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이마를 좀 식히나 싶더니

아침부터 

욕망에 들뜬 자의 날숨 같은 바람이, 


금세

대지가

후끈후끈하다.


비 올 줄 어찌 알았는지

개미들이 아침부터 문앞에

제방을 쌓아올렸는데,


돌아오다보니 어린이집 꼬마들이 

호기심에 헤집었는지

다 허물어졌더랬다. 


비가 많이 오는데

그 개미들은 무사할까,

그래도 꿋꿋하게

다시 둑을 올려놓았을테지,


조금은 궁금한 

장마철 오후.


나는 늘 秘儀에 이끌렸고, 

종교적이지는 않았으나 靈性을 흠모해왔다. 

메시앙의 음악이 그려내는 것은

서정적인 서사, 혹은 서정으로서의 서사, 

서사를 넘어선 영성의 파동. 


특정 주제를 등장인물이나 

기타 요소에 연결시키곤 하는

라이트모티프를 사용했으니 서사는 서사인데, 

구체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사가 가진 전반적인 정서가 도드라진달까. 


그러므로 흔히 번역되는 

“아기 예수를 향한 스무 개의 시선”보다

영어권에서 흔히 번역되는

“아기 예수에 대한 스무 가지의 명상”이 

1944년 씌어진 이 작품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메시앙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듣기에 부담없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고, 

특히 15번째 곡인 ‘아기 예수의 입맞춤’은

가 드뷔시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짐작케하는, 

어쩌면 모르는 사람에게는

드뷔시의 작품이라 해도 

아주 어색하지는 않을 정도의,

매우 아름다운 곡.


영국의 피아니스트 조안나 맥그레고르는

엄청난 파워와 섬세함을 겸비해

이 두 시간에 이르는,

복잡하면서도 단정한 곡을 

정말 매끄럽게 해석, 연주해냈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종이

곡에 따라 동시에 울리기도 하고

따로따로 조용히 속삭이기도 하는 듯한, 

하나하나의 음이 종소리와도 같은 

피아노의 음색을 투명하게 잡아낸

녹음도 인상적인 음반 (2010년)



1907년 태어나 1991년 세상을 뜬
터키의 대표적인 작곡가 
아흐메트 아드난 사이군은
(‘러시아 5인조’처럼)
터키의 민속선율과 서유럽의 클래식 작법을 
매우 탁월하게 결합시켜낸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영국 일간지 The Times에 따르면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헝가리의 바르톡,
스페인의 마누엘 데 파야와 같이
터키를 대표하는 작곡가. 

작품의 범위도 상당해서, 
5곡의 교향곡과 2곡의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곡들, 
다수의 실내악곡과 오페라, 
심지어 발레곡까지 손을 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 

그 중에서도 일단 내 귀에 들어온 것이자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연주되는 것이
피아노 협주곡 2곡이니 일단 기록을 남겨본다. 

먼저 1952년에서 1958년 사이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1번 Op.34는
1악장 첫머리부터 서양음악과는 뭔가 다른, 
긴장감 넘치며 동양풍의 분위기가 풍긴다. 
그리고 바로 치고 들어오는 피아노가
뿜어내는 에너지 역시 대단하지만, 
느린 패시지에서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사이군의 솜씨는 탁월하다. 

터키의 민속음계를 활용하면서도
동시대의 경향들에 관심이 많았는지
독특한 동양풍과 현대적인 작법이 
19세기말~20세기초 후기 낭만음악에 익숙하다면
그리 듣기에 어렵지 않은 형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아래 3악장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굴신 오나이의 에너지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이러저러한 배경설명 없이도
작품이 가진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정도.


반면 1985년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조금 더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난해하며

현대적이지만, 

매우 명상적이기도 하다. 

스튜디오 연주로 링크한다.


특히 17분 20초경 시작하는 3악장은

영화음악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선사하며, 

듣기에도 수월하다. 


사실 사이군에 대해 정보도 많지 않고

터키의 민속음악에 대해 분석하기에는

전문적인 지식도 매우 부족하지만

무릇 훌륭한 작품들은 장황한 설명 없이도 

마음에 와닿지 않던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내게 이 두 곡은 

종종 꺼내듣기 충분한 매력을 지녔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Ezio Bosso의 

2016년 음반 “...And the things that remain을 들으며

문득 미니멀리즘이란 

한편으로 푸가의 현대적 변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제시된 주제에 의해 전체 악곡이 규정되는 것, 

제시된 주제에 대한 수학적 변형들, 

주제의 자리바꿈과 역행, 확대와 축소, 

그럼으로써 빚어지는 음악적 칼레이도스코프. 


에치오 보쏘는 이 앨범에서 

바흐의 푸가, 드뷔시의 전주곡과 

자신이 쓴 작품들을 절묘하게 배열해

바흐와 미니멀리즘 사이의 관계를 역설한다. 


스티브 라이히의 작품들, 

이 블로그에서도 한번 다뤘던 

모튼 펠드먼의 작품들, 

미니멀리즘에서 복수의 악기나

혹은 복수의 성부를 사용한 악곡들은

결국 바흐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감히 내가 

페미니즘을 이해한다고,

혹은 그 ‘대의’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내 앎과 경험이 너무 짧고

나의 공감능력은 평균에 훨씬 못 미치며

여성을 대상화하고 주변화하는 

전통적인 남성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중년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래도

‘시건방진’ 눈빛의 젊은 여성 후보를,

그 후보가 시건방지다는 바로 그 이유,

‘나이도 어린 여성’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지하기로 결심한다. 


젊고 시건방지고 도발적이고 논쟁적이며

무엇보다 기득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멋진 일 아닌가. 

