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shall Cordelia do?
Love, and be silent.
King Lear, Act 1 Scene 1


최선을 다하지 했으니

남는 것은 집착이다

있을  일 했으니

애꿎은 이별을 탓한다

이토록 미련한 미련이라니

0점부터 10점까지 매겨진 고통의 척도에서,
보통 10점은 여성의 경우 출산의 고통에 비교된다.
반면 남성들에게는 딱히 비교할 절대적 고통이 없다.

출산을 안 해 본 사람과 

해 본 사람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여성들에게는 젠더 고유의 

공통적 경험이라는 게 있는 셈인데,


그 경험(과 생리에 대한 공통경험)이

남들의 고통에 대한, 대개 남성들보다 훨씬 나은

공감력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단지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동안 나는 

x가 의태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오랜만에 테드 창Ted Chiang의 

Great Silence를 다시 읽다보니, 


그렇다, 

x는 사실 의성어였다, 


편지나 문자에 혹은 SNS 메시지에

x는 늘 소리내어짐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것,

그러므로 x는 文語가 아닌 口語이고,


그래서 Great Silence의 마지막 세 문장은

이를테면 “잘 지내, 사랑해, 쪽”[각주:1], 이라고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소설은 눈으로만 읽는 게 아니라

반드시 소리내어 읽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글인지도 모르겠다고,


x는 이제부터 

적어도 내게는 의성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1. You be good. I love you. X [본문으로]


날짜 상으로는 하루 늦었지만

그래도 역시 오늘은, 

아레사 프랭클린.


흥미롭게도 댓글에

흔히 따라붙게 마련인 R.I.P.가

그녀의 부고 소식 글타래에는

비교적 드문데,

어쩌면 그녀는 이미, 언제나

Queen of Soul이었고, 

앞으로도 그럴테니

그저 R-e-s-p-e-c-t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추모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동안 고마웠어요, 아레사,

앞으로도 영원히.





이즈음의 독서란

책장을 정리하기 위한, 

다시 말해 버리기 위한 책읽기가 대부분인데, 

막상 책들을 버리기 위한 독서란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서너 페이지를 버티지 못하고

재활용 박스로 향하는 책은

글쓴이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확인하는 시간도 아까운 까닭에

그것대로 실망스럽고,


의외로 괜찮아서 끝까지 읽거나

아니면 나중을 기약하며 

애써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 책은

버리자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으니

그것대로 당혹스러운 까닭이다. 


아, 

나는 도대체 뭐하자고

책들을 이렇게 많이 쌓아 놓았던가,

웬 욕심을 그리 부렸던가,


이러면서도 사은품인 가방이 탐나

장바구니의 책들을 주문하는 

나란 인간은

도대체 뭐하자고.



루마니아 작곡가 

제오르제 에네스쿠(Geroge Enescu)가 삽십대 초반인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작곡한 

독주 피아노를 위한 세번째 모음곡집, Op.18은

모두 일곱 곡으로 이뤄져 있다. 


서주 격에 해당하는  Melodie와 

두번째 곡 초원(Steppe)으로부터의 목소리,

제3곡 우울한 마주르카,

춤곡의 리듬을 살린 제4곡 Burleske

역시 경쾌한 다섯번째 소품 Appassionato를 거쳐, 

위의 연주는 바로 여섯번째 곡인 Choral(합창)과

이에 바로 이어지며 상호연관성을 드러내는

마지막 곡 Carillon nocturnes (저녁 종소리)의 실황.


영국의 음악전문지 Gramophone지가

2003년 에네스쿠의 모음곡 세 곡을 연주한

Luiza Borac의 음반을 리뷰하면서

가장 필청의 트랙으로 이 두 곡을 꼽으며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화성의 진행(Choral)과

메시앙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종소리의 

선례라 할 만한 Carillon에 대해 언급하는데[각주:1]

실로 메시앙의 “아기예수에 대한 스무 개의 시선”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사실 에네스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라는 것, 

루마니아의 민속선율을 작품에 녹여냈다는 것

(특히 2곡의 루마니아 랩소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악곡이다),

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바이올린 주자일 뿐 아니라 

제자도 많이 길러내어, 

그의 이름을 딴 콩쿠르가 열리고 있다는 것 정도. 

덧붙이자면 예후디 메뉴인의 스승이었다는

후일담적인 에피소드까지.

그러나 사실은 그의 작품에 대해, 

또는 그의 고국인 루마니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각주:2]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피아노 모음곡집은

그가 후기 낭만주의에서 근현대음악으로 넘어가는 시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꽤 성공적인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아울러 그가 이 곡을 완성한 1916년, 

루마니아는 세계 1차 대전이라는 전화에 휩쓸려

동맹국의 일원으로 참전을 결정했으니, 

어쩌면 훗날 메시앙의 작품이 2차 대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것처럼

이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두 곡의 소품 역시

전례없는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으로부터의 

안식을 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합창, 그리고 저녁 종소리. 

사람들이 집으로 향하는 시간,

군인들은 전쟁터로 향해야만 했을 지도.

그런 신산한 삶에 대한 위로였을 수도. 


(이 작품의 연주는 유튜브에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다행히 위 링크의 연주는 아주 뛰어나지는 않으나

작품의 분위기를 맛보는 데 부족함은 없다.)



다음의 링크는

4분 31초에 시작되는 두번째 곡 Fugue와 

8분 10초경의 세번째 곡 Adagio를 듣다보면

J.S. 바흐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그의 첫번째 피아노 모음곡집.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 Aurora Ienei의 연주.




  1. https://www.gramophone.co.uk/review/enescu-piano-works [본문으로]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네스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당혹감은, 영국 일간지 The Guardian의 이 기사를 읽는다면 나 혼자 만의 것은 아닌 듯하다. https://www.theguardian.com/music/2002/oct/25/classicalmusicandopera.artsfeatures [본문으로]

어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것은 빛처럼 그림자를 만들어내지도, 

그늘을 드리우지도 않는다. 


당신은 완전한 어둠을 상상할 수 있는가? 

어디선가, 이를테면 32만년 전의 별이나

반딧불이 한 마리의 꽁무니로부터,

혹은 누군가의 주검에서 흘러나오는 

인광燐光이라든가, 

당신은 어디에선가 늘 빛을 찾을 수 있다. 

(완전한 암흑이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완전한 평등 또한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우주에서라면, 당신은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수성의 공전 궤도에서 바라본 우주와

이제는 행성들의 목록에서 사라진

명왕성의 공전궤도에서 바라보는 우주는

똑같은 어둠의 무게로 다가올까,


당신은 문득 궁금해진다, 

어떤 은하와 또다른 은하의 사이, 

그 중간이라면,

이 팽창하는 우주의 (그런게 있다면) ‘가장자리’라면.


저녁에는 바람이 제법 먼 곳으로부터 불어온다

무릇 모든 일에는 끝이 있음을,

이 여름도 그러할 것임을, 

머지 않아


애니메이션 “모아나(2016)”를 뒤늦게 보고

‘인생영화’ 목록에 올리기로 한다. 


세상의 탄생과 문명의 발생에 대해

폴리네시아 인들이 어떻게 상상해왔는지, 

또 그들이 섬에서 섬으로 항해하면서

어떤 삶들을 이어왔는지, 

필시 지금보다는 잦았을 화산폭발이

그들이 누려온 삶을 어떻게 위협했고

어떻게 극복해왔는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민담이며 설화가

아주 많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과연 참고할 만한 책이 있을까.

번역서는 딱히 찾지 못하겠고, 

표지가 인상적인 이 책이나 구해야 할까보다.

(이 엄청나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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