에서 산다는 건 어쩌면

그런 것이다, 


밤새 별고 없었는지 서로에게 묻는 것, 

오로지 기댈 곳은 어떤 공권력도 아닌

내 옆의 당신 밖에 없다는 것, 


그래도 70대 중반의 어머니가

이제 이 땅에 더 이상 원전은 

짓지 말아야 한다며

밥상을 앞에 두고 걱정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믿어보는 것,


 그리고 또, 



평균 초속 6m의 바람, 

15km만 뛰어도 오르막을 한참 오른 듯

다리가 뻐근하다. 



삶은 어쩌면 자전거 타는 것과 

비슷하다. 


비가 온다고, 바람이 너무 분다고, 

너무 덥다고, 혹은 춥다고, 

눈이 쌓였다고, 

오늘은 내키지 않는다고 

온갖 핑계를 들며

창 밖 풍경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얻을 수 있는, 

또는 이뤄낼 수 있는 것이란

없다. 

Joy doesn’t betray but sustains activism. 

And when you face a politics that aspire to make you 

fearful, alienated, and isolated, 

joy is a fine initial act of insurrection.

 

— Rebecca Solnit, Hope in the Dark, 

Canongate Books, 2016

‘실현할 수 있어 보이는 것만 꿈인가. 

그럼 실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텐데. 

해 보지도 않은 사람이 

안 된다고 정하는 건 이상하잖아.’

[...]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할 수 없는 일을 좇아가는 것이 꿈이라면

사람은 꿈을 가짐으로써 능력이 자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납니다. 


— 우에마쓰 쓰토무, “꿈이 없다고 말하는 그대에게”, 

최려진 옮김, 마일스톤, 2016

Not everything that is faced can be changed, 

but nothing can be changed until it is faced.

— James Baldwin 


The future belongs to those 

who prepare for it today.

— Malcolm X



Quoted in 

Rebecca Solnit,  Hope in the Dark, Canongate Books , 2016

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서만 물어보는가. 

아이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떻게 인생을 누리고 싶은가’는

왜 궁금해하지 않는가. 


왜 무엇이 되는 지만 중요하고

왜 그것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어 그것이 되고 싶은지는 

묻지 않는가. 


어떻게, 무엇을, 이 궁금하지 않으니

그 목표는 늘 富의 척도로 채워지기 일쑤이며, 

무엇무엇을 이루고 싶어 무엇이 되기 보다

무엇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물질과 권력의 논리가 자리잡는다.


엇보다 ‘무엇이 되고싶다’가 

삶의 목표가 될 경우

그 목표가 달성된 이후의 삶은 

무의미하거나 혹은 무기력할 것이고, 

이는 우리 사회의 (아울러 나 자신의) 가장 큰

비극이다. 

무릎 위에 놓인 쪽지에

나는 의심했고

옆의 아주머니는 지갑을 열었다. 


하기는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그 도움이 어디에 쓰일 지 

혹은 어떻게 쓰일 지 염려하는 것은 

애초에 도울 생각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고, 


진정한 용기란

머리로 생각을 앞세우지 않는, 

행동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시라는 게 근본적으로 언어의 유희이기는 하나 

마냥 언어의 유희란다면 그 시가 과연 
어디에 소용 있겠습니까.

시가 어떤 데일 듯한 뜨거움도, 
심장이 멈출 것 같은 냉랭함도 남기지 못한다면, 
그것이 문학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과연 온당하기는 한 겁니까. 

요즘의 잘 나간다는 시인들[각주:1]의 시집을
굳이 구해 읽고 싶지 않은 건
게을러져서인 탓도 있지만 
대중매체에 나오는 입담 이상이 아닌 글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를테면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는 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반영’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시, 
쿨하게 돌아서서 웃어넘기는 게 아니라
진상을 부리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시, 

다시 그런 시가 읽고 싶습니다. 


만져지는 시란
어떤 느낌입니까
[...]
손끝에 만져지는 슬픔이란
어떤 느낌입니까
혹시 잠 못 드는 밤
명치끝에 만져지는 그것은
따님의 이름입니까

— 제페토, ‘명치’, 
“그 쇳물 쓰지마라”, 수오서재, 2016



  1.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60481.html?_fr=mt3 [본문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슈만을 좋아하세요”라고 묻기는 힘들다. 

슈만의 음악이 누구의 것과 
가장 비슷한 것 같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대답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슈만은 슈만과 가장 닮았으며

슈만과 가장 닮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그에게 시시때때로 찾아온, 

그래서 생을 마감하는 이유가 된 정신적 문제만큼이나

작품마다 스타일이 다르게 들리기 때문일까.


그래도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피아노 4중주와 5중주, 환상곡 C장조와 같은 곡들이

특히 빼어난 선율과 그를 뒷받침하는 형식미에 있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봄’이라는 별칭이 붙은 

교향곡 1번의 4악장 도입부에서

찰랑거리며 재잘거리는 현 파트야말로  

봄날의, 혹은 사랑 앞의 설렘으로 가득한,

명곡이다.  


클라라와 결혼한 이듬해인 

1841년 완성되고 초연됐으니

어쩌면 슈만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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