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신 지 이제 석달여, 

꿈에 두어 번 나타난

어머니 모습은


삶의 마지막 일곱달처럼

어딘가가 아프거나

괴롭거나,


이럴 줄 알았다면

보통의 기억을 더 많이

쌓아놓았어야 했는데,


여행을 가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멋진 것을 같이 보거나

근사한 일들을 같이 하거나,


아니 꼭 그리 

특별한 일들은 아니더라도

그저 보통의 기억을, 


매일매일의 일상을

더 선명하게

살아낼 것을 그랬다, 


그랬다면 

어쩌면 꿈에서의 모습도

씩씩할 때의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뒤늦은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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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슬픔과 눈물 뿐이다.

삶이 슬픔과 눈물 뿐이라는 것을 알면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고

그걸 모르면

허망한 것을 좇고 있다는 것이지.

박흥용, “새벽날개제36화


그렇다,

실로 그러하다. 


삶에 뭔가가 더 있다면,

커트 보니것의 말마따나

지루함일 것이다.


가벼운 재담들이 넘치는 시대, 

웹툰에서 이토록 깊은 슬픔과 눈물을, 

매 화마다 이렇게나 묵직한 삶을

엿보게 되다니. 


그러므로 오늘도 

슬픔과 눈물에 감사하기를, 

그렇지 않았다면 텅 비었을 삶이

슬픔과 눈물로 충만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내일은 또 새로운

슬픔과 눈물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반짝임을 잃은 현실이 

반짝이는 미래를 열 수는 없다.

그것이 내 무섬증의 실체일 것이다.

- 공선옥, "무섬증의 실체", 한겨레 2019.1.14(월) 26면


나는 오늘 

세상에 반짝임을 더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어른들이 세상을 좀 더

반짝일 수 있도록

힘쓰지 않는 사회라면,

과연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반짝일 수 있을 것인가.


되돌아보고 되돌아볼 일이다,

비록 나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그것이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의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뒤늦게나마 세운, 

거창할 것 없는 새해결심이라면

언제 어디서건 전단지 내미는 손을

외면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즉슨, 그동안 부끄럽게도 대개 매몰차게 

모른 척 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눠주는 사람은 얼른 일 끝내고

수당을 받아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니 좋고,

재활용이 가능한 종이들이 거리에 

구겨지고 흩날리며 버려지지 않아 좋고, 

저는 저대로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 좋을테죠.


이런 당연한 것을 

결심씩이나 해야 하다니

참으로 미련한 인간이 저이겠습니다만

그래도 오늘로 작심삼일은 면한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그래도 조금쯤은

나은 사람이 되겠죠, 

부디.

목적지가 없는 이에게


삶이란 너무 긴


우회로

그러나 또 어떤 종류의 슬픔은

삶이 다한다 한들 닳아지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돌처럼 단단히 굳어지는 것이어서,


(어쩌면 그나마 시도 때도 없이 

일렁거리고 출렁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언제라도 눈물은 충분하지 않은 법인

그런 종류의 슬픔도 있는 것이어서,

서투른 위로 대신 침묵이 나은 법도 

있는 것이어서,


(이제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누군가가 그, 자식잃은 부모들에게 

던진 말들은 얼마나 잔인하였던가, 

떠올리는 밤.)

벌써 십여 년 보아 온

친구의 골든 리트리버를 쓰다듬다가

물끄러미 얼굴을 들여다보니

더이상 황금색이라기보다 희끗희끗,


입양할 때도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

이제 그녀도 할머니가 되었을테고, 

이렇게 가끔 만나 온기를 주고받는 일도

그리 얼마 남지 않았겠다 싶어 괜히, 


문득 어머니의 마지막 날들에 

병환으로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날들이 떠오르면서 

다시 또 괜히, 


이 하염없는 그리움의 날들에

다만 눈시울이 젖어들 밖에, 

그녀 얼굴에 내려앉는 세월의 흔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코끝 시큰할 밖에.


우리는 스스로 잔혹해지지 않기 위해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슬픔이 나눠질 수 있다 말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오로지 나눠질 수 있는 것은

슬픔에 따라오는 분노와 배신감, 

혹은 억울함과 쓸쓸함 같은 것일 뿐

슬픔 그 자체가 아님을, 


슬픔은 그저 오롯이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내 안의 눈물이 마르는 그날까지,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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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


신발끈만 

단단히 묶는다면,

나침반이 없다 한들

어떠하리.


오래 생각해 온 여행,

2019년에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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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딱 한 달이다.

그날처럼 둥근 달이 

참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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