부디 유의미한 득표를 기록하길. 


프로그램

멘델스존, Ruy Blas 서곡

슈만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 교향곡 Eb장조, “영웅”



1. 

안토니오 멘데스의 매력은

상상을 초월. 


다이내믹을 만들어가는 솜씨와, 

크게 선율선을 만들어가면서도 

세심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연주. 


특히 템포 조절이 무척 드라마틱했고

리듬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다. 

베토벤의 3악장은 워낙 춤추는 악장이지만, 

2악장마저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일종의 살풀이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아주 가끔 오케스트라가 이 춤사위를

충분히 좇아가지 못한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훌륭한 연주였다.)


슈만의 협주곡 협연도 깔끔 그 자체로, 

자칫 난장판 직전이 되기 쉬운

사운드를 정돈된 형태로 들려줬다. 

혹시라도 나중에 안토니오 멘데스가

슈만 교향곡을 연주할 일이 생긴다면

꼭 가보리라 생각이 들 정도. 

(교향곡 전곡 싸이클이라면 더 좋고.)


카를로스 클라이버 만큼이나 정열적인

지휘 폼도 인상적. 

(클라이버 이후 최고의 지휘 스타일인 듯.)



2. 

베로니카 에베를레의 바이올린은

매우 음색이 고왔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열일을 해도

딱히 빛은 별로 안 나는 슈만의 협주곡에, 

단정하고 곱되 섬세한 연주가 빛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악보를 보고 연주했는데, 

자세가 구부정해져 보기 안쓰러웠다.

저런 자세로는 커리어를 

계속 쌓아나가기 어려울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것도 잠시, 

앙코르였던 프로코피예프 

무반주 소나타에서는 암보로 훌륭하게, 

자세도 당당하게 연주. 


곱고 예쁘면서도 지적인 그녀의 음색은

어쩌면 독일 레퍼토리 만큼이나

쇼송과 프로코피예프, 

라벨 등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 



3. 

라이브는 역시 

평소보다 집중해 듣다보니

새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존재하는데, 


감히 추측컨대

c단조 교향곡의 저 유명한

‘운명’의 주제는

“영웅”의 2악장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2악장 Marcia funebre는 

3번 교향곡의 조성인 Eb장조의 관계단조인

c단조로 시작한다. 

그러니 3번과 5번은 뭐랄까, 

동전의 앞뒷 면과도 같다.


그리고 그 유명한 ‘따-다-다- 다---’의 

리듬 역시 이 곡의 2악장에서 

덜 성숙한 형태로나마 사용됐다는 점에서, 

운명 교향곡의 명백한 프리퀄이라고나 할까. 




나는 슬픔을 가장했으나

사실은 안도했다,


매번 그러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부디 언젠가 나의 떠남도

그러하기를


그토록 불안해하며 기다리던 것이

마침내 당도했음을.



우리는 언제나 건강했지만 감기에 걸려 

잠깐 몸이 굼뜨게 되는 때도 어쩌다 있었다. 

이 때는 이웃에 사는 

개와 고양이가 하는 것처럼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 헬렌 & 스콧 니어링, “조화로운 삶”


어찌 보면 너무나 예외적인 삶의 기록이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감탄하게 되지만, 

아마도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기 때문인지

정작 가슴에 와 닿은 건 위의 구절


그렇구나, 개와 고양이

아프면 자신의 목숨을 자연에 맡기는구나. 

그렇게 쉬다가 낫는다면 더 사는 것이고,

반면에 힘이 떨어지면 자연의 품에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아는 것일진대, 


왜 우리는 

아프면 더 먹으라고, 

더 챙겨먹으라고, 

온갖 보양식들을 

더 꾸역꾸역 먹으라고, 

그렇게 몸에서 받지도 않는 것들을

억지로 우겨넣는가.

(일을 해야 하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큰스님들이나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현자들이

때가 되면 곡기를 끊는다는 것이

허튼 말은 아니리라, 

짐작만 해 볼 따름이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 활동을 

누군가 배후에서 기획했다거나 

음모에 이용될 것이라고 보는 건

일본 우파의 관점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시라도 미투 운동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고

이 운동의 미래를 예언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귀엣말을 들려주고 싶다. 

설령 당신의 예언이 적중하더라도

생존자들이 말하는 진실은 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는다고. 

당신에게 당장 시급한 건 

공감능력이 바닥난 젠더적 몽매 상태를

자각하는 거라고. 

안영춘, ‘그의 예언이 적중하더라도’, 한겨레 2018.3.1(목) 19면



극우 집단이 배후 세력을 추궁하며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한 것은

‘모든 정보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자기 앎의 절대화에 의해 가능했다. 

이런 정보 통제를 염려한다는 명분을 띠고 있으나

‘모든 흐름을 아는 자’가 미투의 배후 세력이

등장할 것이라며 경고하는 ‘예언’은

말 그대로 발화 주체를 절대적 앎을 지닌 

신의 자리로 등극시킨다. 

그리고 신적 권력을 통해 

추궁당하는 집단의 목소리를 빼앗고, 

말들의 조각도 불태워 버리고 있다. 

- 권명아, ‘배후 공작과 성지 수호의 메시아주의’, 한겨레 2018.3.2(금) 23면



예언이란 현실과 논리를 능가하는 것, 

그것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가해자의 목소리일 수밖에,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이라고, 

아니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도 심히 걱정스럽고, 


혹시라도 그걸 믿게 될까봐,

아니면 유사한 또다른 아무 말들을

내가 퍼뜨리고 다니게 될까봐

나 자신 역시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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